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게임

공모전참가작 새글

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최근연재일 :
2024.06.27 22:00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99,263
추천수 :
3,984
글자수 :
309,626

작성
24.06.17 22:00
조회
1,102
추천
58
글자
12쪽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2

DUMMY

“오오······.”


내 팔에 가죽 보호대가 한 땀 한 땀 착용되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보다보니 신기해서 감탄사를 조금 흘리고 있으려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보호대를 착용해주던 가느다란 손가락의 주인. 레일리아가 곧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착용법도 모르는 보호구는 어쩌다 구해오게 되신 겁니까?”

“아하하······.”


대답할 말이 마땅찮아서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아니 나도 이럴 줄 알았나 뭐.

게임에서 방어구 어떻게 착용했겠어. 인벤토리 열고 방어구에 우클릭해서 ‘장비하기’ 눌렀지. 설마 여기선 신발끈이라도 묶듯이 끈으로 하나하나 매야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니까.


그래서 줄리아한테 사 온 갑옷들을 들고 혼자 낑낑대고 있으려니, 보다 못한 레일리아가 나서서 도와주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시종이라 이런 일이 익숙한 건지 그녀는 어려움 없이 내 양쪽 팔에 보호대를 단단히 고정해줬다. 솜씨 좋게 끈을 구멍에 통과시키고 묶어나가는 그 길고 하얀 손가락에 절로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새삼스럽지만 이러고 있으니 진짜 귀족이 된 것 같네······. 침대에 가만 앉아서 팔을 내밀고 있었는데, 레일리아는 높이 때문에라도 그런 내 앞에 무릎 꿇은 상태였다.

침묵까지 겹쳐져서 이 상황 전체가 어딘가 좀 간질간질했다. 다른 귀족들은 다 이러고 사는 건가? 그야 그렇겠지, 귀족이니까?

교복이야 그냥 내가 입고 벗고 한다지만 방어구는 앞으로 좀 생각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착용이 끝났는지 레일리아의 손길이 멀어졌다. 두어 번 주먹을 쥐어보고 움직여보고 했는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음, 좋네요. 고마워요 레일리아.”

“당연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도련님.”


불러서 바라보자 레일리아는 걱정이 든다는 듯, 눈썹을 곱게 모으고선 말을 이었다.


“또 무슨 일을 꾸미시기에 보호구까지 마련해오신 건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또라뇨, 에이. 누가 들으면 제가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겠어요.”

“······.”


레일리아는 실제로 그러지 않냐는 눈빛을 여지없이 쏘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뭐 지난 몇 달간 사고를 치면 얼마나 쳤다고, 응? <라우레아의 밤>에 좀 나돌아다니고, 기말고사 때 악마 잡겠다고 목숨 좀 걸고. 그 정도지.

아니다 최근엔 제2황녀한테도 좀 대들었지. 그 정도면······, 좀 치긴 했네.


그래도! 이번엔 진짜 괜찮았다. 뭐 대단한 걸 하려는 게 아니었다.

마침 얼마 전에 이 업적도 깨놨으니까.


[도감을 펼쳐봅니다.]

[ >>> ]


───


[업적]


<선생님, 저요!>

- 학생의 근본은 뭐니 뭐니 해도 학업. 수업에 열중합시다.

- 총 100점의 추가 점수 획득.

- 보상 : 칭호 <모범생> (은).


───


무단으로 수업을 빠져도 페널티가 생기지 않는 은 트로피 칭호, <모범생>.

공부해서 필기시험은 치러야 했으니 아예 안 나갈 수는 없겠지만, 며칠 정도 자체 휴강하는 건 괜찮았다.


“훈련관에 갈 거예요.”

“훈련관······, 말씀이십니까?”


레일리아가 친히 입혀준 가죽 갑옷 상의 위에 체육복을 덧입었다. 목검 말고 진검을 허리에 차며 거울을 봤다.

몇 푼 하지도 않는 가죽 갑옷은 그냥 거쳐 가는 아이템에 불과했다. 고작 이런 걸로 빅터 교수를 이겨보겠다는 건 과한 욕심이지.


진짜 스펙업은 역시 금 트로피 한두 개 정돈 따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서려던 때였다.


“브리오트 도련님.”


이름이 불려 돌아보니 레일리아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옛날 같았으면 못 알아봤겠는데, 이제는 나도 레일리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또 뭔 사고라도 칠까 걱정은 되고. 그렇다고 말리자니 자기는 시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거고.

손해 보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또 그게 레일리아니까. 여기서는 그래도 주인답게 먼저 던져봤다.


“따라올래요?”

“······.”


침묵한 채 고민하던 레일리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거 참, 예정에는 없던 일인데. 졸지에 검술 사부님께 지금껏 이룬 성취를 보이게 생겼네.


* * *


‘훈련관’이란 이름 그대로 아카데미 내부에 위치한 훈련 장소의 하나였다. 적어도 레일리아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학생이 아닌 시종이었으니까. 이 훈련관에 직접 와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그녀가 밟아볼 일 없는 장소였다.


훈련관 안쪽은 휑했다. 가운데에 허리 높이 정도로 솟아 있는 작은 기둥을 제외한다면 그냥 텅 빈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들어와서 아즈일은 레일리아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저어기 멀찍이 서 있으면 돼요.”

“도련님, 하오나······.”

“별일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서 아즈일은 짓궂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마 보다 보면 지루해질걸요? 왜 따라왔을까 후회하게 될 거예요 분명.”

“······.”


주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레일리아라고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 훈련관의 벽 가까이 서자 아즈일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흔드는 손 아래로 언뜻 비치는 가죽 팔보호대를, 레일리아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즈일에겐 아무런 기본기가 없었다. 적어도 레일리아가 바라본 바로는 그랬다.

좋게 말하자면 아무런 버릇도 없는 깨끗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게으른 거였다. 열일곱이 될 때까지 손에 굳은살 하나 없는 검사 같은 건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랬던 아즈일이었는데 반년 전부터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 굴었다.

그 바뀐 행태마저도 기이했다. 지금껏 검술 수련을 안 했던 만큼 갑자기 급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포자기하듯이 마구잡이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의 기초.

아즈일은 체력 단련부터 시작했다.


욕심이 없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즈일은 강해지는 것에 대한 뚜렷한 목적 의식을 내비쳤다.

허나 그런 것치고는 사람이 너무나도 올곧고 투명했다. 강함 그 자체가 그에겐 일종의 수단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강해져서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성실한 아즈일이 일과마저도 빼먹고 훈련관에 와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를 가벼운 가죽 갑옷을 차려입고는 훈련관 가운데에서 몸을 푸는 중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즈일은 훈련관 중앙에 있는 기둥 위에 손을 올렸다. 잠시 조작하자 그 다음엔 기둥이 바닥 밑으로 쑥 꺼지고, 대신 아즈일의 저 앞에서 마법으로 된 <문>이 만들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부터 훈련용 마수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들을 레일리아는 멀찍이서 지켜봤다.

아즈일이 정확히 무엇을 바라며 이곳까지 왔는지는 레일리아도 모른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몸에 밴 버릇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즈일은 지난 반년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것.


“······!”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즈일은 눈앞에 선 마수를 단칼에 두 동강 내버렸다.


그 일에 있어 대단한 힘이나 능력은 필요 없었다. 검에 담을 휘황찬란한 마나, 그런 건 아즈일에게 있지도 않았다.

레일리아가 아즈일에게 가르친 건 오직 검술의 기본기뿐이었다. 그러니 아즈일 또한 알고 있는 바대로 기본기로만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허나 이거고 저거고 말이야 쉬운 일이었다. 어느 누가 3개월 내내 기초 체력과 근력 단련만 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어진 3개월 동안에는 밑도 끝도 없이 기본기만 쌓을 수 있을까. 검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 걸까.

그렇게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게 좋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그대로 행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검술의 천재라고 통하는 자들도 지루함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는 쉽게 무너졌다.


바로 그 점에서. 아즈일은 진정으로 두려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본 검술을 베낀다느니, 반사 신경이 좋아 공격을 쉽게 막는다느니. 그런 건 새 발의 피와도 같은 능력이었다.


그는 반복을 꺼리지 않았다.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즈일은 정도正道를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지금도 그랬다. 분명 단칼에 베었음에도 아즈일은 똑같은 마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것을 베고, 불러내고, 또 베고.

정확히 백 마리를 그렇게 잡았을 때 비로소 불러내는 대상이 바뀌었다.

방금의 마수보다 조금 더 흉포한 것을 상대로 아즈일은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단칼에 베지는 못하고 몇 번의 공방이 오갔으나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즈일의 쉬운 승리였다.


그것을, 아즈일은 또다시 백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집중을 놓지 않았다. 백 번 반복하는 동안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베어낼 수 있을지, 어떻게 움직여야 더 효율적일지 끝없이 수정해 나갔다.


그렇게 마지막 백 번째.

아즈일이 마수를 단칼에 베어내는 데 성공했을 땐, 레일리아의 마음속에도 알 수 없는 어떤 쾌감이 피어올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즈일은 또 다음 마수를 불러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백 번을 반복하려는 듯 쉼 없이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제 레일리아의 머릿속에 남은 건 그런 의문뿐이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간절하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과거는 어땠던가?

레일리아는 버릇처럼 자신의 손바닥을 손끝으로 훑었다. 여전히 굳은살이 남아있지만 그러나 검을 쥐는 자리는 아니었다.

지금은 청소를 위해 대걸레를 쥐고 때로 간단한 요리를 위해 식칼을 잡지만, 어렸을 적 레일리아의 손엔 언제나 검이 들려 있었다.

조그마한 자신의 키에도 맞지 않는 길고 묵직한 검. 그것을 들고 휘두르고 있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려서부터 재능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기분 좋았으니까 더욱 열심히 갈고닦았다.

아마도, 그러지 않는 게 좋았으리라.

자신은 실력 없고 명망 없는 기사 집안의 여식이었으니까. 아카데미 같은 것을 고려하기 이전에 먼저 집안에 돈을 벌어와야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역시 자제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두려운 것을 보듯 하던 아버지의 그 눈빛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리아, 저기요? 레일리아?”

“······!”


그 순간, 레일리아의 눈앞에 나타난 금발의 인물이 있었다. 어느새 훈련을 일단락하고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주인, 아즈일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일리아를 보며 아즈일은 양미간을 좁혔다.


“괜찮아요? 안색이 영 안 좋던데.”

“······죄송합니다 도련님.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했으나 아즈일의 표정이 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레일리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무언가 지탱할 것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레일리아의 오른손은 그녀의 반대편 팔을 꽉 쥐고 있었다.


천천히 힘을 빼고 펴보니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바로 앞에 서 있었으니 아즈일이라고 그 모습을 못 봤을 리는 없었다.


“그······,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흠.”


레일리아의 궁색한 변명을 듣고서 아즈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가려진 그의 손 안에는 금 트로피 배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말하자면 이 훈련관에서 당장 얻을 건 다 얻은 셈이었으니.


“검. 한 번 휘둘러 볼래요?”

“······도련님?”


아즈일은 허리에서 검을 풀러 레일리아에게 무심하게 내밀었다.


“기분 전환도 가끔은 필요한 거니까.”


주인된 도리로서 시종을 조금 보살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독자 분께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24.06.07 238 0 -
공지 추천글에 대한 감사 인사 (실무액세스 님, 말많은악당 님) 24.05.22 79 0 -
공지 비켜라 제목은 그럿개짓는것이 아니다 +1 24.05.17 212 0 -
공지 연재 주기 공지 (월화수목금 오후 10시) 24.05.13 110 0 -
공지 감사한 후원자 여러분 (24.6.2) 24.05.10 1,565 0 -
52 누구도 다치지 않는 2 NEW +6 16시간 전 410 44 13쪽
51 누구도 다치지 않는 1 +3 24.06.26 666 38 13쪽
50 닫힌 문 3 +4 24.06.25 785 39 13쪽
49 닫힌 문 2 +3 24.06.24 876 52 15쪽
48 닫힌 문 1 +5 24.06.23 942 53 14쪽
47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6 +3 24.06.21 993 57 14쪽
46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5 +5 24.06.20 1,001 50 12쪽
45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4 +3 24.06.19 1,038 50 14쪽
44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3 +3 24.06.18 1,067 50 12쪽
»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2 +4 24.06.17 1,103 58 12쪽
42 한 명은 모범생, 한 명은 1 +7 24.06.16 1,141 62 15쪽
41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3 +2 24.06.15 1,163 62 14쪽
40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2 +4 24.06.14 1,186 62 15쪽
39 부르신 건 황녀 저하십니다 1 +6 24.06.13 1,244 62 13쪽
38 놀아나 주도록 하지 4 +3 24.06.12 1,254 61 12쪽
37 놀아나 주도록 하지 3 +2 24.06.11 1,259 59 13쪽
36 놀아나 주도록 하지 2 +5 24.06.10 1,299 50 12쪽
35 놀아나 주도록 하지 1 +3 24.06.09 1,371 62 12쪽
34 낙제생이 힘을 숨김 5 +1 24.06.08 1,446 63 12쪽
33 낙제생이 힘을 숨김 4 +7 24.06.07 1,514 55 13쪽
32 낙제생이 힘을 숨김 3 +4 24.06.06 1,489 64 12쪽
31 낙제생이 힘을 숨김 2 +3 24.06.05 1,555 65 13쪽
30 낙제생이 힘을 숨김 1 +5 24.06.04 1,669 61 12쪽
29 엑스트라 스토리 4 +7 24.06.03 1,691 79 12쪽
28 엑스트라 스토리 3 +8 24.06.02 1,714 75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