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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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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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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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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일보(一步)(6)

DUMMY

소년의 발끝이 허공을 디딘다. 발 아래 바람결이 숫제 단단한 대지라도 된 양.


화아아아아아악!


허공에 일보를 딛는 순간 발꿈치를 따라 진기가 꽃잎처럼 흩어진다. 소년의 발치를 따라 일어난 진기의 파동. 허공을 따라 희끄무레한 경파 조각이 새매의 날갯짓마냥 피어오른다.


검은 피풍의를 선녀의 날개옷마냥 둘렀다. 흑색의 옷자락과 머리칼이 투명한 하늘을 따라 미친듯이 나풀거리고, 비스듬히 내려깐 눈꺼풀 아래로 자색 별무리가 스친다.


시린 뇌광같은 검 한자루를 비스듬히 비껴잡은 자세 그대로 허공을 부드러이 즈려밟는 한걸음.


마치 용이 구름을 밟고 오르는 듯한 감각이다.


‘이대로.’


소년은 생각했다.


드넓은 절벽의 협곡 사이.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거대한 틈이다. 이제는 너무 간단해보였다.


‘한 걸음이면 충분해.’


쪼개진 간극 속 찰나.


시간의 틈새에서 소년의 발치를 따라 뇌광이 줄기줄기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허공에 디딘 일보. 그 추진 또한 더 섬세하게 이뤄져야 한다. 감각 속에서 진기가 흡착과 발산을 반복한다.


시야 저 아래. 절벽의 밑바닥에서 그를 집어삼키려 들던 바다의 파도를 보며.


‘물결에 올라탄 듯이.’


소년은 허공에 디딘 발걸음을 가볍게 밀어내었고.


화아악-!


봄바람이 일었다. 허공에 발 디딘 소년의 신형이 그대로 전진했다.


삽시간에 백색 가면이 훅 커져온다. 절벽 반대편에서 유유히 그를 바라보던 결백. 백색 가면 아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목도하기라도 한 듯이.


[허상......?]


멍한 음성이다. 간극을 쪼개며 귓가에 들어오는 결백의 목소리에는 경악을 넘어선 불신이 담겨 있었다. 제 눈으로 보고도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럴법도 했다.


강호 무림의 어떤 기인이사도 허공을 제 발걸음의 지지대로 삼는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설화에서 다뤄지는 능공허도나 허공답보의 경지. 영물들이나 해내는 일이다. 구름을 밟고 노니는 천상의 신룡(神龍)처럼.


이제는 아니었다.


소년의 신형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절벽 사이의 틈새를 일보로 딛고, 뛰어오르는 행색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발치를 따라 일어난 희끗한 추진 경파를 날개자락마냥 매단채로.


[내 무공에 무슨 흠결이라도......]


그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적!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고개를 번쩍 쳐든 결백의 시야 너머. 저편의 하늘 어귀가 큼직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푸르던 하늘이 어느 순간 불안하게 일렁이더니, 삽시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공기가 가라앉고, 푸른 바람으로 가득하던 허공은 삽시간에 끈적한 기운으로 뒤덮였다.


콰아아아아아-!


어느 순간 백연의 시야에는 보이기 시작했다. 저편 너머에서 용솟음치는 검은 번개와, 인지하기도 어려운 속도로 대지를 누비는 검고 붉은 두 사람의 인영이.


소년은 곧바로 알아챘다.


환술사가 스스로의 무공을 의심했다.


치명적인 일이다.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환술은, 타인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환술이 극도로 불안정한 술법인 이유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허공을 밟은 백연의 일보를 본 까닭이다. 그것이 진실일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겠지. 그로써 마음에 아주 작은 의심이 싹트는 순간 결백의 무공은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천지사방의 환영이 사라진다. 한순간에 모든 전장이 원래의 음울한 색과 모습을 되찾는다. 그와 함께 큼직하게 다가오는 하얀 가면의 모습.


쩌적.


어느새 넓다란 절벽은 온데간데 없었다. 삽시간에 훅 코앞에 다가온 결백의 모습을 보며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이런......!]


찰나였다.


결백의 코앞에 착지하며 검을 휘두른다. 한순간 결백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면승투삭이 검면을 휘감으려 들었다. 인지와 동시에 백연은 손목을 가볍게 뒤틀며 회전했다. 발끝으로 지면을 그어내는 것과 동시였다.


쩌억.


발끝이 검극이라도 되는 듯 반원으로 큼직하게 그어낸 여파. 환상이 모조리 깨지고 원래대로 돌아온 돌바닥에 백연의 발끝이 스친다. 가죽신의 앞코에 깃든 뇌기가 검기마냥 대지를 가른다. 그로 인해 돌바닥이 쩌적-갈라지며 저절로 치솟아오르고.


쩌저저저저정!


하얀 불티가 흩날렸다. 찰나 진기를 불어넣어 단단하게 만들었던 면승투삭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천 조각. 동시에 백연이 그어낸 대지가 비틀리며 결백의 발치에서 뒤집힌다. 진각 여파로 인해 몸이 크게 기운 결백. 그가 억지로 균형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뒤로 훌쩍 몸을 날리는 순간.


쩌적-


소년이 움직였다. 찰나 인지조차 뛰어넘은 일보. 어느 순간 백연은 결백의 뒤에 도달해 있었다.


공간을 격하듯 움직인 보신경에, 결백이 경악 섞인 눈빛으로 몸을 뒤틀며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콰득.


뇌광이 일었다.


가면을 쓴 환술사의 어깻죽지를 따라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결백의 왼 어깨. 완전히 꿰뚫렸다. 날의 반틈까지 파고 들어갔는데, 이대로 올려치면 결백은 외팔이다.


백연은 그대로 검을 휘어잡고 왼손을 뻗었다. 고절한 금나수가 환술사의 목울대를 틀어쥐었다.


콰앙!


결백의 신형이 땅에 처박혔다. 어깨를 꿰뚫리고 목을 움켜잡힌 채로.


“너는 우리와 같이 가지.”


백연이 말했다.


무심한 음성. 단숨에 목을 틀어잡힌 결백이 쿨럭-하고 기침을 뱉자 가면 아래로 한움큼 핏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불신과 경악만이 가득했다. 지금 이 상황보다, 그가 직전에 보았던 것이 더 중요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바, 방금 그 걸음! 무슨 짓을......!]


백연은 답하지 않았다.


‘빨리 벗어나야 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결백의 절기는 깨졌고, 여휘가 그의 몸에 틀어박혔다. 세심한 조정이 필요한 것이 환술법. 아무리 강대한 무인이라도 이 시점에서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결백을 확보했으니 여기서 벗어나면 그만이다.


‘상황은.’


백연은 전장을 가늠했다. 그의 시야 너머, 마구 일그러지고 있는 저편의 허공이 보인다. 절벽 끝자락에서 움직이는 검고 붉은 잔영이 사방의 대기마저 짓이기고 있었는데, 초월적인 두 무인의 전투는 쉬이 끝날 듯 보이지는 않았다.


천린이 혈교주를 이길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듯 보인다. 그 증거로 지금 이 순간도 혈교주의 혈기가 조금씩 마기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혈교는 본디 교에 뿌리를 둔 이단이라 했던가.


갈라진 것은 원류(原流)에 잡아먹힌다. 적어도 그가 천린의 패배를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대적임은 차치하더라도, 저 사내는 세상을 뒤엎을 자질을 가진 괴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들은 혈귀들과 쇄혼노군만 떨쳐내고 가면 될일이다.


“예린!”


백연의 외침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진기로 증폭된 음성이 퍼져나가는 순간, 하늘이 번뜩이며 창격 여파가 사방을 짓이겼다. 번뜩이는 빛살이 일고는, 뒤이어 웅혼한 법력 여파가 뒤따른다.


빠르게 적을 밀어내고 이쪽으로 향하는 움직임.


한편 쇄혼노군의 주변으로는 한층 강대해진 귀곡성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희끄무레하게 일어난 혼백의 폭풍으로 인해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을 지경. 그 속에서 틈틈이 검광이 번뜩이다, 이내 철편이 회전하며 일으킨 은빛 폭풍에 휩싸여 사라진다.


‘......우선은.’


백연은 생각했다. 천살문까지 그가 일일이 챙길 시간은 없다고.


저 모산파의 노괴. 애초에 진심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지 않다. 살문의 무인들이니 언제고 몸을 뺄 수 있으리라.


‘그래도 잠시 틈을 벌려줄 도움 정도는 주고 가는게-’


그렇게 생각하며 백연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후욱.


시야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즉각 반응한 백연이 그림처럼 회전하며 여휘를 뽑아내었다. 피륙음과 함께 결백의 어깨에서 뽑혀나온 검이 삽시간에 칠절(七絶)의 검로를 그리고.


쩌저저저저저정!


불티가 비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와 함께 훅 휘어진 여휘의 검극이 그대로 땅을 향했다.


바람 아래 새하얀 장포가 흩어졌다. 티끌 한점 없는 순백의 머리칼과 수염이 줄기줄기 흩날린다. 허옇게 멀어버린 눈으로 백연을 직시하며 씩 웃는 미소가 어울리지 않게 인자했다.


“아쉽게 되었네만, 이자에게는 노부가 먼저 볼 일이 있어 안되겠네.”

[혈선! 당신......]

“자네는 조용히 하고 있게나.”


압도적인 존재감. 찰나지간 백연은 느꼈다. 맹인 노검객의 말에 실린 진기가, 한순간 실재하는 압박감이 되어 결백에게 떨어져내렸다. 동시에 결백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게 입을 딱 다물었고.


“......혈선(血仙,) 추혼(追昏).”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에 노인의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건 처음이구먼. 언젠가는 이리 될줄 알았지만, 그것이 오늘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그극.


백연은 검파에 힘을 주었으나 여휘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검을 짓누르고 있는 혈선의 검 탓에.


키이이이잉-


기묘한 화음이 귓가를 저민다. 섬뜩한 진기가 혈선의 몸을 타고 휘몰아치며 손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주름진 양손에 잡힌 것은 피로 물결치는 두 자루 핏빛 검이었다.


계속해서 형태가 일렁인다. 정해진 모양이 없는 양. 진기로 이루어진 검일까.


‘그렇다고 하면, 말도 안되는 강자인데.’


무형검(無形劍).


검성(劍星) 본인에게 직접 들은적이 있다. 풍백의 절기도 무형검이라고.


경지와 상관없이 그 오성이 있어야만 손에 쥘 수 있는 무공이라 했다. 극도로 희귀하며 동시에 강력한 검.


눈앞에 나타났다. 두 자루 피로 이루어진 무형검을 양손에 쥐고 여유롭게 백연의 검을 짓누른다. 한자루 검으로 여휘를 눌러놓은 채로도 한없이 유유자적하다. 나머지 한자루 검은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였는데, 그럼에도 터무니없이 위협적이었다.


대충 늘어진듯 보여도 저것은 지금 백연의 목덜미에 닿아있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풍백이 그러했듯이.


‘적어도 검성, 그 이상으로 상정해야 옳아.’


어느 순간부터였다. 사방에 휘감긴 혈기(血氣)가 서서히 눈앞의 맹인 노검객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주인을 새로 인지하는 듯한 기괴한 광경. 느릿하게 휘몰아치며 혈선을 향해 쏟아지는 진기의 파도가 거대했다. 백연은 곧바로 깨달았다.


이 순간 혈선은 무형검을 두자루가 아니라, 수십자루라도 숨쉬듯이 엮어낼 수 있다고.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단숨에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리 보니 또 나름의 즐거움이구먼. 항시 자네의 소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건만.”

“......무슨 소리지?”

“자네의 그 행적에는 노부도 관심이 많다는 소리일세. 아마 다른 누구보다 더.”


찰나 소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관심이 많다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언행. 그 속에서 백연은 가득한 호기심을 읽어냈다. 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죽일 마음이 없다. 지금 그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무위이면서도 이리 대화를 하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린 백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자에게 볼 일이 있다고 했나?”

“그렇네. 칠칠맞게 정보를 흘리고 다닌 놈들이 있는 듯 한데, 이 친구가 그런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 말이지.”

“정보라면?”

“자네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 일이네만, 아쉽게도 알려주기는 어렵겠네.”


클클 웃은 노인이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노부야 그대한테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지만 장주가 화낼게 분명한지라.”


찰나 백연의 눈이 번뜩였다.


‘장주라.’


방금의 짧은 대화 속에서 많은 정보가 오갔다. 특히나, 결백이 무언가 많은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지금 혈선의 눈앞에서 이자를 빼낼수만 있다면.


‘한번 정도는.’


해볼만한 도박이다.


찰나 백연은 생각했다.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을 인지에 담았다. 삽시간에 근처까지 달려온 예린과 화율. 그리고 저편에서 휘몰아치는 쇄혼노군의 혼백 폭풍과 시야 가장자리에서 붉은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는 흑뢰.


그리고 찰나지간 흑포를 흩날리며 혈교주의 팔을 금나수로 붙잡으려 드는 천린의 모습까지도.


‘지금.’


티잉-


맑은 울림이 일었다.


한순간, 소년의 눈이 더없이 투명한 자색으로 물들었고, 쪼개진 시간 속에서 혈선의 얼굴에 감탄과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백연은 보았다.


그가 전진하는 순간 허공에 뻗어나오는 혈선의 수백가지 검로를.


‘한걸음.’


소년은 먼저 보았고, 걸음을 내딛었다. 두자루 혈검(血劍)이 그어낼 수 있는 모든 검로의 사이로.


뇌광이 그림처럼 흩어지며 전진. 별안간 여휘가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온다. 동시에 그에게 짓쳐드는 것은 주욱 뽑혀나온 다섯갈래 검풍(劍風).


소년은 피하거나 막으려 들지 않았다. 외려 추진을 더하며, 피풍의 위로 푸른 별빛을 펼쳐내었을 뿐.


쩌저저저정!


옷자락 위로 푸른 불티가 튀어오른다. 성라청휘극의 자락이 혈선의 다섯차례 검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사라졌다. 동시에 결백의 멱살을 확 잡아챈 백연은 그대로 검을 그어냈다.


화아아아아악!


한순간 빛살이 검신에 깃들었다. 찰나지간 엮어진 벼락같은 검로. 거대한 횡격이 눈앞의 혈선을 베어버릴 듯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후퇴 보법을 형성.


사박.


그림처럼 뒤로 움직이는 후퇴보법이 재빨랐다. 어느새 번쩍 들어올린 결백의 몸을 짐짝처럼 짊어진 채였다.


그 순간.


“참으로 놀랍네. 그 어린 아해가 이리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성장하다니. 다음에 만나면 이리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듯 하구먼.”


화악!


한순간에 그에게 달라붙는 그림자. 별안간 가속하더니 백연의 시간을 따라잡았다. 주름진 미소를 지은 노검객이 두자루 혈검을 비틀며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까지는 노부의 시간일세. 놓고 가게나.”


그 순간이었다.


철컥.


아직 뻗어나가고 있는 백연의 검격. 그 양 옆으로 혈선의 이검이 겹쳐진다. 흡사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의 기예를 검날로 재현하듯이. 뻗어나가던 분광뇌풍검의 검로를 그대로 잡아챈다.


두자루 검면으로 검격을 붙잡았다.


그와 함께 혈선이 물을 흘려내듯 가벼이 검을 비튼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백연의 검격 여파가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였다. 혈검 한자루를 놓아버리곤 후욱 다가선 혈선의 손이, 결백의 멱살을 잡고 있던 백연의 금나수를 가볍게 풀어헤쳤다. 그와 함께 허공에서 무릎을 쳐올리는 동작.


양자택일이었다. 이대로 손을 놓고 피하거나, 아니면 혈선의 일격에 당하거나.


‘젠장.’


백연은 욕지거리를 내뱉곤 곧장 몸을 뒤틀었다. 그와 함께 반쯤 회전하며 올려치던 혈선의 무릎을 손으로 짚었다.


파앙!


그 반동으로 인해 훌쩍 공중에 날아오른 백연. 그 아래에서 결백을 붙잡아 발치에 팽개친 혈선의 모습이 보인다.


입가에 지어진 한없이 즐거운 기색을 띈 주름진 미소까지도.


그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이이이잉-


혈선이 몸을 뒤틀었다. 찰나 그의 손을 따라 혈검 한자루가 다시 생성된다. 동시에 사방에서 그를 향해 모여드는 거대한 혈기의 폭풍. 별안간 물결처럼 퍼져나온 거대한 진기의 흐름이 한순간 파도같은 일격을 형성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앙!


급박하게 여휘를 들어 몸 앞을 막은 백연에게 막대한 진기의 폭풍이 날아와 부딪혔다. 흡사 검기를 뭉툭하게 만들어 쏘아낸 것 같은 형태였는데, 감각으로는 거대한 파도를 맨몸으로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그로 인해 튕겨난 백연. 단숨에 무너지고 있는 혈귀궁의 바깥 자락까지 떨어졌다. 사방을 따라 쩌적 갈라지며 붕괴하는 지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악예린과 화율의 놀란 표정까지도.


그 순간이었다.


후욱.


대기가 무거워졌다. 별안간 소년의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더니, 저편 끄트머리에서 검은 인영이 결국 혈교주의 한쪽팔을 우악스럽게 뽑아올렸고.


“.......!”


붉은 하늘이 쿠웅-내려앉았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한층 가까워지며 내려앉는 핏빛 장막. 동시에 사방에서 솟아오르는 흑뢰와 붉은 하늘이 거칠게 부딪혔고.


콰르르르르르르릉-!


지천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뒤늦게 터져나온 것은 거대한 진기의 충돌 여파. 원형으로 후욱 불어오르는 진기 파동이 한순간 백연의 몸을 강타했다.


“커헉!”


전력으로 몸을 내려친 듯한 감각에 백연이 기침을 뱉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것은 달려오던 악예린과 화율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의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찰나 휘몰아치던 쇄혼노군의 귀곡성도 잠시나마 끊겨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쩌적-갈라진 흙바닥이 내려앉으며 까마득한 산맥의 아래로 낙하한다.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으로 바위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반이 붕괴하고 있었다.


‘안되겠다.’


이대로 여기 있다간 정말로 휩쓸린다. 이미 결백을 확보하는 것은 혈선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백연은 고개를 들어 악예린과 화율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외쳤다.


“예린, 화율!”

“네!”

“그냥 뛰어내리십시오!”


그리 말하며 백연이 절벽을 가리켰다. 그에 잠시 악예린의 두 눈동자가 훅 커졌다가, 이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였다. 찰나지간 몸에 진기를 휘감은 악예린이 곧장 보법을 발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너지는 절벽을 향해 도약한다. 뒤이어 화율도 곧장 악예린을 따라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직후 마지막으로 천린의 잔영과, 결백을 발치에 놓은 혈선을 힐끗한 백연까지 절벽의 아래로 걸음을 내딛었고.


화아아아악-!


거친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훅 그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무너지는 바위와 흙더미 사이를 스치며 흩어지는 허공의 풍경이 빨랐다.


빠르게 낙하하며 악예린과 화율의 근처로 다가간 백연.


말 없이 두 사람의 몸을 붙잡는 순간.


츠츳-


한없이 끈적한 감각이 소년의 몸을 휘감아온다. 혈교주의 권역이었다. 진득한 혈공 진기가 달라붙어온다. 암혼제와 싸우고 있음에도 그를 견제하듯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듯이 그를 잡아당긴다.


그럼에도 백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소용 없다.


걸음을 내딛는다.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신형. 허상을 지키려 하는 소년은 이제 묶이지 않는다. 검귀로써 쌓아온 업도, 과거도, 집착도.


이미 떨쳐내었다.


이제는 앞을 보고 자유로이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악예린과 화율을 붙잡은 백연이, 다시금 허공에 한 걸음을 내딛었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소년의 일보가, 단숨에 혈교주의 권역을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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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혈귀궁 +4 24.06.07 1,276 46 17쪽
280 기련산(3) +2 24.06.06 1,299 48 15쪽
279 기련산(2) +3 24.06.05 1,233 45 15쪽
278 기련산 +5 24.06.04 1,283 49 14쪽
277 천살문(2) +6 24.06.03 1,311 46 12쪽
276 천살문 +6 24.06.01 1,481 47 18쪽
275 떠나는 바람 +5 24.05.31 1,391 46 15쪽
274 휴식(3) +6 24.05.30 1,400 45 16쪽
273 휴식(2) +6 24.05.29 1,415 5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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