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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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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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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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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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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흔적(3)

DUMMY

※※※



장삼봉(張三丰).


달리 삼봉 진인(眞人)이라 통칭되는 무인이자 명(明)의 건국 초기 무당파를 세운 무당의 개파조사이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설화가 사실인 양 횡행하는데, 어느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실제로 그의 밝혀진 행적 자체로만도 괴력난신의 것이었던 탓에.


호사가들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논할때 반드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지고한 무인.


허나 동시에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라는 위에 확고히 오르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고금제일을 논하는 천마(天魔) 본인이 같은 시기에 중원 무림을 거닐었던 탓에.


그런이가 남긴 무(武)의 흔적.


보배다. 다른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천하의 보배와 다름없다. 만약 무림인들이 알게 된다면 당금 무림에 혈겁을 일으킬 보고(寶庫)가 몇 있는데, 이곳 또한 그런 장소라 봐도 좋았다.


당장 신강에 갔을 적 천마의 무덤이 있다는 불확실한 정보만으로도 기백에 달하는 무인들과 마교까지 개입해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천하제일을 논한 삼봉 진인의 무흔은 어떠할까.


‘그래서 소문을 들어본적이 없었군.’


공공연히 알려진 내용이었다면 아무리 무당파가 보호하고 있다 해도 위험하다. 욕심에 눈이 가려 머리를 들이미는 무림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을테니까.


같은 이유로 숭산(嵩山)에 있는 달마 선사의 장흔과 면벽동은 과거 수많은 핏물을 흐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림의 압도적인 무력이 그 모든 것들을 무용(無用)하게 만들었다지만.


때문이었다. 백연이 곧바로 선극에게 되물은 것은.


“삼봉 진인께서 남기신 무흔이라 하면 마땅히 천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배 아닙니까? 이것을 어찌 제가 마음대로.”

“보배란 쓸 수 있어야 보배이니라.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자질은 극히 드물고 희귀하다. 무당파에서 이곳을 봉한 이유는 두가지.”


선극이 말했다.


“방금 말했듯, 이곳이 위험한 까닭이 첫째요. 선산(仙山)이 삼봉 진인의 이름만 듣고 눈이 돌아간 무뢰배들의 핏물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 둘째이노라. 오로지 무당의 보배로써 간직하기 위해 봉한 것이 아니다.”


즉, 애초에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


선극이 말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백연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자질이 된다면 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무당파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렇군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운해를 눈에 담으면서였다. 휘도는 바람결에 선선한 기운이 실려 올라오는데,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하겠느냐? 네게도 위험할지 모른다.”

“선극께서는 이곳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그렇다. 허나 노부가 이곳에서 얻은 것은 하나 뿐이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모자란지 깨닫는 것이었지.”


백연이 옅은 헛웃음을 삼켰다.


선극이 그리 말할 정도라. 무엇이 자리하고 있길래.


“삼봉 진인께서 남기신 영성이라도 서린겁니까?”

“그러했다면 네게 보여주지 못했을거다. 이곳에 남아 있는건 말 그대로 무흔 뿐이다. 숭산에 남아있는 달마의 장흔처럼.”


무의 흔적.


많은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검흔이나 장흔이 될 수도 있고, 보법이 새겨진 발자국이나 마구잡이로 짓이겨진 자국일지도 모른다. 허나 무인이 남긴 무공의 흔적은 대저 그의 삶과 무학의 방식을 담고 있기 마련.


뛰어난 무인들은 무공의 흔적만 보고도 그것을 남긴 자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추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강 무덤에 남아있던 검귀의 검흔처럼.


‘지금의 내가 봐도 될까.’


백연은 생각했다.


어쩌면, 감당하지 못할 상승의 절학에 상단전이 짓이겨질 수도 있는 탓이다. 이해를 벗어난 무학은 그 자체로써 심마(心魔)로 작용하기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할 가치가 있는가.


‘......당연한거 아닌가?’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두번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 이 자리에서 무엇이든 얻어가야 한다.


“그 무흔이라는 것이 이 아래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럼 바로 가면 되겠군요.”


태연한 백연의 말에 선극이 미소를 지었다.


“거침이 없구나. 좋다. 허나 네가 무흔을 보기로 결정했으니 가기 전에 한가지를 배워야 하겠다.”

“무엇을 말입니까? 혹 무공의 전수는......”

“이곳에서 네가 입마에 들지 않기 위해 마음에 담아둬야 하는 것이다.”


선극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사방의 자연지기가 일제히 일어났다. 긴 꿈에서 깨어나듯이. 본래 항시 사방을 채우고 도는 기운이 맥동하며 흐른다. 한순간 전부 노인의 손끝을 향해 몰려드는 양 휘어지는데, 그 범위가 막대했다.


‘체내의 내공 진기를 이용하지 않고......’


눈앞의 노인. 몸의 진기를 한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막대한 자연지기를 손아귀에 쥐고 움직이게 만든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행위였다.


“무공이 아니니라. 모든 무학의 뼈대로 삼을 수 있는 묘리일 뿐.”


선극이 말했다.


“천하 만물을 아우르는, 태허(太虛)의 의념을 네게 알려주마.”



※※※



소년의 걸음이 희끄무레한 운무를 스쳤다.


구름 아래였다.


예상과는 달리 밑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나 다를바 없었다. 무인이 아니라면 쉬이 움직이는 것 조차 불가능할 만큼.


“허. 본인들은 제운종이 있다 이거지?”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는 백연이 입술을 비죽였다. 수직적인 움직임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바가 없는 제운종이라면 쉬이 오갈법도 했다. 물론 그는 온몸을 비틀어가며 내려가야 했지만.


“올라올때는......그때 가서 생각하자.”


선극은 없었다.


태허의 묘리를 일장 연설로써 가르쳐준 뒤, 손짓 한번으로 구름의 일부를 걷어냈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것도 길의 초입만을 드러내준 것이었다.


덕분에 백연은 간만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아직 유성과 전력을 다해 붙은지가 채 몇시진이 지나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몸에 남은 내공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이러다 무흔은 커녕 바닥에 가기 전에 죽겠......으앗!”


타다닥.


소년의 걸음이 벽면을 빠르게 박찼다. 한순간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밑으로 낙하한 백연이 그대로 구르듯 튀어나온 바위틈에 착지했다.


직후 그가 직전까지 딛고 있던 돌틈이 흐릿한 안개 사이로 파스스 부서져 떨어져 내리는 것도 한순간.


“......위험하다는 이유가 혹시?”


굳이 진법으로 봉인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목숨걸고 여기를 내려온다고.


“운무에 가려서 앞도 잘 안보이는데, 헛디디면 어디까지 떨어질지 궁금한데.”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내려가기를 한참.


타악.


마침내 가죽신이 땅바닥에 닿았다. 깊게 숨을 뱉은 백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음.”


백연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약간은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였다.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안개가 문제였다. 자욱한 운무가 봉우리로 둘러쌓인 절벽 전체에 뒤덮여 있다. 비단 윗쪽만 그런것이 아니라, 바닥까지도 구름과 안개의 벽이 빈틈없이 형성되어 있다.


자연스레 시야의 폭이 좁아진다. 한치 앞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적인건 아닌데.’


스윽.


소년이 손을 뻗는 순간 흩어진 안개가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서늘한 공기를 타고 휘도는 희끄무레한 벽은 한없이 두터웠다. 결코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없는 수준이다.


둘 중 하나라고 봐야 옳았다.


무당파에서 펼친 거대한 진법의 범위가 절벽 아래까지 포함하고 있거나.


아니라면 이 자리에 무(武)를 새긴 절대고수의 위세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거나.


‘이것부터가 전부 삼봉의 흔적일지도.’


백연은 생각했다. 진실로 그렇다면 이미 인외의 존재라 상정해야겠다고.


“우선은 좀 둘러볼까.”


시간은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웅웅 울어대던 것을 멈춘 허리춤의 검파에 손을 올리고서였다.


방향은 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죽신의 앞코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각이 흐려진 까닭이었다.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선극이 말한 것을 생각해볼 시간도 필요했다. 백연은 흐린 안개 속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노인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태허라.”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동시에 명확하기도 했다. 무당파 무공의 요체가 향하는 곳. 과거 삼봉 진인은 천하 만물의 자연지기를 단전삼아 가장 지고한 무공을 펼쳤다고.


그것이 곧 태허의 의념이 깃드는 방향이라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어야만 삼청의 길에 오를 수 있다고. 선극은 그리 말했다.


‘헌데 이것이 왜 필요하지?’


의문이었다.


선극의 말을 통해 백연은 몇가지를 이해했다. 우선 그가 느낀 비어있다는 감각이 태허의 의념 때문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당파의 무학이 경지에 이르면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정확히는 체내 내공을 자연지기에 동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였는데, 그를 통해 본래 다룰 수 있는 힘보다 수십배는 거대한 진기를 움직일 수 있다. 어찌보면 풍백의 풍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 이 자리에서 필요한지는 모른다. 선극은 그저 무흔을 견식하는 것에 태허의 의념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뿐이니까.


“자세히 말해주면 좀 덧나나.”


백연이 한숨을 뱉었다.


초월자들은 쓸데없이 선문답을 좋아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리 아무렇게나 걸음을 옮기기를 잠깐.


“음?”


문득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소리가......”


기묘한 울림이 어느 순간부터 귓가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꼭 휘파람 같기도 하고, 투명하고 맑은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허공을 따라 느릿하게 울리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미세한 소리였다. 사방을 뒤덮은 안개는 여전히 끝을 모르게 두터웠음에도 그 사이를 뚫고 흐르는 울림.


“대체 어디서......”


백연이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뒤편으로 흘깃 떨어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백색 검집에 담긴 낡은 검이었다.


천마의 검.


흐릿한 검명을 흘리고 있다. 사방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에 공명하듯이.


“어째서?”


백연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검을 풀어 들어올렸다. 검집 너머로 전해져 오는 맑은 떨림이 손끝에 느껴졌다.


홀로 울어댄다. 정녕 신검이라도 되는 것인가.


이유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연은 검파를 쥐었다. 이 울림이 그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직후 소년이 가볍게 힘을 주어 검을 잡아당겼고.


스릉.


한없이 투명한 백색의 검신이 운무 사이로 뽑혀나왔다.


“......이게.”


한순간 시선을 앗아간다. 사방에 들려오는 울림에 집중하고 있던 백연조차 잠시 정신을 놓고 검을 바라보게 만들만큼.


투명한 백색 검신이었다. 어찌 그런 빛깔을 만들어냈나 궁금할 정도였다. 동녘 나라의 우윳빛 자기(瓷器)가 이런 색을 낼까. 순백의 눈과 같은 색이던 운룡검과도 달랐다.


외려 곱게 빚어놓은 도자기 같은 느낌.


허나 동시에 흐린 빛이 깃들어 있다. 검을 기울일때마다 검신을 타고 물결처럼 흐린 백자색(白紫色) 이채가 스치는데, 무슨 원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안개 속에는 햇빛도 깃들지 못하고 있거늘.


그것조차 신검의 모습이라 할법 했다.


한편 흐릿하게 울어대던 검명은 점차 짙어졌는데, 검집에서 뽑혀나온 까닭인듯 했다. 처음에는 기감 끝자락에만 잡히던 것이 이제는 귀에 선명하게 들린다. 허공에 춤추는 듯 흘러나오는 음색이 다채롭다.


백연은 왠지 모르게 그것이 가락처럼 느껴졌다.


주루의 가희(歌姬)가 곡조를 뜯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와 동시였다. 방향을 알 수 없게 사방을 가득 채우던 울림이 돌연 한쪽에서만 또렷해진다.


그것을 인지한 백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왜 천마의 검이 이곳에서 공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귀에 들리는 울림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선극이 이것을 의도하고 그에게 검을 주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아마 아니겠지.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


그렇게 소년은 검을 들고 운무를 헤쳐나가며 걸었고.


어느 순간-


화아아아아악!


“안개가......!”


한순간이었다. 시야가 반으로 갈라지며 지금껏 사방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흩어진다. 동시에 눈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없이 드높은 절벽이었다.


깎아지른듯 드높은데, 그 벽을 따라 알 수 없는 줄기와 풀들이 군데군데 자라며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신비로운 풍광이었다.


그 너머로 무언가 짙은 흔적이 새겨져 있는 듯 하기도 했는데, 백연은 부러 시선을 돌렸다. 직후 소년의 눈이 그 절벽 아래를 향했다.


그가 걷고 있던 방향.


절벽의 바로 아래.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길쭉하게 드리운 가지 위로 움트는 꽃망울들이 눈에 보였다. 목을 꺾어 올려야 끝이 보일 정도로 거대했는데,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소년의 눈을 더 잡아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무의 아래였다. 회색빛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물건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눈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왠 다탁이......?”


백연이 의아한 목소리를 뱉었다.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참으로 정석적인 생김새였다. 위에 찻물이 담긴 잔을 두어개 올려놓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크기. 낮은 높이와 평평하게 다듬어진 모습까지.


백연은 천천히 다탁을 향해 다가갔다. 검을 쥔 소년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이건.”


돌로 된 다탁의 위, 희미하게 새겨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누가 검끝으로 긁어낸 흔적같기도 했고, 붓으로 써내린 것 같기도 했다.


허나 어떤 것이든 상관 없었다. 다탁에 새겨진 글자의 의미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기에.


“겨울에 피어난 꽃은 꿈을 허로 삼고.”


[두번 부서진 하늘은 흐린 새벽에 잠드노니.]


천마에 대해 삼봉 진인이 직접 논한 이야기. 허나 이어지는 구절이 묘하게 달랐다.


“흩어진 연(緣)이 이 자리에 닿으면......”


[오랜 이야기를 그러모아 잔에 담으리라.]


네 줄의 어구.


앞의 둘은 백연이 아는 것이었으나, 뒤의 둘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본래 이어지는 내용은 다른 것이다. 그 또한 잘 아는 바로써 태조를 배신한 천마를 책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정상일 것인데.


“대체.”


소년이 중얼거렸다. 허나 백연의 시선은 그 어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바로 눈 앞에 또다른 것이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하나의 글자였다. 큼직하게 벽면을 따라 새겨져 있는 모양. 그 형태는 한없이 익숙했음에도, 동시에 한없이 이질적이었다.


“허(虛).”


절벽의 한중간을 따라 떨어지는 필체가 묵직했다. 거인이 붓을 들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듯도 했다.


그 글자를 이루는 획(劃) 자체가 곧 수천개의 변화를 지닌 하나의 고절한 무학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잠시.


투둑.


소년의 발치를 따라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뜨끈한 감각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솟았다.


“이런......”


그와 함께 머리 한중간의 백회를 따라 작열하는 듯한 통증이 내리꽂혔다. 한순간에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불타는 듯 시야가 이지러진다. 곧바로 깨달았다. 알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삼봉의 무흔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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