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게임

공모전참가작

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최근연재일 :
2024.06.28 22:00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106,462
추천수 :
4,250
글자수 :
315,495

작성
24.06.08 22:00
조회
1,559
추천
65
글자
12쪽

낙제생이 힘을 숨김 5

DUMMY

“무, 무서웠어어······.”


하루의 보충수업도 다 끝난 이른 오후.

짙은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학생 한 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교정을 걷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품에 소중히 안은 기다란 나무 지팡이였다. 고목을 잘 다듬어 만들었는지 나름의 역사가 느껴지는 훌륭한 물건이었지만, 썩 비싸 보이지는 않았다.


지팡이를 든 여학생 본인에게서도 기품이랄 게 느껴지는 편은 아니었다. 자세는 구부정하고 걸음걸이는 비틀거리는데 그중 화룡점정은 역시 끝없는 혼잣말이었다.

3학년 1학기의 낙제생 이리야 프롬. 그녀는 어디서나 혼잣말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등 뒤에 그 아즈일이 앉아있다구 생각하니까 수업에 집중도 안 되구······.”


분명히 혼잣말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점은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이리야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지만.

허나 그 직후,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던 장소에서.


“······이리야. 너 수업의 절반은 잠으로 보냈잖느냐.”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야말로 기품이라는 것을 한데 모은 듯 중후하고 깊이 있었다. 그런 멋진 목소리로 지금은 이리야를 한심해하고 있을 뿐.


“어어?! 아니 그, 그건 그게, 어젯밤에 긴장돼서 늦게 잤다 보니까······.”


화들짝 놀라며 변명하는 이리야 옆에서 곧 짤막한 한숨이 이어졌다. 그 한숨도 목소리도 전부 이리야를 제외한 존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내 목소리의 근원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공간의 흐트러짐은 곧 하나의 형태를 빚어내더니, 그곳에 빛을 일그러뜨린 듯 투명한 형체 하나가 둥실 떠오르게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은 평범한 이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목도하는 것을 허락받은 건 오직 이리야뿐이었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이리야. 너 어젯밤에는 상인에게서 구매했던 야시시한 소설을······.”

“이이익! 아냐!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라구!”


이리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선 들고 있던 지팡이를 허공에 휘둘렀다. 공중제비를 돌며 그런 지팡이를 이리저리 회피하는 존재가 그곳에 분명히 있었다.


“야시시한 게 아니라 기사와 공주님의 금지된 러, 러브스토리······!”

“알았다. 알았으니까 지팡이 좀 내려놔라.”

“······아우우.”


한마디 듣게 된 이리야가 곧 풀죽은 채 다시금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팡이를 휘두르던 그녀에게서 잠시 멀어졌다 돌아온 투명한 존재는 이리야의 어깨 위에서 머물며 잠시 그녀를 내려다봤다.


생각했다. 이리야에 대한 간섭의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자신이 선택한 이 가녀리고 위대한 존재를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 자문하고서.


자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 대해 그저 관측하기로 마음먹은 자.


칭송받기를, <진리>.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이리야.”

“응?”

“연구동에 가봐야 하지 않느냐.”

“······아앗!”


<계약자>의 일정을 챙겨주는 정도뿐.


“맞아! 힐트 교수님이 방학 중에도 오라구 하셨지!”


퍼뜩 깨달은 이리야는 기숙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급히 돌렸다. 진리의 말대로 이리야는 성 미카엘 연구동에 볼일이 있었다.

다다다 뛰어가서는 목적지인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그래도 바로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금 매만지거나 입고 있는 교복을 괜히 툭툭 털거나 했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번.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지은 채 문을 똑똑, 두들겼다.


“교수님. 저 이리야예요.”

“아, 어서 들어와.”


안쪽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이리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젊은 얼굴의 남교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리야를 반겨줬다.


“방학인데 쉬지도 못하고. 고생이 많지.”

“아, 아녜요! 저야말로 교수님께 늘 죄송한 마음뿐인걸요······.”


동그랗고 순해 보이는 안경을 낀 교수 앞에서 이리야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교수는 가볍게 웃고서 이리야를 자리로 안내했다.


“죄송하기는. 자, 이리 와.”

“네.”


교복 치마를 가지런히 모아 자리에 앉고서 이리야는 교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길게 자란 갈색 머리카락을 모아서 한쪽 어깨 앞으로 넘겼다.


“시작할게.”

“······잘 부탁드립니다.”


그 앞에 앉은 채, 교수는 이리야의 등에 한쪽 손을 살포시 얹었다.

잠시 후 손과 등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오묘한 보랏빛 마나가 맴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고, 커튼 사이로 비치는 것은 이른 오후의 한적한 햇빛뿐.


“······.”


그 모든 모습을 눈에 담는 이가, 진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 보랏빛 마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교수가 이리야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꿰뚫어 보았음에도.

그저 허공에 둥둥 떠서는 무료한 듯 이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그의 생각은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아까 전, 보충수업 시간. 그때 이리야 뒤에 앉아있던 금발의 한 남학생에 대해서.


이리야를 제외한다면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한다. 그래야만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젊은 교수도 진리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진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인지하기를 윤허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눈매가 사나운 남학생.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는 분명 진리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순전한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시피 했다.

그 이후 보충수업이 이루어지는 내내 그 이상의 이변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어째서일까.

어떤 우연은 끝내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그 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진리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보충수업이 끝나자마자 업적을 깨러 달려 나갔다.


2챕터 중간고사에서 밟을 수 있는 배드 엔딩. 이리야와 관련 있는 그 엔딩은 챕터 중간에 나와서 그런가 조건도 단순하고 해결도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이리야의 체내에는 지금 저주가 쌓이고 있다.

그 짓을 벌이고 있는 건 금지마법 학파 교수, 힐트 라 마이어. 순둥하고 친절한 얼굴로 사람을 속이지만 사실은 아주 천하의 개쌍놈이다. 얘가 바로 2챕터 중간보스기도 하고 말이지.


얘한테서 제때 이리야를 떼어놓지 않으면 끝내 쌓인 저주가 발동되어 이리야가 폭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금이야 낙제생이라지만 이리야의 재능은 수준이 다르다는 설정이니까. 폭주해버리는 순간 이 아카데미에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혼자 힘으로 학교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물론, 여기까지만 들으면 가장 빠른 해결책이 떠오를 수도 있었다.


‘그냥 교수를 찾아가서 줘패면 안 되나?’


쌍놈인 것도 알고 냅두면 배드 엔딩 터지는 것도 아는데 미리 움직이면 안 되나 싶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리야 본인이 이 교수를 좋아했다. 아주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거다. 이리야에게는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고민이 있고, 힐트 교수가 이 고민을 들어주는 척 이리야를 꼬드겼으니까.

내가 교수를 후려패버리면 그 순간 나는 이리야의 적이 될 거다. 그 뒷감당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뭐 다 떠나서, 주인공이라면 모를까 난 엑스트라잖아. 아무래도 메인 스토리에 간섭하는 건 좀 미루고 싶어지는 법.

역시 칼라일이 알아서 착착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만약 잘 안 됐을 때. 이번에도 스토리가 꼬여서 이리야가 폭주해버린다면.


그래도 해결 방법은 있었다.

바로 그걸 위해 내가 찾아온 곳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 중앙 홀이었다.


앞으로는 아카데미 건물 정문이, 뒤로는 대계단이 위치하는 곳. 말하자면 이 아카데미의 중심부.

그곳에 커다란 조각상 하나가 서 있었다.

청동으로 주조되어 아름답게 서서는 철퇴를 들고 있는 여자의 석상이었다. 등에 날개가 없더라도 그게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4대 천사 중의 한 명. 성 가브리엘.

최초의 성인이자 위대한 능력 덕분에 천사로 추대되었던 이.


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는지. 지켜보는 눈은 없는지 슬쩍 돌아보고서 그 석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받침대 뒤쪽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는 그곳을 더듬거렸다.


“쓰읍······, 분명 이쯤에 있어야······.”


혹여라도 누가 이런 모습을 볼까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른 찾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석상 뒤편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작은 공간. 그 어두운 보관 장소에서 먼지 쌓인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입으로 후, 불어보자 겨우 물건의 형태가 드러났다. 그건 조각난 십자가의 일부분이었다.


[도감에 새로운 개체가 등록됩니다.]

[업적 <천사가 남긴 것>이 진행됩니다.]


아카데미 여기저기에서 이런 조각난 십자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천사가 남긴 것>은 이걸 모아 이어붙여야 하는 업적이었다.

시간도 품도 많이 드는데 그 보상이 엄청 좋은 건 아니었다. 보상으로 주는 칭호도 스텟 좀 오르고 끝인 황동 트로피인 데다가 그렇게 만들어진 십자가도 고생한 것치곤 좀 미묘했다.


하지만 지금 내겐 이게 꼭 필요하단 말이지.

간만에 도감을 열어서 확인해봤다.


───


[업적]


<천사가 남긴 것>

- 성 가브리엘,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미리 알았던 것일까요?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전부터 그녀는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씩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 대부분의 것들이 유실되었으나, 어떤 것들은 세월을 넘어서도 여전히 비밀리에 보관되어 왔습니다. 운이 좋다면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 성 가브리엘이 남긴 물건들을 모아 조립하기.

- 보상 : 칭호 <기도하는 사람> (황동).


───


칭호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조립’을 통해 얻는 아이템이 필요했다.

<가브리엘의 십자가>. 이 물건은 평범한 물을 성수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단한 거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뭐 대단하긴 한데. 근데 성수가 엄청 좋은 건 또 아니라서. 그냥 있으면 좋은 소모품 수준이다. 마수가 거는 귀찮은 저주 같은 거 쉽게 지울 수 있는 정도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사람한테서 걸린 저주도 쉽게 지울 수 있다는 것.


이리야가 폭주하는 원인은 힐트 교수가 몸에 축적시켜 놓은 저주다.

그렇다는 건, 이 성수만 있으면 저주도 한 방에 쓱싹 해결이란 소리니까.


주머니에 조각난 십자가를 집어넣으며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게 또 아카데미 부지를 한 바퀴 뺑 돌아야 해서 사람 피곤하게 하는 업적이었다.

모아야 하는 조각이 총 10개나 되긴 하지만 뭐, 나야 어딨는지는 다 알긴 하니까. 산책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하나씩 줍고 다니면 될 거고.


일단은 그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곳. 대계단을 올라 성 가브리엘 아카데미의 학장실 앞에 섰다.


“······.”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선 대답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와선 소파 뒤에서 물건을 주워가는 건 좀 이상해 보일까? 뭐라도 대화를 해야 할까? 게임에선 방 안에서 칼을 휘두르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 안 썼는데.

학장이랑은 무슨 얘기를 꺼내면 좋을라나······. 오늘 날씨가 참 덥지요, 그럴 수도 없고. 아닌가? 오히려 좋아하려나.


“······?”


다만 스몰 토크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는데도 안쪽에서 반응이 없었다. 혹시 몰라 노크를 한 번 더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싶어서 뒷머리를 긁다가 떠올랐다.


“아.”


맞다. 지금 방학이었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독자 분께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24.06.07 256 0 -
공지 추천글에 대한 감사 인사 (실무액세스 님, 말많은악당 님) 24.05.22 80 0 -
공지 비켜라 제목은 그럿개짓는것이 아니다 +1 24.05.17 221 0 -
공지 연재 주기 공지 (월화수목금 오후 10시) 24.05.13 114 0 -
공지 감사한 후원자 여러분 (24.6.2) 24.05.10 1,681 0 -
53 누구도 다치지 않는 3 +5 24.06.28 568 44 13쪽
52 누구도 다치지 않는 2 +7 24.06.27 752 61 13쪽
51 누구도 다치지 않는 1 +3 24.06.26 852 50 13쪽
50 닫힌 문 3 +5 24.06.25 941 49 13쪽
49 닫힌 문 2 +3 24.06.24 1,018 60 15쪽
48 닫힌 문 1 +5 24.06.23 1,077 62 14쪽
47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6 +3 24.06.21 1,109 62 14쪽
46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5 +4 24.06.20 1,115 55 12쪽
45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4 +3 24.06.19 1,153 54 14쪽
44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3 +3 24.06.18 1,187 54 12쪽
43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2 +4 24.06.17 1,216 62 12쪽
42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1 +7 24.06.16 1,254 66 15쪽
41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3 +2 24.06.15 1,273 65 14쪽
40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2 +4 24.06.14 1,292 65 15쪽
39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1 +6 24.06.13 1,354 65 13쪽
38 놀아나 주도록 하지 4 +3 24.06.12 1,359 64 12쪽
37 놀아나 주도록 하지 3 +2 24.06.11 1,375 61 13쪽
36 놀아나 주도록 하지 2 +5 24.06.10 1,413 52 12쪽
35 놀아나 주도록 하지 1 +4 24.06.09 1,490 64 12쪽
» 낙제생이 힘을 숨김 5 +1 24.06.08 1,560 65 12쪽
33 낙제생이 힘을 숨김 4 +7 24.06.07 1,627 57 13쪽
32 낙제생이 힘을 숨김 3 +4 24.06.06 1,601 66 12쪽
31 낙제생이 힘을 숨김 2 +3 24.06.05 1,675 70 13쪽
30 낙제생이 힘을 숨김 1 +5 24.06.04 1,795 65 12쪽
29 엑스트라 스토리 4 +7 24.06.03 1,815 8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