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마음(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아침이 되자 다피나는 째는 듯한 두통과 쥐어짜는 듯한 복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습관적으로 산디아를 부르려던 그녀는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밖은 환했다. 설마 잠시 졸았던가 싶었으나, 이윽고 뒤죽박죽으로 섞인 어젯밤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훌쩍거리며 울었던 거라든가, 메칼로에게 화를 냈던 거라든가, 산디아의 당황한 얼굴이나 기사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들이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떠올랐다가 툭툭 터졌다. 기억 하나가 터질 때마다 다피나의 심장이 요동쳤다.
‘내가 도대체 어젯밤에 무엇을 한 것이냐!’
다피나는 혼란에 빠져서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왜 울었지? 왜 메칼로에게 화를 냈지? 산디아는 또 왜 놀란 것이며 기사들은 어째서······.’
흙탕물 같은 머릿속을 뒤지는 다피아의 방으로 인기척과 함께 메칼로가 들어왔다. 손에는 술병 하나와 잔이 들려 있었다. 술병을 보는 순간 다피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맞다. 어젯밤 산디아 모르게 반자를 마셨었지. 그리고······.’
“안색이 형편없군. 두통과 복통이 있을 테고.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나?”
메칼로가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은 다피나의 머릿속에서는 어젯밤의 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거라든가, 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었던 거나, 그때 했던 말······.
다피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통이 심해서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기절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타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한 순간 메칼로가 피식 웃는 것을 보고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했다. 세 걸음 정도.
그녀는 잠시 마음속으로 마음을 읽는 메칼로의 각인자 따위는 정말 싫다고 불평했으나 그 생각마저도 읽었을 거라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놀로파의 사제가 약재를 보내기로 했지만, 약을 가져와도 마시지 말고 화분에나 줘버려. 이쪽이 더 효과가 있을 거다. 식전에 반 잔 정도만 마셔.”
메칼로는 말한 다음 직접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그가 내민 잔에서 과일과 쌉싸래한 향이 섞여 풍겼다.
“이것은 무엇이냐.”
“뭐가 들어갔는지는 나도 모르지. 마엘이 만든 거니까. 효과는 확실해. 경험자의 말이다.”
“경험자······?”
다피나가 새삼 메칼로를 올려다보았다. 메칼로는 찡그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반자 때문에 고생한 경험으로는 내가 훨씬 선배일 거다.”
다피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네가 술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노라. 테리아 전사들은 태어날 때부터 젖 대신 술을 마신다고······ 물론 사실은 아니겠으나.”
메칼로가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다른 녀석들도 너만큼만 잘 속아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실례로다. 나라도 아기가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노라.”
다피나가 발끈 대꾸했다.
메칼로가 준 음료는 달고 부드러웠다. 효과도 좋아서, 쑤셔대는 것 같던 복통이 금세 가라앉았고 잠시 후에는 두통도 조금씩 나아갔다.
“오오, 정말 약효가 뛰어나구나. 이런 약이 있으면 진작 알려주지 그랬느냐. 그랬으면······.”
다피나는 말하다 멈칫 입을 다물고 메칼로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마음속을 읽었겠지.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았겠지. 그래도 혹시 못 듣고 지나가지는 않았을까. 그녀의 헛된 희망은 곧바로 깨졌다. 메칼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랬으면 무리하게 마시지 않고 적당히 환각상태가 될 때까지만 마셔서 여러 번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에잇, 뒤로 세 걸음 물러나라, 메칼로.”
다피나가 약 오른 얼굴로 명령했다. 메칼로는 반대로 앞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바로 앞까지 와서 침대를 짚으며 다피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반자를 입에 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다피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테리아에 있는 이상 사교상, 어,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도 있지 않으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가급적 피해. 반자에 관한 경험은 내가 훨씬 많다고 말했잖나. 반자는 적당히 마시면 두려움을 잊고 고통을 덜 느끼게 만들어서 테리아 인 용병들도 자주 이용한다. 하지만 중독성이 강해 한 번 잘못 발을 들이면 여간해서는 헤어나지 못해.”
“아, 알았으니 저리 가거라. 세······ 네 걸음 물러나라. 아니, 더 볼일이 없으면 이제 나가거라.”
다피나가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기며 명령했다. 메칼로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가 방을 나서다 말고 문득 멈춰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상상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걱정 마.”
“메칼로!”
다피나의 비명 같은 외침을 들으며 메칼로는 방을 나갔다. 그가 공주의 방에서 나오자 산디아가 기다리고 있다 다가왔다. 공주를 적당히 놀려대라는 잔소리라도 들을까 생각했지만 다른 용건이었다.
“안토니오 님이 미노도라에 오셨습니다.”
메칼로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그 영감이 왜?”
“이곳에 남겨둘 필요 없는 인원을 영지로 돌려보냈더니 그들을 만나고 곧장 떠나신 모양입니다. 토비아스가 먼저 뵈었는데 메칼로 님이 들으실 이야기가 있답니다.”
산디아의 말에 메칼로는 별 수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오는 육십을 훌쩍 넘은 노인으로 지금은 메칼로의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테리아는 물론 클레타까지 알려진 전사였고 한 때는 헬리온 클라우스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떠돌았던 그는 가정을 꾸리지 않고 노년을 대비하지도 않아 빈손에 홀몸인 채 테리아로 돌아왔다. 한동안 왕성에서 근무하다가 메칼로가 아르반에서 돌아오자 헬리온으로부터 왕자의 교육을 명령받았다.
명목은 교육이었으나 메칼로 측에서는 감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노도라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나 클레타의 전장까지 따라다니며 환영받지 않는 스승 노릇을 했을 리 없다.
성격도 꼬장꼬장하고 불같은 데가 있어서 메칼로의 부하들 대부분은 그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했다. 예외가 있다면 산디아 정도였다.
안토니오는 왕성에 마련된 메칼로의 숙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비아스 외에도 몇 명의 부하들이 함께 있다가 메칼로를 보자 화색이 돌아서 반겼다. 그가 없는 동안 안토니오에게 꾸지람이라도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메칼로를 보자 안부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용건으로 들어갔다. 안토니오가 짧게 말하면 토비아스가 보충 설명을 하는 식으로 그들이 알린 내용은 메칼로가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오비디온 가문이 왜?”
“그 마을이 오비디온 가문의 영지와 접해 있고 우리 쪽 성채에서도 먼 곳이라 건드리기 편해서겠지요. 우리는 그런 작은 마을까지 병사들을 상주시킬 형편이 아니니 마을을 버리거나 오비디온 가문과 협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을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영지민의 의무를 다해 왔으니 마땅히 영주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게지.”
토비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토니오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대꾸했다. 그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메칼로는 찌푸린 낯을 펼 수 없었다.
안토니오를 쉬라는 핑계로 내보낸 다음 그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일 테니 오비디온 가문이 쉽게 협상 같은 것을 해줄 리도 없잖아. 하필 이런 때에.”
“그래서 아르반에 있을 때 말씀드렸잖습니까. 올해 안으로 안 돌아오는 게 좋을 거라고요.”
토비아스가 심술궂게 말했다.
“협상할 수 있겠어?”
메칼로가 짜증을 눌러 참으며 토비아스에게 물었다.
“안 될 겁니다. 그쪽에서 뭘 요구하든 메칼로 님이 들어주기 힘든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협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을에서 이미 희생자가 생겼거든요. 마을의 아낙 하나가 들에서 강간당한 다음 죽고, 같이 있던 딸도 반죽음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아이가 오비디온 가의 문장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따라서 우리는 값을 받으러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토비아스가 말하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관습에 따라 영주인 메칼로 님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가셔야 하겠지만요. 기껏 날짜를 줄여서 돌아왔더니 어쩐지 우리가 미노도라를 떠날 핑계만 계속해 생기는 것 같군요. 지금으로서는 값을 받는다는 핑계로 오비디온 가문과 피를 보는 편이 가장 빠르고 쉽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토비아스의 목소리에 냉소가 섞여 있었다.
“다른 가문들의 움직임에 변화는?”
“당장 뭘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인력을 다 풀어놓았지만 우리 쪽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니까요. 아르반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모두 팔기 전까지는 자금도 별로 넉넉하지 않습니다.”
“시기가 지나치게 맞아떨어지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헬리온 클라우스와 오비디온이 연합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테리아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가능성보다 낮습니다. 혹은······.”
토비아스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지나치게 멀리까지 갔습니다. 아무튼 결정은 빨리 내려주십시오. 다들 피해 다니기 바빠서 안토니오 님의 상대는 제가 해드리는 중이거든요. 이대로 가다가는 저에게 검술이라도 가르치려고 하실지 모릅니다. 펜보다 가벼운 칼이 있어도 저는 무리입니다.”
토비아스의 엄살을 듣기 전에 이미 메칼로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토비아스, 그 일은 스텔리안에게 맡겨. 마을로 보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라고 해.”
“예?”
그 말은 토비아스조차 뜻밖이었는지 혈색 없는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배에 죽치고 있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왜? 거절할 것 같나?”
“물론 아닙니다. 메칼로 님이 명령하시면 어떻게든 해내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됐어.”
빠르게 결정내린 메칼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비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메칼로는 그와 헤어져 꽤 멀어진 후에야 문득 중얼거렸다.
“당연하잖아.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니까.”
그의 말은 토비아스의 마음속 생각에 대한 그의 늦은 대꾸였다.
- 작가의말
금요일 분량입니다. (이 말을 언제쯤 안 쓰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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