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6 18:15
연재수 :
297 회
조회수 :
1,542,458
추천수 :
30,770
글자수 :
2,261,828

작성
23.12.27 18:10
조회
3,146
추천
79
글자
18쪽

내기

DUMMY

※※※



“수십년 전이었네. 마지막 남은 백철 야장이 모습을 감춘 것은.”


손을 매만진 철야방주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석 야장에 대한 관심은 씻은듯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방안을 짓누르던 거한의 기세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선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이었다.


“본디 세간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하던 백철 야장은 천관님의 스승, 그러니까 신야(晨夜)라는 야장이 계셨었네.”


과거를 회상하는 시선. 동시에 신야라는 이름을 언급함에 익숙함이 묻어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인지.


“그 실력과 성정 모두 정평이 나 있으셨던 분이지.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신야께서 돌아가시고, 그분의 유일한 제자였던 천관님은 자취를 감추셨네.”

“그랬군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일전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했다. 천관을 처음 만났을때 그가 짤막하게 해주었던 이야기. 스승의 죽음과 그가 세상을 등지게 된 이유. 선아가 아니었다면 백철 야장의 계보는 자기 대에서 끊어버렸을 것이라 말하던 천관의 목소리가 귀에 다시금 울리는 듯 했다.


“그 뒤로 천관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었네. 우리들도 천관께서 내리신 결정을 존중해 찾지 않은 것도 있네만.”

“헌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백연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신야께서 활동하시던 시절, 천관께선 그분의 제자였단 소리로 들립니다만. 철야방주께선 천관님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시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신야를 언급하는 목소리에 익숙함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면, 천관을 입에 담는 철야방주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얼핏 경외감마저 실려있는 음성. 그 미묘한 태도의 차이가 이상했다.


그러자 철야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이유는 간단해. 신야께서도 분명 아득히 뛰어난 명장이셨으나, 천관께선......”


철야방주가 선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서 천관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망치를 쥔지 오년만에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으셨네.”

“그런......?”

“그래. 스승과 제자가 같이 활동했는데, 제자가 스승의 실력을 이미 넘게 되어버린 것이었지. 물론 천관께선 스스로를 낮추고 조용히 스승의 밑에 남으려 했지만, 알만한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었네.”


때문에 천관의 이름은 이미 유명했다고. 신야가 죽은 이후 천관이 곧바로 세간에서 모습을 감췄음에도 그의 위명이 드높은 이유였다.


“한순간에 스승을 뛰어넘고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는 특출난 인물들은 언제고 나타나기 마련이네. 당대 무림에서는 소림의 방장이나 남궁의 검왕이 그러할테고, 야장들의 계보에서는 천관님이 그런 인물이셨던게지.”

“할아버지가......”


선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철야방주가 답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셨네. 감추려 한다고 감춰지지 않았지. 그분의 가장 유명한 걸작중에 하나를 아는가?”


선아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신 적이 없어요.”

“그럴만 하지. 스스로 뽐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니. 허나 그분의 작품은 입아프게 언급하지 않아도 세간에 그 위명을 떨쳤네. 저 멀리 북방.”


철야방주의 목소리에 경외심이 깃들었다. 감탄과 부러움이 뒤섞인 음성이었다.


“외세로부터 장성을 수호하는 괴물, 천뢰시(天雷矢) 종리군의 오호궁(烏號弓)이라는 활도 그분의 작품이네.”

“종리군? 북방이라면 군문 장수입니까.”

“그렇다네. 황실의 휘하에 있는 군문. 그 안에서도 최강의 무위를 자랑하는 천뢰시마저 황실 명장들의 무기가 아닌, 그분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소리일세. 그 위명과 위상을 짐작해봄직 하지.”

“할아버지는 활도 만드셨구나......”


선아가 나직히 뇌까렸다.


“나무를 다루는건 배운적이 없는데.”

“누가 나무로 만들었다 했는가? 오호궁은 통째 백철로 만들어진 활이네. 철궁(鐵弓)이지.”


천관을 언급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감탄이 가득 담겨있다. 뭇 무림인들이 초월자들에 대해 논할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늘어놓던 철야방주가 마침내 정신을 차린듯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잡설이 길었네. 천관님의 후인을 여기서 보게 될줄은 몰라서 실례를 저질렀군.”

“바로 믿으시는군요?”

“눈이 달려있다면 그 검을 보고 안믿을 수가 있나?”


철야방주가 여휘를 흘끗 응시했다. 그의 눈에 미묘한 열기가 깃들었다.


“분명 천관님의 작품은 아니네. 하지만 그분의 손길이 묻어있어.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겠나.”


그가 선아에게 씩 웃어보였다. 여태껏 진중하기만 하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래, 천관께서는 잘 지내시나? 야장께 꼭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는데,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여 포기하고 있었건만. 자네를 보니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할아버지께선.”


철야방주의 말을 끊은 선아가 담담한 시선으로 철야방주를 올려다보았다. 나직하지만 침착한 소녀의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돌아가셨습니다.”


침묵이 허공에 내려앉았다. 백연의 시선이 힐끗 선아를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오히려 약간은 뿌듯한 것만 같기도 했다. 천관의 위업을 인정하고 받드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


가족의 죽음.


어른스러운 선아라 해도 그 아픔이 한순간에 희석될리는 없다. 그녀가 처음 곤륜산에 이르렀을때 간간히 한밤에 나와 울고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와 달리 이제는 많이 괜찮아진 듯 했다.


‘그래도 한번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련지.’


다가오는 여름. 천관의 기일이 되기 전에 그의 무덤에 찾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선아에게 가자고 말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천관께서......”


반면 철야방주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허탈한듯, 눈을 움직였다가 다시 입을 벌린다. 회백색 머리칼과 거친 수염이 느릿하게 흔들린다.


그 날카롭고 강철같던 방주가 멍한 표정으로 빈틈을 드러낸다. 그만큼 듣게 된 소식이 충격이었는지.


“......본디 강호 무림에서 인연은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다 하지. 가벼이 작별 인사를 건넨 친우가 다시는 만나볼 수 없게 되는 일도 흔하네만. 이런 소식을 듣게 될줄은 몰랐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침울해진 음성이 물었다.


“언제인가?”

“반년 정도 되었어요.”

“편히 가셨는가. 무뢰배들의 손에 당한것은 아닌것인지.”

“......편히 잠드셨습니다. 그보다 만족스러울 수 없을거에요. 필생의 걸작을 남기고 가셨거든요.”


그 말에 철야방주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진중해진 얼굴이 된 그가 선아의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철야방주가 입을 열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정중함이 담겨있는 물음이었다. 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가벼웠다.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 팽악은 자신이 들을 것이 아니라며 바깥으로 나갔다. 석 야장도 조용히 팽악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팽악이 그를 감시하며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셋만이 남았다.


백연은 조용히 선아의 곁에 서 있었고, 철야방주는 입을 다문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선아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질문을 하는것이 전부였다.


백연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도 존재했다. 천관과 그녀의 첫 만남, 야장일을 시작하게 된 과정, 그간의 여정, 수라궁의 이야기와 천관의 말들, 그리고.


“이 녀석이 구해줬어요. 첫 만남에는 제가 좀 실수를 했었는데......”

“정확히는 칼로 옆구리를 쑤시려고 했지.”


못참고 말을 뱉은 백연이 자신에게 휙 향하는 두쌍의 시선에 헛기침을 했다.


“계속해. 조용히 할게.”


미소를 지은 백연이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풀려나갔다. 철야방주는 놀라고, 감탄했으며 천관이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에 대해 들을때는 두 눈 가득 욕심을 드러내었다. 순수한 야장으로써의 욕심. 명장의 마지막 유작을 보고 싶다는 감정이다.


“곤륜파의 운룡검이라.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


수라궁에 대해서는 분노를 드러냈고, 백연과 종남, 그리고 화산의 무인들에 대해서는 경탄을 표했다.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감사를 건네는 것이 그가 얼마나 천관을 존경했는지 알법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제 힘으로.”


선아의 눈이 백연을 힐끗 향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여휘의 표면을 가벼이 쓸었다.


“이 검을 완성시켰습니다.”

“걸작이군. 걸작이야. 선아 그대의 노력과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 싶네. 혹 그 검의 검명(劍名)을 알 수 있겠는가?”

“여휘(餘輝)입니다.”


백연의 답에 철야방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은 이름이군. 좋은 주인에게 갔고. 암화의 여휘라.”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다. 의자에 주저앉은 철야방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까움과 후련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한동안 옅은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철야방주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천관의 이야기에만 집중해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잠깐만. 천관께서 돌아가셨고, 그분은 자네 외에는 별다른 후인이나 유지를 남기지 않으셨으니.”


그가 선아를 쳐다보며 당황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대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백철 야장이란 말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한 태도였다. 여태껏 그 사실을 철야방주가 알아차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마도 그렇겠죠?”

“그......런.”


철야방주가 턱을 매만졌다. 고민에 빠진듯 선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철야방주가 천천히 목을 가다듬었다.


“야장 선아여.”


목소리에 망설임과 긴장이 섞여 있었다.


“지금 그대 스스로의 가치를 알고 있나?”

“압니다.”

“일전 수라궁에 쫓겼다고......허어. 지금 본인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도 아나?”

“그것도 알아요.”


철야방주가 미간을 좁혔다.


“세상에 유일하게 백철을 다룰 수 있는 야장. 자네 목숨은 자네 하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네. 그 기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가. 본디 천관께서는 후인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하셨기에 어쩔 수 없었네만.”


백연이 철야방주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예상이 되었다. 뛰어난 야장들은 백철의 가치를 모를리가 없었고, 눈앞의 거한은 야장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야장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에다 아까 전 천관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다는 말까지.


“이 몸이 철야방 방주의 위를 떠나, 한명의 야장으로써 그대에게 청하고 싶네. 백철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쿠웅.


묵직한 울림과 함께 철야방주가 무릎을 꿇었다. 어린 소녀 야장을 향해서.


당장이라도 스승으로 모실듯한 기세다. 그 예를 차리는 방식이 극진했다. 한 방의 방주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었다. 철야방을 뒷전으로 놓을만큼.


방주라는 자리에 올라 있으나 그 또한 야장이었다. 방주의 위보다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백연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생글거리는 웃음을 건 백연이 선아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선아야, 가르쳐줄거야?”

“안될 건 없지 않을까. 탁 노인께도 보여드리려 했는데.”


그 말에 철야방주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백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장난스레 휘어든 소년의 눈매가 철야방주를 향했다.


“좋아. 다 좋은데, 그 전에 내가 조건 하나만 걸어도 될까?”

“당연하지. 백연 네가 원하는대로 해도 좋아.”

“......조건? 무엇이든 들어주지. 백철을 다루는 기술은 어떤 재보와 비교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네. 백선아를 노리고 접근하는 이들을 철야방의 힘을 동원해 전부 막아줄 수도 있는 일이지. 아니, 그건 요청하지 않아도 응당 막아줄 것이네.”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에 있어 바람직한 자세를 보이는 철야방주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었다.


“선아는 저랑, 곤륜파가 지킬테니 그 부분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면 무슨 조건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엄청 간단하죠. 하오문 칠방의 세력구도. 지금 둘로 쪼개져 있을텐데.”


소년이 싱긋 웃었다.


“철야방이 서 있는 자리를 바꿀때가 된 듯 싶군요.”



※※※



해가 기울었다. 무당산을 오르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철야방주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 방주는 사흘의 시간을 달라 했다. 거절의 의미는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철야방의 사람들과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방주의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다는 소리였다.


-우선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네. 애시당초 금원방주의 사건으로 이쪽은 크게 힘을 잃었어.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것도 좋을 일이지.


말하며 턱을 매만진 철야방주는 한마디를 덧붙이더랬다.


-암휘군은 참으로 영악하군 그래.


하오문의 일에 백연을 개입시킨 하령을 탓하듯 옅은 한숨이 섞인 말이었다.


그렇게 철야방주와의 대화를 마친 뒤에는 석 야장의 처분이었다. 청해 옥수로 데려가기로 결론을 낸 상황. 철야방에서의 모든 직위와 위명을 박탈당한 그는, 운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곤륜파가 돌아가는 날까지.


그동안은 탁 노인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석려려와 함께 탁 노인의 일을 도우며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석려려의 치료도 필요하니 무당산에서 멀리 가 있게 만들수는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흘간 운현에서 바쁘게 돌아다닌 세 사람은 다시금 무당산으로 오르는 길에 발을 디뎠다.


“우선은 일단락 되었나.”


팽악이 중얼거렸다.


“빨리 끝났다면 끝났고, 늦었다면 늦었군.”

“전부 끝난건 아닙니다. 무기의 균열, 그 용도......확실히 알아내야 하겠지요. 애초에 강도를 약하게 만드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했으니.”

“그말을 믿나?”

“어느 정도는요. 처음 조사할땐 놓쳤는데, 이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팽악. 당신과 모위진의 무위는 높다 할 수 있는 수준이지 않습니까.”


칠룡중 둘이다. 동년배의 무인들 중에는 가장 뛰어난 이들이고, 그보다 한 배분 강호 선배들과 비교해도 그 무위가 드높다 할것이다. 칠룡이라는 이름은 그랬다. 그들보다 높은 배분조차 소수의 몇몇 무인들을 제외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천재들.


“그런 무인 둘이, 각자 상당한 힘을 실어 초식을 연달아 내치고 나서야 무기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특히 그 사일검법과 당신의 오호단문도는 일절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공들.”

“흐음.”

“그런 두 무공이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부서졌죠. 거꾸로 말하면 웬만한 칼질로는 부서질 기미도 없을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랬기에 균열의 용도를 파악하는 일은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다. 균열이라 말하고 있긴 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극히 미세한 실을 검신속에 넣어놓은 듯한 그런 장치였다. 식별조차 쉽지 않은 통로. 검의 혈관과도 같은 느낌의 형태이다.


그것을 만든 장본인인 석 야장조차도 그쪽에서 요청한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했다. 이것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결국 선아에게 맡겨야 할 일이었다. 선아가 구조를 분석하고 나면 백연 또한 한손 거들 예정이었다.


“호북에 침입한 무인들, 그리고 그 노도사에 관해서는 무당파에 언질을 해놓겠습니다.”

“그래. 그것이면 충분할거다.”


군말없이 수긍하는 팽악이다. 그만큼 무당파의 위명은 강력했다. 그들이 한번 일을 알아차렸다면 똑같은 일을 쉬이 다시 벌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윽고 세 사람의 걸음이 비어있는 해검지(解劍池)를 지나쳤다. 본래라면 무당파의 도인들이 이 작은 연못에서부터 철저히 무기를 든 사람의 출입을 엄금했을테지만, 지금은 비무제전의 기간. 예외가 있었다.


스스로의 애병(愛兵)없이 비무제전에 참가하고자 하는 무인은 없을테니.


뒤이어 세 사람이 무당파의 산문 내에 들어섰다. 내려올 때와 같이 여전히 부산스러운 곳이었다. 오히려 그때보다도 사람이 더욱 많았는데, 천하 무림에서 모여든 수백에 달하는 정파 무림인들의 물결이 거대했다.


비무제전의 시작이 정말로 코앞인 탓이었다. 이제껏 도착하지 않던 이들까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몇 장문인이나 가주들은 본선이 시작되고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대부분은 예선부터 무당산에 머무르는 것이 정석.


“......흠. 나는 가봐야겠군. 무당파측에 사건의 결과를 알리는 것은 네게 맡기겠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팽악이 불현듯 헛기침을 하고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백연은 언뜻 눈에 스친 팽가의 무인들을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팽가주도 도착했나보네.”

“그러게. 며칠 전에는 없었던 사람들도 많아.”


선아가 감탄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언뜻 보이는 구파와 세가들의 고강한 무인들. 그리고 천하 정파 무림의 무인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때였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렸어요. 본디 청해에 한번 찾아가고 싶었는데.”


후욱.


바람이 스쳤다. 찰나지간 비단결처럼 허공을 타고 흐르는 검은 머리칼이 눈앞을 가렸다. 직후 백연의 앞에 한 여인이 내려섰다. 전조도 없이 공간을 격하듯 나타난 신묘한 몸놀림. 백연조차도 직전에 언뜻 감지한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없었네요.”


맑은 구슬처럼 구르는 음성에 옅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더없이 차분한 표정의 얼굴이 백연과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주변 곳곳에서 숨을 헉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훅 나타난 그녀의 고절한 보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미모가 너무나도 유명했고, 또 시선을 잡아끌었기에.


“오랜만이에요, 백연. 용봉지회 이후로 처음이네요.”

“예린 소협.”

“소협은 떼고 불러도 되는데.”


어깨에 비스듬히 창을 걸쳐 늘어뜨린 흑포의 여인, 뇌룡 악예린이 백연을 향해 그려낸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1 약선객 +4 24.01.02 3,071 76 15쪽
150 내기(5) +7 24.01.01 2,962 85 19쪽
149 내기(4) +6 23.12.30 2,989 76 16쪽
148 내기(3) +5 23.12.29 2,965 79 17쪽
147 내기(2) +5 23.12.28 3,036 78 16쪽
» 내기 +6 23.12.27 3,147 79 18쪽
145 철야방(11) +6 23.12.26 3,077 85 16쪽
144 철야방(10) +5 23.12.25 2,953 83 19쪽
143 철야방(9) +3 23.12.23 3,124 81 15쪽
142 철야방(8) +4 23.12.22 3,054 84 19쪽
141 철야방(7) +4 23.12.21 3,068 83 17쪽
140 철야방(6) +4 23.12.20 3,042 83 17쪽
139 철야방(5) +4 23.12.19 3,057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87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255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86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74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7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75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64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361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345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423 89 16쪽
128 사천(4) +9 23.12.06 3,398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419 93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93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621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91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518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89 8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