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언 - 3.
“ 루이스! 오 ! 내 새끼! ”
“ 오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칼리어스 선조님 감사합니다 ”
가르딘 백작과 함께 마탑에서 나와 천천히 이동, 공작이 누워 있는 침실의 문을 열자,
노부인이 뛰어나와 부둥켜 안으며 기쁨의 눈물로 왈칵 끌어 앉는다.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나도 모르게 싫지 않은 감정으로 어정쩡하게 안길 수 밖에 없다.
저 간절함속에 흐르는 환희를 깰 용기가 내게는 없다.
아니면 좀전에 봐야했던 그 처철한 슬픔의 눈물을 다시 볼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공작은 누워서 뭐라고 소리를 치고 싶으나, 말이 안나오는지, 아님 말할 기력이 없는지 답답함과 초조함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환환 미소로 반기고 있다.
그리곤 힘없지만 따듯한 목소리로 부른다.
“루이스, 내 손자 ”
노부인은 품에서 잠시 벗어나 공작전하의 옆에 앉았다.
잡아오는 손길이 마치 보물을 감싸듯 조심스럽다.
잠시의 침묵을 깬 것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 사실 마법의 확인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너는 레온을 닮았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다, 내 손자임을.. 설마 제 핏줄을 몰라볼까? 그래도 다른 이들이 뭐라할까봐 확인하고 영상녹화까지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가르딘 백작 “
“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레온 대공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공자님은 그 분의 아들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 공자님! 정식으로 다시 인사올립니다. 공작가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르딘 백작가의 당대가주입니다 ”
“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루이스입니다 ”
“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저는 공작가의 가신입니다 ”
“ 백작님! 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가르로 시작하는 이름의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네가 존경할 사람이지 존경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그분들은 이 아비의 형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이니 네게는 아비와 할애비 같은 존재라고요 “
“ 이곳에 오기전까지는 두 분이 어떤 분들인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가르 두 분이 누구신지... 그러니 제가 어찌 백작님께....“
“ 역시 레온 대공자님이셨군요. 그래도 말을 놓으셔야합니다. 루이스 공자님! “
“ 그래! 내 아들 레온이 아들 교육을 잘 시켰구나! ”
“ 맞다. 가르딘 백작은 존경할 만한분이고 네게 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는 사람이다 “
곁에서 따뜻한 미소로 나와 백작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작부부가 내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게는 더 이상 이 논쟁으로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다.
“ 가르딘 백작님! 백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정중하게 귀족의 예법에 맞춰 가슴에는 뜨거운 감격을 안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인사를 올렸다.
“ 루이스가 공작 전하와 공작 부인께 다시 인사 올립니다. ”
“ 그래 그래 내 손자! 이제는 루이스 칼리어스다. 루이스 칼리어스! “
“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다 ”
공작전하 부부와 저녁을 같이 하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이 곧 멈춰버릴 것 같은 조급함속에서 내가 살았던 이야기,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 두 분의 이야기- 공작전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공작부인이 대신했지만-를 말이다.
“ 이제는 쉬세요. 시간은 많이 있습니다. ”
“ 그래 그래! 내 새끼도 피곤할턴데 쉬어야지 ”
...
낮선 방.
아버지가 어려서 사용하였었다는 공작가 내성에 위치한 별채가 거처로 정해졌다.
나그네의 쉼터 여관에 있던 짐은 어느 샌가 이미 다 옮겨져 있었다.
별채입구에는 낮에 본 한스라는 기사가 경비를 맡고 있었다.
아마 그래도 안면이 있는 기사라서 선택이 되었는지도..
실력은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던데...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가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더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 와 본 곳이고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낯섬과 외로움속에서도 안락함과 편안함은 또 무엇인가?
어머니는 아버지가 20살 때 처음 만나셨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왕실아카데미 기사학부 6학년으로 졸업반이셨고, 어머니는 이름 없는 용병단의 초급 정령사였다
두 분께서는 그만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셨고, 아버지는 왕실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어머 니와 함께 뜻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륙여행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해 내가 태어 났고, 어린 나를 데리고 몇 년을 더 여행하다 소피아 왕국의 어느 산골에 어머니와 나는 터를 잡았고, 아버지는 혼자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여행을 계속하셨다.
열 살까지는 그곳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어머니는 따뜻한 분이었다.
하급 바람의 정령사였기에 실프를 소환하는 것이 한계였지만, 당신의 무릎을 배고 누워있는 나의 얼굴을 간지르며 마냥 행복해 하셨다. 실프보다 더 자유롭게...
아버지를 처음본 것은 일곱살 때였다.
아니 내가 세 살까지도 같이 살았다고는 하지만 내 기억에는 분명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버지를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아버지는 어디서 큰 부상을 당했는지 몸도 성치 않아보였지만 말이다.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얼굴에 웃움꽃을 선물했지만, 딱히 아버지를 그리워 하지도 않고 어머니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내게는 악마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내 나이 열다섯까지 8년여간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한 존재였다.
검술과 기사도, 각종 학문, 귀족 예법을 가리칠 때는 악마였다. 인정사정 없었다.
그러다 기절하거나 지쳐 피곤해 잠들면 어느 샌가 아버지는 천사가 되어 있었다.
고통속에 눈을 뜨다 우연히 본 아버지는, 저 철혈의 피를 가진 악마의 화신이 나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울고 계셨다.
어느새 훈련과 공부시간에는 어머니도 악녀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더 한 존재였다. 악마와 악녀는 그래서 부부인지도...
열 다섯살 때 아버지는 내손과 어머니 손을 하나씩 잡고 주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웃으시면서...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나보다는 어머니와 함께한다는 것이 더 좋아함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화가 떠오른다.
“ 그래 어찌 살았누? ”
“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대륙을 여행했습니다. 주로 용병일을 했습니다”
“ 아이고 내 새끼 얼마나 고생이 많았누 ”
“ 다행히 어머니도 정령사이시고 아버지께 배운게 있어 고생은 없었습니다 ”
“ 왜 그때 바로 이리로 오지 않았누? ”
“ 이곳으로 가라는 소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 네 애미는? ”
“ 어머니는 3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 어쩌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삶의 의욕을 잃으셨습니다. 그러다 용병을 하면서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 잘 왔다. 이제는 이곳이 네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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