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2 터보

15. 채소를 먹도록 하렴

과로로 사망해 슬라임의 대수해(大樹海) 근처의 영지에서 전생한 그는 다짐했다. 이세계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만끽하며 살자고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을 살려보고자 모험가 길드 사무원이 된다는 발상까지는 좋았으나,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격무를 이어갔다.

급료와 비교해 너무 많은 업무량. 업무 외의 잡일 지시. 선을 지킬 생각이 없는 모험가들의 성희롱. 무너진 일과 삶의 밸런스······. 급료에 장난질이 없다는 것만 빼면 전생의 블랙 기업과 다를 게 없었다.

판타지의 즐거움과 제2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감각이 이어지는 나날. 그는 서류 더미 위에 턱을 괸 채, 저도 모르게 푸념을 흘렸다.

“아, 주말농장이라도 하면서 느긋한 힐링 라이프를 만끽하고 싶어!”

그러자 돌아온 건 폭소였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푸념에 돌아오는 반응치고는 조금 심한 느낌에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상했다.

“뭡니까 대체. 아무리 사무직이라 해도 텃밭 정도는 가꿀 수 있거든요? 자란 거 기다렸다가 수확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두고 보라지. 자잘한 말싸움 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줄 거라 확신한 그는 마침 수확철이라 품앗이를 의뢰한 농부의 퀘스트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는 두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왜 입과 행동이 거친 모험가들이 농장 일을 하겠다니까 박장대소를 터트렸는가.

어째서 농장 품앗이 ‘따위’가 모험가 길드에 의뢰까지 들어올 정도의 일이었는가.

***

며칠 후.

“ ”

“어이 그쪽!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가는 감자에 깔릴 거야!”

“무다! 무다! 무다! 무다! 무, 무다! 무가 온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당근에게서!”

“제기랄! 이 시금치는 너무 신선해! 너무 신선해서 베이지 않는다고!”

“아아아악! 눈이! 내 눈!”

“어떤 등신이 양파부터 공격한 거야! 양파는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전원 방독면 착용!”

“파가 갑옷을 뚫었다!”

“올해도 싱싱하구나!”

“큼직한 부분은 공격하지 마라!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고작 감자 따위! 방패로 밀어내 주겠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이 멍청이가. 감자한테 깔려 죽고 싶은 거냐!”

“물 마법이다! 양분이 있는 흙을 씻겨내야 해! 불 마법은 채소를 태울 뿐이야!”

“호박이! 넝쿨째로! 피해욧!”

“위생병! 위생병!”

“신선한 채소에게 질까 보냐!”

“뿌리를 잘라라!”

“살고 싶으면 창을 들어!”

전신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쓰러지고, 잘 제련된 검이 부러져 쇳가루가 흩날렸다. 방패로 밀어내 보이겠다는 전사는 감자들에게 깔려 이제 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전생한 곳은 슬라임의 대수해 근처의 영지.

기이할 정도로 양분이 넘쳐나 최고급 작물이 나오는 대신, 농작물이 살아서 움직이는 땅.

어찌나 흉포한지 수확철의 작물은 토벌 대상으로 지정된다. 왕국의 모험가와 병사, 심지어 영주 직속의 기사들까지 달려들어서 수확해야 하는 게 이곳의 작물이었다.

마치 소규모 전장을 방불케 하는 그 풍경에, 낫 하나만 들고 온 그는 넋을 잃고 움직이지 못했다.

아아, 무다. 무다. 무다.

하늘에서 무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왕당파기사]

농작물(식물 몬스터.식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