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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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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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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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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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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一步)(5)

DUMMY

길다란 인사치례는 이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가능하면 저자를 잡아서.”

“알겠습니다.”

“우선 저건 제가 맡을테니, 예린을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율의 고개가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손아귀에 막대한 창격 초식을 숨쉬듯 엮어내고 있는 악예린을 향했다.


“......도와줄 필요가?”


그리 말했지만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투웅.


가벼운 보법. 불문 특유의 강대한 법력 기파가 물결처럼 뒤늦게 퍼지고, 어느 순간 악예린의 옆에 도달한 그녀가 손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악예린의 손이 움직였다.


전부 찰나였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악예린의 신형이 활시위처럼 퉁-튕기고, 그 손에서 피어오른 화광충천의 일격초가 발출된다.


일전 비무제전때보다 몇배는 강대한 힘이 이제는 일점(一點)이 아닌 광역으로 투사된다. 그와 함께 화율의 몸이 번뜩였다. 별안간 그녀의 뒤로 어른거리는 것은 수십에 달하는 손들의 잔영.


일발에 수십이다. 삽시간에 광역초였는데, 일순 소림의 무승 여럿이 동시에 장법을 내친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놈들을.......!”


달려들던 혈귀의 목소리가 훅 꺼졌다. 무너진 혈귀궁의 벽을 타고 뛰어내리던 혈귀들의 신형이 그대로 금빛 장법과 백색 창격의 여파에 휩쓸렸다. 일격초가 광역으로 뻗어나가며 지반을 단숨에 뒤집어 엎는다.


그 일격의 충격파가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나가 찢겨나가지 않은 이들의 육신을 멀리 튕겨보낼 정도로.


콰과과과과과광!


지반이 반쯤 내려앉는다. 수십장 거리로 튕겨나간 혈귀들이 주춤하며 멈춰선다. 앞서 달려들던 이들의 상박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탓이었다. 몸을 잃고 쓰러져 내리는 다리들.


“흩어져라! 광역 절초다. 각기 호신기를 두르면 버틸만큼 힘이 분산되었어!”


곧바로 누군가가 상황을 알아채고 명령을 내린다. 맹초산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이쪽을 향하는 눈길이 한없이 날카로웠는데, 홍예의 옷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했다.


백연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천살문 부문주에, 비구니 본인이군요. 골치아픈 적들이 꽤 늘긴 했습니다만.]

“......”

[이쪽도 나름 손이 많아서 말입니다. 살문의 살수들은 당신에게 맡기지요 노군. 암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했지만, 사파의 잡것들은 당신도 기쁘게 상대하겠지요?]

“노군......?”


백연은 중얼거렸고, 곧바로 깨달았다.


‘귀곡성이?’


끊기지 않았다. 처음 쇄혼노군이 무공을 펼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잠깐 화율의 법력 기운이 사이한 기운을 밀어내 인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허공을 따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혼백이 수백에 달했다.


그렇다는 말은.


“......허어. 이만하고 빠지려 했더니. 알겠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


낮은 곳에서 나고 있었다. 한순간 월풍의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곧장 발치를 향한다.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쇄혼노군의 몸 아래, 피곤한 듯 눈을 데구르르 굴리는 잘려나간 머리통이 입을 움직였다.


“허나 말해두겠네. 노부의 역할은 그것까지일세. 귀월.”

“예.”

“잠시만 주박을 풀어주게. 귀진쇄당편(鬼晉鎖當鞭)을 사용하지.”

“......알겠습니다. 이번에 한해서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네.”


그 순간 월풍이 전진했다. 찰나지간 백연의 인지조차 뛰어넘은 그가 이형환위의 걸음으로 공간을 격하고 움직여 귀월의 뒤에 나타났다. 동시에 그가 손에 쥔 단검이 기괴한 각으로 꺾이더니 단숨에 휘둘러졌다.


천살문 부문주의 암습.


그 격이 압도적이다. 사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향의 극치에 이르렀다 할 수 있었는데, 아무런 소리나 기척조차 없었다. 그러나.


쩌저저저저저저정!


“......이런.”


허공을 따라 튀어오른 것은 귀월의 목이 아니라, 시뻘건 불티였다. 찰나지간 귀월의 육신을 따라 휘도는 은빛 잔상. 그것이 길쭉한 사슬처럼 이어진 철편임을 알아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얇디 얇은 철편이 월풍의 단검을 허공에서 휘감고 있었다. 그를 인지한 즉시 월풍의 신형이 훌쩍 뒤로 물러나고.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머리 없는 쇄혼노군이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에게 자연스레 철편을 건네는 귀월의 모습. 직후였다.


츠츳.


살아있는 것 마냥 움직인 철편이 바닥을 뒹굴던 쇄혼노군의 머리를 감싸 들어올렸다. 그것을 목 위에 얹는 과정까지가 마치 환상처럼 이어졌다. 뒤이어 쇄혼노군이 비어있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고.


[아--------!]


희끄무레한 잔영 하나를 주름진 손으로 붙잡더니, 그것을 스스로의 목에 가져다댄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벼이 움직이는 모습.


마치 잘 붙었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하하, 그런 표정이라니. 놀랐습니까?]

“......”

[저 노괴가 단순히 목을 벤다고 죽을 줄 알았다니. 우습군요. 애시당초 노군의 육신은 이미 죽은지 오래된 몸인 것을. 강대한 영성으로 스스로의 혼을 묶어, 죽어버린 몸에 붙들어 놓고 있는......]

“결백. 노부는 오늘 그리 기분이 좋지 않네만.”


결백의 목소리를 뚝 끊고 들어오는 쇄혼노군의 음성. 태연히 철편을 든채 주변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월풍을 마주쳐 휘어진다. 주름진 얼굴에 미미한 감탄이 스쳤다.


“암습이라 해도 노부의 목을 그리 벨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몇 없을걸세. 대단하군.”

“급소를 베어도 죽지 않는다니. 살수로써 제일 귀찮은 상대군요. 곤란하게......그래도 시간 벌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휘릭.


동시에 단검을 역수로 휘어잡은 월풍이 백연을 힐끗하곤 그대로 걸음을 떼었다. 한순간 월풍의 신형이 허공에 휘도는 혼백마냥 희끄무레하게 이지러졌고.


쩌저저저저저저정!


그때부터 불티가 허공에 꽃잎처럼 만발하기 시작했다. 철편과 단검의 폭풍이 쇄혼노군의 주변을 따라 일어난다. 찰나지간에도 수십번의 합이 교차되기 시작. 가히 신기에 가까운 속도로 두 무인이 격돌한다.


그와 함께 귀월의 옆에서 불쑥 솟아난 참월대주가 여전히 생글거리는 낮짝으로 검을 휘둘렀고.


쩌정!


천살문과 모산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길쭉하게 이어지는 검격 여파가 사방으로 소리를 흩뿌리며 전장의 음률을 조성한다. 휘몰아치는 무공의 파도. 몰려드는 혈귀들을 악예린과 화율의 일격이 짓이기고, 사방을 따라서 쇄혼노군의 철편이 춤추듯 회전한다. 쏟아지는 귀곡성 너머로 더 크게 울리는 것은 세상을 적시는 핏빛 비바람.


혈교주의 장막 아래 거꾸로 오르는 흑뢰가 점차로 시야를 가득 물들이고,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산맥 꼭대기의 지반을 느릿하게 붕괴시킨다.


그 광경 속에서 백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쏴아아-


뺨에 닿아오는 핏물의 줄기와 사방을 휘감는 마기의 잔향.


[흐음? 무언가 생각이 많아보이는군요. 급한 것 아닙니까?]

“잠시 과거 생각이 나서.”


소년의 시선이 떨어졌다.


익숙한 전장이다. 수라궁과의 전투때보다도 더욱 기억을 파고드는 환경. 피가 온몸을 적시고 마기로 점철되며 사방에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한없이 익숙하게 뇌리에 새겨진 기억이다. 허나.


‘이 익숙함은, 내 것이 아니야.’


백연은 생각했다.


매 순간을 자꾸만 빗대어 돌아보게 된다. 미련 때문일까.


“......이제 그만할때가 되었군. 천린의 말대로.”


파앙!


소년이 검을 털었다. 여휘에 휘감겼던 핏물이 털어져 나가며 흐린 빛살이 혈우 사이로 번뜩였다. 자색으로 물든 눈이 결백을 마주했다.


그는 여전히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이리 휘몰아치는 혈우 속에서도 백색 옷자락은 핏물 한점 묻지 않고 깨끗한 순백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 가면도 마찬가지다. 백연의 검끝이 긋고 지나간 윗부분을 제외하면 여전히 매끈한 백색의 형상을 유지중이었다.


그 아래 반월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보인다.


‘저자가.’


알고 있는 것이 많다. 만금장의 결백. 모산과 혈교에도 관련이 있는 자다. 천마가 입을 육신을 만드는 일에 깊게 관여되어 있는 사람인 모양인데, 작금의 사태에서 가장 먼저 붙잡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아는 것을 모조리 캐내어야 한다. 소년의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과거와 별개로도.


“빨리 끝내지.”


백연이 말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결백의 가면이 기괴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 자신감. 이해 못할 것은 아니군요. 아직 숨기고 있는 절기도 많아 보이고.]


쩌억.


소년의 발아래 돌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무너지던 지반이 쿠궁-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조금 더 내려앉는 것만도 같았다.


찰나였다. 백연의 발치를 따라 켜켜이 진기가 쌓이는 순간, 결백이 양손을 가벼이 들어올렸고.


[그러니 저도 이제 제 절기를 좀 보여드리지요. 아무래도 숨기다가 당하는건 취향이 아니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연은 걸음을 내딛었다. 간극 속에서 용형보의 구결이 소년의 몸을 잡아당겼다. 주변의 풍경이 일순 소매로 문대어 없앤듯 큼직하게 일그러졌다가, 다음 순간 눈앞에는 결백의 하얀 가면이 자리해 있었다.


분광뇌풍검 초식과 보법이 동시였다. 검법이 보법에 자연스레 이끌려 전개. 여뢰의 벼락을 휘감은 검이 섬광처럼 낙하하는 찰나-


[도언(徒言).]


결백의 몸이 흐릿해졌다. 어떤 무공 전조도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이형환위의 보법조차 아닌 무언가. 일순 주변의 진기가 일제히 휘어든 것을 인지한 것도 동시다. 마치 운무(雲霧)처럼 녹아 흐릿해지는 형상이었는데, 그 음성에 깃든 것이 막대한 진기를 이끄는 구결의 자락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결백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백연의 시야가 뒤집혔다. 한순간 주변에 휘몰아치던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소멸한다. 찰나 감각을 희롱하는 압도적인 진기의 파도가 그의 몸을 감싸고 휘몰아쳤다.


사방 풍경이 번뜩이며 뒤틀린다.


하늘 가득 드리워 있던 혈교주의 핏빛 장막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 맑디 맑은 밤하늘 위로 무수한 별이 쏟아질듯 크게 드리우더니, 곧이어 달이 빠르게 서쪽으로 사라지고 동이 터온다.


반 호흡 사이에 밤이 끝나간다. 조하가 시야를 눈부시게 가리고, 이윽고 짙푸른 창천이 소년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사방에 화창한 빛을 흩뿌리는 태양이 더없이 눈부셨다.


대지가 뒤틀리는 것도 함께다. 붕괴하고 있던 절벽의 풍경이 별안간 시간을 멈춘 것 마냥 정지하더니, 사방을 뒤덮고 있던 혈귀궁이 먼지로 변해 흩날린다. 그 먼지는 곧이어 꽃잎처럼 바람을 타고 한바퀴 휘돌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빛의 조각으로 변해 바닥에 서서히 내려앉는다. 어느 순간 절벽의 아래에서는 왠지 모를 파도 소리와 짠 소금 내음이 코에 닿아왔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와 함께 절벽의 저 아래에서 투명한 물거품이 일었다 이내 부서져 사라진다. 머리 위로 둥실 흘러가는 새하얀 깃털같은 구름이 유유자적하다.


백연은 천천히 주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야말로 몽환적인 풍광.


이 순간, 백연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넓다랗게 펼쳐진 절벽 위로 발목 언저리까지 자라 흔들리는 연초록빛의 풀잎만이 가득하다.


지천을 뒤흔드는 암혼제의 마기도, 혈교주의 핏빛 장막도 없다.


당연히, 현실이 아니다.


환영진(幻影陣).


극도로 정교하다. 본래라면 그저 현실에 환상을 몇개 덧씌워 보여주거나 감각을 교란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다. 허나 이자는 달랐다. 이토록 강대한 환영진이라면 단숨에 안에 들어온 사람을 죽여버릴 수도 있는 무공.


‘도언 여몽환포영이라 했나.’


진언 자체에 깃든 뜻이 있다. 헛된 말들로써 덧없이 사라질 환상을 논한다는 의미. 그 공능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수준의 환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엄청난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백연은 이해했다.


‘본신 무력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이만한 수준의 환술사다. 애초에 본신으로 싸울 일이 극히 드물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한 강자였으나, 그의 진정한 힘은 아마 이쪽이겠지.


허면 지금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환영을 부수고 나갈 수 있는가.


전자의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암화.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쏴아아아아-


풀잎을 쓸며 흩어지는 바람 너머. 절벽의 반대편이었다.


꼭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본 반대편의 절벽 위, 뒷짐을 지고 선 결백의 자세가 여유로웠다.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 족히 백여장에 달하는 절벽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걸음으로 따져도 이백여걸음이 넘는다.


깎아지른 듯한 두 절벽 사이 아래로 펼쳐진 것은 칼날같은 암초들과 쉼없이 밀려오는 소금기 가득한 파도.


결백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당신의 검과 맞대고 싸워줄 이유는 없군요. 그 검법에는 흥미가 생기지만, 역시 제 장기는 이쪽인지라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가면을 매만진다.


[그곳에서 잘 살아남아 보시지요. 전부 격파하면 제 진법에서 자연히 벗어날 수 있겠지만......가능할까요?]


그 순간이었다.


저벅.


소년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백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회색 옷의 검객이었다. 다 낡아빠진 철검을 어깨에 느슨히 걸치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정작 그 얼굴은 흐릿하게만 인지된다.


[아, 그자는 북방을 주유하던 낭인 검객중 하나였습니다.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군요.]


탁.


회색 옷을 입은 검객이 백연에게서 세걸음 앞에 멈춰섰고.


쩌억.


대기가 갈라졌다. 별안간 휘어져 들어온 낡은 철검이 소년의 귓가를 스쳤다. 찰나지간 몸을 비틀며 전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이미 목을 베였을 일격.


단 일수(一手)로 느꼈다.


‘적어도 구파 일대제자 급의......!’


퉁.


곧장 전진한 백연이 무릎을 튕겨올렸다. 한순간 검권 안쪽을 파고들며 내려치는 낭인의 수도(手刀)를 무릎으로 쳐낸다. 손목을 정확히 박살내는 일격과 함께 여휘가 솟구쳤다. 큰 반원을 그리며 돌아오던 철검이 백연에게 닿기 전이었다. 시린 뇌광이 낭인의 몸을 갈랐고.


파아아아아앙!


그의 신형이 쩍 갈라지더니, 이윽고 먼지처럼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잿더미마냥.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박.


풀잎이 비스듬히 눕는다. 절벽의 능선을 따라 걸어오는 발걸음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난다. 백연의 시야 너머로 끝없이 많은 인영들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 제각기의 복식과 행색을 하고 병장기를 들고 있다. 무감하게 백연을 향해 다가오는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결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수십년간 재료로 사용했던 사람들의 육신. 그것들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다면 그들의 생전 무위를 똑같이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지요. 비록 환상이지만, 베이면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몰려오는 무인들의 기세가 아득하다. 백연은 무인들의 물결을 마주하자마자 생각했다.


‘이기기 어렵다.’


하나 하나의 힘이 직전의 낭인과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이미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다. 물결처럼 밀려오는 저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천마 무연이 선보였던 광역 절초에 가까운 것이 필요할 일이었다.


지금은 안된다.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끝이 아니다. 힘을 전부 소진해서 벗어난다 쳐도 이겨내야 할 것이 많다.


그것을 인지한 백연은 천천히 검끝을 내렸다. 소년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후우.”


상대의 판 위에서 이기기 어렵다면.


그것을 부수면 될 일.


백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등 뒤에서 몰려오는 무인들을 완전히 무시한채로.


[호오. 포기하는 겁니까? 이건 예상치 못한......]


백연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소년의 투명한 눈꺼풀이 자색 별빛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쿵.


가슴께에서 맥동하는 울림이 귓가를 스친다. 더운 숨결이 입가에서 흐른다. 그 모든 감각 속에서 소년은 천린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의 너는, 무엇이지?


‘검귀 유백연은.’


그날 죽었다.


그리고 새로이 되살아났다.


이제 마도 무림을 누비던 검귀는 없다. 검귀가 지키고자 살아가던 이들도 없다. 검귀가 복수하고자 했던 신교의 교주는 빛바랜 잔재가 되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럼에도 소년은 여전히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것이 아닌 기억에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넘을 수 없다.


단순히 무공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일전의 생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기에. 주박처럼 스스로를 무겁게 붙들고 있는 미련을.


‘놓아야만.’


사박.


발걸음이 풀잎을 스쳤다.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수없이 많은 무인들의 기척을 뒤로 하고서. 소년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시린 뇌광이 그 발치를 휘감았다.


비룡축전(飛龍蹴電)의 기파가 백연의 몸을 감쌌다. 어느 순간 눈을 뜬 소년이 단숨에 경공을 펼쳤다. 찰나지간 사방의 풍광이 일그러진다. 태청신공의 뇌기가 몸을 감싸고 휘돌며 소년의 신형을 극도로 가속시킨다.


휘어드는 바람결이 귓가를 스친다. 절벽의 끝자락이 단숨에 큼직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저편에서 결백이 당황한 듯 손을 휘젓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그를 향해 달려드는 무인들.


소년은 발끝을 큼직하게 끌었다. 경공 기파를 휘감은채로 그대로 내리찍는 진각. 소리보다 빠르게 내딛은 한걸음에는 용형보(龍形步)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단숨에 짓쳐드는 검격 사이를 춤추듯이 돌파. 직후 별안간 눈앞에서 그를 향해 떨어지는 거대한 도끼가 눈에 들어온다.


화악.


바람이 백연의 몸을 감싼다. 도끼가 낙하하는 순간, 찢어지는 대기를 타고 소년의 몸이 꽃잎처럼 휘돌았다. 운해비영(雲海飛影)의 기파를 몸에 감은 소년의 발걸음이 땅을 딛지도 않는듯이 나풀거리더니, 삽시간에 가로막은 모든것을 넘어 절벽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백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작별을 고하듯 흐린 미소를 지은 소년은 절벽을 박차며 뛰어내리듯 걸음을 내딛었고.


화아아아아아악!


백연의 일보(一步)가, 허공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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