왕준서와 의형제(義兄弟)를 맺다
그날 밤에는 진원성은 호흡 수련을 하지 않았다.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수련을 빼먹은 것은 오늘 오전에 했던 오통귀와의 대련을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서, 그것에 생각을 빼앗겨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누워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대련은 진원성에게는 첫 싸움이었다. 아니 첫 대련이었다. 항주에서의 살인은 결코 권술을 사용하는 그런 대련은 아니었던 것이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어떤 정체 모를 힘에 이끌려, 어른 둘을 기습하여 칼로 찌르고, 벤 것일 뿐이었다. 굳이 승리라 한다면, 어른들이 미쳐 짐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이 성공하여 거둔 우연한 승리라고 할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진원성은 대련과 싸움의 차이조차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대련은 창술에 들어있던 발걸음 움직이는 것과 대운하를 타고 오면서 만들고 익혔던 권술을 이용하여 막고 피하고, 몸을 비틀고 움직이며 치렀던, 정말 어떤 무술이라면 무술을 펼쳐서 상대를 이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원성은 정말로 자기가 이겼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두 번 상대를 넘어지게 하였다고, 그래서 이긴 것일까? 진원성은 대련의 처음부터 자세하게 한 동작씩 되새겨볼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오통귀가 달려들면서 왼 주먹을 뻗쳐올 때에, 뒤로 물러섰다가, 왼쪽으로 비켜섰다가, 다시 뒤로 한걸음을 물러섰는데, 그 때는 진원성 자신이 아직 제대로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피한 것일까? 아니야 상대의 공격이 무서워서 피한 것인가? 만일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상대의 주먹을 비켜 막아내는 것으로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던 진원성은 오늘의 대련 역시 운이 좋아 이겼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오통귀의 공격 첫 동작에서부터 다음 일곱 번째이나 여덟 번째 동작까지의 공격은, 어떤 공격법으로써의 연속 공격이었으며, 진원성이 처음부터 피하려고만 생각하고, 지지 않으려고만 하는 자세로 나갔던 것이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이기려고, 어설프게 상대를 공격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즉 전적으로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오통귀의 주먹이나 발길에 얻어맞고, 그 타격의 결과로 땅에 쓰러지거나, 다음의 더욱 호된 공격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오통귀의 첫 공격은 바로 상대에게 가하는 오통귀가 갖고 있었던 최고 실력의 기습공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원성이 첫 번째의 대련이어서 어떤 두려움이나 저마저마한 마음으로 일절 공격적 태도 없이 전적으로 수비만 한 우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오통귀의 첫 번째의 소나기 공격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오통귀는 한번의 파도가 지나가면 한번의 잔잔함이 오듯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공격을 멈추었고, 그 이후부터는 진원성은 오통귀의 공격을 꽤 여유 있게 피할 수 있었으며, 진원성이 만일 공격적으로 나섰다면, 상대의 공격 주먹질에는 상대의 팔에 공격을 한다든가 상대의 발길질에는 상대의 종아리나 허벅지에도 공격을 한다든가 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상대가 노련한 권사라면 이미 첫 번째의 소나기 공격 후엔 바로 졌음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이 마땅했다고 진원성은 생각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승님은 이때에 이미 승부를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승부를 선언하기에는 아직 일렀을 뿐이다.
또 오통귀의 첫 번째 소나기 공격이 만일 열다섯 번 정도까지 이어졌더라면, 아마도 진원성이 전적으로 피하기만 하였더라도 끝내 오통귀의 공격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오통귀의 첫 공격 끝난 후부터는, 진원성이 상대 공격의 빈틈으로 반격을 하지 않은 것은 진원성이 마음이 좋아서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대에게 지지 않겠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공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일 뿐이었다. 상대가 좀더 실력이 있었다면 그래서 이런 것을 알았다면, 진원성이 자기를 무시하고, 놀리고 있다며 분노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진원성은 오늘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이리저리 되풀이 검토해보고 내린 결론은 이러하였다.
오통귀의 실력은 처음에 있었던 공격법으로의 기습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진원성 자신의 실력은 오통귀보다 상당히 우월하다. 그러나 싸움의 경험과 요령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또 싸움의 처음 시작에서는 항상 상대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한 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기 전에는 결코 실력의 전부를 다해 공격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기습 공격이 유용할 때가 있지만, 상대가 기습에 대비하고 있다면 오히려 패망의 한 수가 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승님의 하셨던 서로 화해하도록 해주셨던 것은 참 좋은 경험이었다. 지든 이기든 대련은 싸움과는 달리, 나중에 화해를 하고, 다음 다시 대련할 약속을 할 수도 있으며, 서로의 권술실력을 높여가는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대련은 끝난 후에 상대와 화해를 하는 것이며, 싸움은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다음 날이 되자, 진원성은 방향에 좀 익숙해졌으므로 어제까지는 가보지 않았던 다른 길로 돌아다녀 보았다. 유리창 거리라고 부른다는데, 유리창으로 만든 집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사용하다가 필요 없어진 중고 물건 들을 가져와서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거리였다. 책이나 붓이나 벼루 같은 것들도 많이 있었으며, 의자나 책장 등의 가구들도 있었고, 각종 모자나 의류 들이 있었으며, 도자기나 다기, 숟가락 같은 생활용품 들도 있었고, 각종 장신구 들과 골동품 들도 있었으며, 칼이나 창, 활과 화살 또는 갑옷 같은, 군병들이 소용하는 물건 들도 있었고, 그렇게 3 리나 4 리가 되는 길거리가 온갖 중고품 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진원성은 아주 천천히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서 점심은 국수를 파는 곳에서, 동전 2 문을 내고 국수를 사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오후에는 가로 세로 두 치, 세 치 정도 되는 작은 목판에 불에 달군 인두로 글씨와 그림을 새겨서 파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가게에는 미리 그림을 그려놓은 많은 나무 판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어떤 젊은이 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새겨서 생일축하 선물로 준다고 하며, 동전 오(五) 문을 내고 가져가는 것을 보고는 진원성은 왕준서를 생각해내었다. 그래서 진원성은 동전 오 문을 내고, 그림이 그려진 나무 판을 하나 골라서, 글씨를 새겨 달라고 하였다. 향기로운 나무 타는 냄새와 희뿌연 연기를 피워내면서 목판은 까맣게 글씨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글씨의 주변은 어떤 바위들이 있고, 소나무도 있으며, 검수리 두 마리가 나무 위에 사이좋게 앉아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서, 아주 귀중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글귀는 다음과 같다.
"진원성, 왕준서를 만나 형제를 맺었다. 만력 30 년 모월 모일"
진원성은 목판을 조그만 보자기에 싸서, 휘주회관에 들어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병필태감의 종 왕준서에게 전해달라고 맡겨두었다.
진원성은 다음 날도 하루 종일 유리창 거리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그래도 무엇인가 하나 살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해적들과 싸울 때에 조총과 활을 쏘던 것이 생각나서, 무구류 들을 파는 곳에 가서 조총을 찾아 보았으나 조총은 없었고, 그래서 활과 화살을 보다가, 아주 작은 활이 있어서 점원에게 값을 물어보았다. 그 활은 각궁이라고 하며, 화살통에는 화살이 30 대가 꼽혀 있었고, 활과 화살통, 화살을 다 합하여, 무려 은자 다섯 량이라고 하였다. 활에 시위를 두 손으로 간신히 메고서, 그냥 잡아당겨 보았는데, 아직 어려서 인지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돌아서려고 하는데, 가게의 주인이 말을 했다.
"왜 그 활이 맘에 드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린 아이한테는 검이나 창이나 활은 팔지 않는단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오거라."
"사고 싶은데 돈도 부족하지만 나이도 부족하군요. 제가 갖고 있는 돈이 삼백 전 밖에 안되거든요."
"그런데 그거보다는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런 뇌(弩)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단다."
"뇌가 무엇이지요?"
가게 주인은 저쪽에서 이상한 활을 하나 가지고 와서 보여주셨다.
"이건 소뇌(小弩)라고 하는데, 이렇게 시위를 당겨서, 여기에 걸고, 화살을 이곳에 얹어놓은 다음 목표를 겨냥해서, 여기 당김 쇠를 당기면 화살이 날아간단다. 이것은 활보다 힘이 적게 들어서, 목표를 잘 겨냥할 수 있어서 유리하지만, 계속 쏘아야 하는 점에서는 활보다 불리하단다."
"그렇군요. 전 아직 나이가 부족해서 다음에 사야 될 것 같네요. 좋은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원성은 무구류(武具類) 가게를 나와서 돌아왔으며, 장사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었다. 이틀 동안 유리창거리에서 실컷 온갖 물건 들을 구경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이렇게도 많은 물건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장사라는 것이 이런 물건 들을 필요한 사람 들에게 갖다 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진원성은 상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갖은 셈이었다. '상인(商人)이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 들을 골고루 전달해주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림 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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