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의 큰 뜻 (18)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해는 완전히 숨어버렸고, 대신 달이 그 자리에서 야릇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달빛조차 꺼려 하는 듯한 암흑 속에 잠긴 마을엔 사나운 바람만이 을씨년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선생님 무서워요.”
“쉿!”
아이들은 어둠이 주는 공포에 압도된 듯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옷깃을 붙잡은 채 미동 없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자, 다들 손을 벽에 짚은 채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알았지?”
내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나도 이렇게 두려운데 아이들은 얼마나 무섭겠냐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문 채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뭔가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깜짝이야!”
머리를 스치며 떨어진 건 하얀 우박 덩어리였는데, 크기가 골프공만 했다.
이내 아이들이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얘들아!
조용히!”
“선생님, 지금 하늘에서 떨어진 게 제 등을 때렸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
이 상태론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 되겠다.
먼저 우박 피할 곳을 찾아야겠다.”
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 한 채가 보였다.
달빛에 비친 외딴 집의 문은, 바람에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당장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우선 저곳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박이 어찌나 큰지 집도 얼마 못 버틸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때 집 안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 들었어?”
“무슨 소리?”
은선이의 물음에 지완이가 반문했다.
“누가 도와달라고 한 것 같은데...”
“뭐?”
지완이의 옆에 있던 동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너무 배고파서 환청이 들리는 거 아냐?”
“내가 너냐?”
은선이가 눈을 흘기며 동희를 쏘아보았다.
동희는 은선이의 화난 표정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정말 지독한 날씨 군.”
내 중얼거림에 성현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차라리 잘 됐어요.
이렇게 혼란스러워야 우리도 발각될 위험이 줄어들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충만이가 바닥에 앉은 채로 아이들을 보며 소리쳤다.
“너희들, 왜 거기 멍하니 서있어?
정신 차리고 지금 당장 먹을거리가 있나 찾아봐.”
충만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선이가 충만이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너부터 일어나서 움직여!
이 게으름뱅이야.”
충만이는 입이 빼쭉 나온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툴툴거렸다.
“배고파서 쓰러지겠구먼.
왜 나한테만 그래?”
“어서 움직여!”
은선이는 말하는 동시에 충만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갈겼다.
그러자 충만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 진짜!
자꾸 이럴 거야?”
“왜? 뭐? 어쩔래?
빨리 안 움직이면 이번엔 볼기짝을 발로 차버릴 거야!”
“이 누나가 정말!”
충만이는 말하던 중에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은선이는 갑작스레 모든 움직임을 멈춘 충만이의 눈앞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 장난치지 마!”
은선이의 말에 충만이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충만이가 가리킨 곳엔 창문이 있었는데, 그곳엔 어떤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으악!”
아이들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때 문고리가 스르르 열리며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너희들 뭐야?”
“우리들은...”
소진이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충만이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네놈 먼저 정체를 밝혀!”
“충만아, 그만.”
충만이가 흥분한 것 같아 옆에 있던 은선이가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야, 네 이름이 뭐니?
여기가 너희 집이니?”
“혹시 어... 언니?”
“누구?”
은선이는 자신을 알아보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겠네.”
은선이가 아이를 보며 웃자 그제서야 아이도 은선이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괜찮은 거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은선이는 바뀐 아이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게...
엄마가...”
아이가 말끝을 흐렸다.
“아주머니가 어떻다고?”
은선이가 답답한 표정으로 아이를 채근했다.
그러자 아이는 대답 대신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그 뒤에...”
우리들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모인 그곳엔 누군가가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은선이가 누워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근처에 이르자 숨도 쉬지 못할 만큼의 지독한 악취가 풍겨왔다.
“아, 냄새!”
모두가 코를 막으며 외쳤다.
은선이는 악취를 겨우 참아내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주머니가 왜 이러시니?”
“엄마 아파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언제부터 이랬니?”
“몰라요.
그냥 갑자기 아팠어요.”
“갑자기?”
은선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아주머니는 이불을 둘둘 만 채로 끙끙 앓고 있었다.
은선이는 아주머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엄청난데...”
은선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내려다 본 순간, 아주머니가 은선이의 얼굴에 대고 기침을 했다.
“콜록!”
“악!”
은선이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에 묻은 침을 손으로 닦았다.
충만이가 그런 은선이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제 우박도 그쳤으니 빨리 나가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여기엔 있기 싫어.”
모두가 말은 안 했지만 충만이와 비슷한 마음인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은선이가 앞에 있는 아이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래도 뭐?
내가 보기엔 여기 먹을 거 하나도 없어.
어휴, 빨리 나가자.
우리한테 병균이라도 옮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충만이가 핏대를 세워가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은선이 역시 충만이 말대로 병이 옮을까 찜찜했던 터라, 살며시 뒷걸음질 치며 대답했다.
“그래, 일단 나가야겠다.”
은선이는 이렇게 말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나가서 약을 갖고 올테니, 그때까지 엄마 잘 돌봐드리고.
할 수 있지?”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언니, 가지 마세요."
은선이는 아이의 간절한 눈빛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예상치 못한 언니의 거절에 아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은선이에게 안겼다.
“언니, 날 버리고 가지 말아요.
절 도와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발...”
자신의 품에 안겨 애원하는 아이의 모습에 은선이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아이의 말대로 여기 머물다가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병이 전염 될까 너무 두려웠다.
은선이는 말없이 아이를 품 밖으로 밀어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이는 이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은선이를 바라보았다.
충만이는 혹시라도 은선이가 흔들릴까봐 걱정이 됐는지, 은선이의 팔을 붙잡고서 급히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들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면서 뒤돌아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매미처럼 창문에 달라붙은 채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부르짖음이 마치 어린 시절에 들었던 애매미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병의 공포는 은선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병든 어미와 그 주변을 맴도는 약한 아이를 버리고 길을 나섰다.
길 위엔 무정하고도 매서운 바람이 곁을 스쳐가며 우릴 한껏 비웃고 있었다.
- 작가의말
내가 또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겔 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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