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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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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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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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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1. 새해 첫날 (1)

DUMMY


황궁. 사실상의 지구 전체를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의 관저.

백 년 전에 세워진 이후로 여러 차례 개량을 거쳐온 이 건물은 국가적 정통성의 상징인 동시에 한 체제의 중심점이었다.


물론 정말로 세계의 ‘실질적’ 정치 중심인냐 하고 묻는다면, 애매하긴 하다.

현 황제 즉위 당시에 전쟁 시대가 종결되고 세계 통일이 이뤄지긴 했다.

하지만 통일 직후의 세상은 혼란스러웠기에 중앙의 통제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즉 황실이 모종의 제왕적 권력으로 확실하게 지구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지금이야 확실하게 황가의 권력이 세계 통제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알렉시스 황태자의 충분한 경험 축적과 성장으로 인함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황제 본인도 실상 본인은 북부 신대륙만 관리하고 나머지는 아들에게 양도하려는 판이었다.

그러므로 진짜 세계 통제의 관저는 황궁이라기보다는 아이언로드 알파였다.

그 이동식 요새는 황태자의 막강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스템 중심체였다.

황궁은 그에 밀려 ‘상징적 의미’로서의 가치 정도로 축소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근무 관저였고 또한 그의 가족이 모이는 본가 건물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리고 황제와 그의 자녀들, 그리고 황후에게는 본향(本鄕)이었다.


아울러 황궁 부근에 딸린 별장에는 황가의 높은 어르신들도 몇 거하고 있었다.

모두 브라이틀란트의 성을 지닌 크리스토프의 직계 후손이었다.

보통 각 세대의 황족은 당대의 황태자가 즉위하면 브리튼 황실을 떠나 독립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가에 큰 위업을 남긴 이는 은퇴 후 황가 측에서 따로 모셔두곤 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인 ‘은퇴한 뒤의 황제들’ 역시 황궁 부근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일반이었다.

알폰스의 아버지인 전대 황제도 그러하였다.


“할아버지.”


“오냐, 막둥아.”


온천에 앉은 채 마주 앉은 두 사람, 젊은 청년과 지긋한 나이의 노인.

70대에서 80대 사이 정도로 보이는 외모의 그 노인은 주름에 비해 몸이 꼿꼿하고 올곧았다.

흔히 나이들면 쳐지기 쉬운 살도 어느 정도의 탄력을 유지했고 군살도 거의 없었으며 근육량도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노인의 연세는 올해로 110세를 넘긴 상태.

믿기 힘든 수준의 정정함이었다.


그리고 노인 곁에서 말동무 노릇을 해주는 젊은이는 그의 친손주였다.

두 사람의 외모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닮은 편이었다.

아울러 청년은 젊을 적의 노인의 모습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대단한 무골의 육신을 소유하였다.

훤히 드러난 그의 떡 벌어진 가슴과 어깨는 사자왕의 패기를 연상케하였다.


“저희 슬슬 나가보는 게 어떨까요? 이미 두 시간도 넘게 있었는데.”


“우리 손주는 더운 걸 잘 못 참는 모양이구나.”


“설마요. 극기 훈련도 거뜬히 견딘 몸인걸요.”


“흐음, 그럼 할애비랑 단 둘이 있는 게 불편한 게로구나.”


“그건 아니지만······.”


확실히 오랜 시간 단 둘이 대면하기에는 어색하긴 했다.

청년이 마주하는 저 상대는 비록 목욕탕에서 한가히 몸을 녹이는 한 명의 노인으로 보이지만, 한때는 브리튼 제국의 황제였던 자였다.

다시 말해서 브리튼과 커뮤니스트 연방의 전면 대결 당시 나라를 이끌었던 지도자요, 전란 시대의 성군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그분의 친손주라 해도 허울없이 있기는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곁에 같이 안 있어 드리면 서운해하시겠지.’


황제와 그의 형제, 그리고 황태자와 그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황족들이 하나같이 바쁜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은퇴한 이 노인은 적적한 인생을 무료히 보내곤 했다.

물질적 염려야 당연히 없고 대대손손 유전자 단위로 축복 받은 몸 덕에 건강 문제도 크지는 않다만, 어디 높으신 전설의 친구가 되어 줄 이가 많겠는가.

가족이란 것들은 다들 일에 치여 살고.


‘유독 나를 자주 찾으신다니까.’


예전부터 할아버지는 다른 손주들보다 그를 더 귀여워했다.

군인이 된다고 했을 때 극구 반대하던 첫 번째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아무래도 청년이 막내 손자라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진짜 막내는 아니었다.

일단 쌍둥이 황녀도 하나 있고, 더욱이 입양아 출신 형제 중에는 그보다 더 어린 사람도 하나 있었다.

하지만 다소 예전 사고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으신 할아버지였다.

그러다보니 비록 차별적이지는 않더라도, 은연 중 딸보다는 아들을, 입양아보다는 피가 섞인 이에게 더 호감을 드러내곤 하셨다.

이해는 충분히 되었다.


“군 생활도 이제 7년차지?”


“네, 할아버지.”


“어린 것이 고생이 많으니 마음이 아프구나.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쯧”


본인이 전란이라는 재난의 무게를 몸소 국가 단위로 체험하며 짊어졌던 장본인이라 그런 것일까?

전대 황제는 손자들 세대가 그 지독함의 편린 속에 발가락 하나 담그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여겼다.


“큰형이 고생했다고 너까지 그걸 따라할 필요는 없단다.”


“제 적성에 잘 맞아서 그럴 뿐이에요.”


“하지만 세월이 바뀌며 더는 필요가 없는 재능도 존재하지. 취미로 스포츠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굳이 피를 흘리는 일을 연습할 필요는······.”


전대 황제는 손자 랜슨의 건장한 근육질 기골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전술 병기로서 타고난 육체인 것은 인정한다.

재능 또한 그러하고, 전략적 두뇌도 뛰어나다.

육체와 전투력 한정으로는 그 대단한 장손(長孫)의 하위호환을 보는 듯했다.

만일 저 아이가 한 세대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최전선에서 싸웠겠지.


그렇다고 전혀 아쉽거나 하지는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 혈육이라 그런지 도리어 다행이라 여겨졌다.

지금 세상이 랜슨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어서.


“네가 빨리 은퇴했으면 좋겠구나. 그저 명목상으로 장성급 직위만 달고 더는 전선이고 전략이고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이야 누구나 소원하는 바죠. 그게 인간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문제일뿐이죠.”


“허어, 또 네 형처럼 말하는구나.”


노인은 자신과 꼭 닮은 또 다른 청년 하나를 떠올렸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막내가 귀여움의 대상이라면, 장손은 모든 기대를 쏟아붓기에 합당한, 국가 중심 가치의 후계자요 가문의 명예였다.

그렇기에 그는 장손이 어렸을 적부터 매우 엄중하게 훈련시켜 왔다.

인격적으로 존중하기는 했으나 대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능력적으로 매우 높은 기준을 설정하여 아이를 이끌어왔다.

그렇게 하다가 지치는 기색을 보였더라면 마음이 찔렸겠지만, 손주는 전혀 기진하지 않고 도리어 할아버지의 기대 한참 이상을 해내었다.

이제는 어느덧 자신의 시대는 지나가고 손주에게로 모든 짐이 옮겨졌다.


“할아버지,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회색 머리의 청년이 할아버지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예쁨을 듬뿍 받는 손주인지라 다른 형제들보다 할아버지를 대하는 부담감이나 거리감이 적었고 그 덕에 얼마든지 이렇게 친밀히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 말해보거라, 얘야.”


“별 건 아니고요, 왜 저희 가문의 장자들은, 그러니까 언약의 계승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오늘 태어나는 건가요?”


오늘이라 함은 바로 신년의 첫 날, 1월 1일이었다.

이날은 국가적 축제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황가에 있어서 사적으로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차기 황제들은 항상 이 날이 생일이었다.

즉, 알폰스 1세도, 그의 아들 알렉시스도, 그리고 랜슨과 함께 목욕 중인 이 노인도, 생일이 1월 1일이었다.

참고로 크리스토프 대제 이후 나타난 모든 후계자들이 그러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황제가 이 날 신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크리스토프 본인과 신 사이의 일이니 진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매년 국민들이 새해를 축하하며 기대하는 이 날, 브리튼 황가에서는 가족 행사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 황태자, 전대 황제, 셋 모두의 탄신일.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은 것이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마도 가문 특유의 검소한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족들끼리만 조용히 생일 잔치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게 바로 언약 현상이 실존한다는 여러 방증 중 하나이지.”


“확률 법칙을 무시한다, 뭐 그런 건가요?”


“매 세대에 반드시 장자가 가장 뛰어나게 만들어지는 것도 통상의 확률로는 말이 안 되는 일 아니더냐. 종합적인 재능에서만 가장 뛰어난 것이라면 모를까, 아예 모든 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나다면 이미 통계학의 궤를 벗어난 현상이지.”


“하긴 저희 형만 봐도 이해가 되네요. 하지만 출산이란 건 여러 변수를 갖고 있는 현상인데, 일부러 제왕절개를 한 것도 아니고, 모든 후계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날 출산을 한다는 건 좀 신기해서요.”


랜슨은 잠시 물 속에 몸을 가라앉힌 후 여러가지 사색의 나래를 펼쳤다.

어차피 할아버지와 오붓하게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이 시간을 슬기롭게 잘 활용할 수 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전 황태자비, 그러니까 알렉 형의 돌아가신 어머님 말이에요.”


곧바로 느긋한 자태로 있던 할아버지의 자애로운 화색이 긴장으로 흐트러졌다.

눈치 빠른 랜슨은 자신이 뭔가 역린과 닿은 단서를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기회를 낭비하긴 아까웠다.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본 브라이틀란트 황태자비.

랜슨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분이라 아는 바가 없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녀에 대해서만은 일부러 언급을 피하려 작정한 것인지 늘 침묵해왔다.

오로지 그녀의 유일한 친아들인 큰형 알렉시스만이 종종 그녀를 언급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깊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얼굴 위로 비추곤 했었다.


“흐음, 그래, 그 아이 말이구나.”


할아버지는 난처함과 깊은 회한이 섞인 표정을 애써 숨기려는 기색이었다.


“정직한 아이였지.”


정직?


“그래, 내 백십삼년 인생 전체를 통틀어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아이였어. 한 마디로 딱 잘라 평가하기가 어려운 친구였지.”


전대 황제는 끝내 랜슨에게 이본이라는 여인에 대해 다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요, 황가의 역사책 속에 감추인 이야기였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랜슨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주제였다.

심지어 알렉시스 본인마저도 다 알지 못하는, 어른들만의 이야기.

할아버지로서 그 이야기는 모든 해묵은 감정과 매듭이 깔끔히 다 정리된 뒤에야 천천히 꺼내고픈 주제였다.


“자, 이제 일어나서 준비하자꾸나. 오늘은 점심부터 저녁까지 내내, 식구들과 다 함께 하는 잔치이니 너도 참여해야지.”


“네, 할아버지.”


고결한 노인과 건장한 청년은 그제서야 따뜻한 물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


차에서 내린 두 형제는 고고하게 펼쳐진 여러 채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기술력의 최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앤티크 디자인의 성.

그러나 그 기품과 위엄만은 소나무처럼 시간의 풍파를 거뜬히 견디며 굳게 스스로를 보존하는 중이었다.


나름 황제의 거처인데 황궁치고 너무 검소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가운데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게다가 아날로그식 향수가 느껴지는 겉모습과 달리 그 내용물은 산업혁명의 정수들로 채워진, 최첨단의 시설들이었다.

물리적인 힘이건, 첩보력이건, 혹은 외력의 감시이건 간에, 그 어떠한 지상의 적대 세력도 감히 이곳의 강력한 보안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선황 폐하를 뵙는 건 꽤 오랜만이네.”


흰 피부의 잘생긴 흑발 청년이 독백하였다.


“하긴, 할아버지는 널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지.”


곁에 있던 또 한 명의 금발 청년이 무심하게 툭 중얼거렸다.

첫 인상만 봐도 배려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악동 이미지였다.

하지만 귀공자 같은 아우라와 잘난 이목구비는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몸짓에 새겨진 특유의 거만함도 그럴 듯하게 돋보이게끔 해주었다.

금발 청년의 자색 눈동자가 흑발 청년의 찌푸려진 눈이 잠시 마주쳤다.


“난 선황 폐하께서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분이라고 생각해, 엘리어트.”


흑발 청년이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큰아버지 아니 아버지께서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인류애를 한껏 베푸시는 일을 허락해주셨으니 말야.”


금발 청년이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


“엘리어트 너야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겠지만 나는 다르지.”


흑발 청년, 유타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스쳐가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설령 내쳐졌더라도 아무말 하지 못했을텐데.”


유타의 말대로 지금 곁에 있는 그의 의붓형제 엘리어트와 그는 달랐다.

엘리어트는 엄연히 전대 황제의 친손자, 그러나 유타 자신은 브라이틀란트 황가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애로우신 할아버지라 해도 엘리어트나 황후의 자녀들이나 황태자를 대할 때에 비해 자신을 대할 때 온도 차이가 생기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애초에 입양이 아버지 결정이었지 할아버지의 결정은 아니지 않았던가.


그래도 다른 형제들이 그분의 포근한 품에 받아들여지는 광경을 보며 자신은 쓸쓸히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있는 체험이란 썩 유쾌한 것은 못 되었다.

집안 행사가 늘 불편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에드윈이나 리키도 비슷한 기분이겠지.


“어이, 고개 들고 어깨 꼿꼿이 펴 인마.”


공감 능력 부족한 엘리어트는 밉살맞게 유타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너를 택한 건 아버지가 아니야. 네 능력과 자격이지.”


따뜻함이라고는 찾기 힘든 엘리어트의 무심한 말에 빈정 상한 유타는 상대를 흘겨보았다.

하여간 그래도 큰형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형제라는 녀석이 원.

유타 자신이 처한 집안 내에서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실감이 났다.


“브라이틀란트 황가는 격이 맞지 않는 존재는 자녀로 입양하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조차도 부적격자에게 브라이틀란트의 성을 주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뭐, 그렇군. 쓸모 좋은 도구라. 확실히 그게 지금의 내 위치겠네.”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유타.


“감상에 젖을 여유도 있고 느긋하구먼.”


“네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난 안 그래도 더 치열하게 살 생각이라서.”


유타의 회갈색 눈동자 위로 매서운 독기가 얼핏 스쳐갔다.

그것을 감지해낸 엘리어트는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형제이긴 해도 이런 면은 은근 적응되지 않았다.


‘뭔 생각인지 가늠이 잘 안 된다니까 저 녀석.’


악동이라고 불리는 자신조차도 쉬이 얕잡아보기 힘든 무서움.

유타 나탈리프 브라이틀란트라는 인간은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예의바르고 희생적이고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일꾼이다.

그러나 동시에 엘리어트 자신에 못지 않은 투사(鬪士)요 반영웅(反英雄)이었다.


‘아버지와 렉시드 형에게 확고하게 인정받는다. 나 자신을 분골쇄신하여 두 분의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되어서라도 이 가문에서 자리매김한다.’


이것이 유타를 지금의 무시무시한 거물로 끌어올려 고정시킨 집념이었다.

그것은 분명 매우 강력하고 효과 좋은 원동력이었다.



“그나저나 그쪽 숙제는 어떻게 되어가는 중이냐.”


엘리어트가 화제를 바꿔 유타에게 질문했다.


“숙제?”


“모르는 척하지 말고. 큰형이 너한테도 숙제 내준 거 아니었냐?”


“아아, 그거.”


유타는 대수롭지 않아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네 의회 쪽에도 첩자들이 꽤 득실거리는 모양이지, 엘리어트?”


“아무래도 원래 그놈들의 놀이터였으니까. 2차 대전 당시 우리가 유럽을 접수한 뒤로는 필연적으로 오염당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설마 그 간 부은 녀석들이 너네 회사에까지 침투할 줄은 몰랐지.”


“살아남으려면 커버넌트 그룹 내부로 침투하는 방법 밖에 없었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렉시드 형이 경제력으로 놈들의 권력을 메마른 풀처럼 고사시켰을 테니까.”


“하긴. 그놈들은 기생충들이니까.”


“놈들은 인수합병을 빌미로 스멀스멀 우리 기업 내부로 들어왔어. 덕분에 기업 내부의 음지에서는 영 심상치 않은 일들이 한창이야.”


엘리어트가 몸을 담은 정계 쪽에도, 유타가 몸 담은 재계 쪽에도, 아직 위험한 첩자들은 완전히 뿌리뽑히지 않았다.

작년에 벌어진 그 엄청난 ‘타르타로스 사건’ 이후로 대부분의 삼류들은 제 발 저리며 알아서 굴복하긴 했지만, 그런 공포를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어리석은 작자들도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알렉시스는 당장에 그들 모두를 색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일단은 과격한 공략법을 내려놓고 온유한 태도로 회귀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터널클렌징 프로젝트 종료 후 어떤 대언자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것이다.

황가의 지도자가 얌전히 꼬리를 내린다면 그런 이유 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큰형이 몸을 사린다고 해서 동생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계속해서 그쪽이나 잘 감시해. 기회는 도둑처럼 오는 법이니까.”


엘리어트는 훈수 두듯 오만한 어투로 상대를 독려했다.


“혹은 우리 측에서 기회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


유타는 엘리어트의 당부를 툭 받아치며 대꾸했다.


“어쭈,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잘 아네. 좀 컸군, 유타 사장님.”


“너한테서 배운 못된 버릇이라서 말이지, 의원님.”


“아무튼 우리는 관찰자 역이다. 정보만 잘 넘겨주면 나머지는 다른 형제들이 맡아주겠지. 권모술수와 전략 쪽으로 발달한 인간들은 따로 있으니까.”


엘리어트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랜슨 그 근육덩어리도 최근 상부 명령으로 특수군을 조직하여 훈련시키는 중이라지. 내부 정적 청산과 비밀 임무에 특화된 특공대라나. 이젠 전쟁의 패러다임도 완전히 새로운 식으로 바뀌겠군.”


“설마 ‘그들’을 염두에 둔 계산이었으려나?”


“뭐 지금으로서 걸림돌은 그들 밖에 없지. 나머지는 부스러졌으니까. 연약해빠진 사상으로는 타르타로스가 주는 그 원초적 공포를 감당해낼 수 없어. 마인드 퓨리파이어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해온 유타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유타는 그 말을 듣고 김 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러면 역시나, ‘역사의 왼쪽 날개’는 침몰인가? 허망하네.”


두 잘생긴 청년의 안색 위로 그 원초의 악(惡)을 향한 깊은 분노가 스며들었다.


“뭐, 그것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을 거야.”


정작 엘리어트는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도 믿지 않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의 원수들이 밑바닥부터 무너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롤모델인 큰형 알렉시스 황태자가 이슬람을 상대로 해냈던 것처럼.

이런 식의 시시껄렁한 결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일어서지 못하겠지.”


사색에 잠긴 틈에 황궁의 대문이 그들의 눈앞에 다다랐다.

둘의 생체 신호를 인식해낸 시스템이 자동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리어트 황자님, 유타 황자님.}


한 번도 보금자리처럼 느껴진 적 없었던 이 아름다운 저택.

만발한 꽃들과 나무들이 수놓아진, 햇살 가득한 저원이 둘을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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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호크마 (2) 24.03.22 16 0 18쪽
77 호크마 (1) 24.03.20 15 0 12쪽
76 대언자 (2) 24.03.18 15 0 15쪽
75 대언자 (1) 24.03.16 15 0 11쪽
74 아저씨와 아이들 24.03.15 15 0 22쪽
73 정산 (4) 24.03.08 16 0 15쪽
72 정산 (3) 24.03.07 14 0 12쪽
71 정산 (2) 24.03.06 14 0 12쪽
70 정산 (1) 24.03.05 11 0 14쪽
69 어둠의 무리 24.03.02 17 0 14쪽
68 타르타로스 (6) 24.03.01 17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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