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의 정체
뒤이어 다른 제자들이 준비해 놓은 마지막 송별연을 치르게 되었다. 노식도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체면치레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모두가 즐거워했다. 척준경 또한 따라주는 술을 기꺼이 받아 마셨고, 앞장서 시문을 읊고 즐겼다. 본래 시문이나, 글에 관해서는 까막눈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이곳에 넘어오면서 뭐가 달라진 건지 머릿속에 절로 시구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자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들, 즉 노식의 가르침을 받았던 게 허투루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밤을 보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어차피 아쉬움에 더 있어봐야 시간만 갈 뿐이고, 다들 집이 멀어 새벽부터 고향에서 보낸 사람들로 주변이 북적거렸다.
모두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세 사람은 어차피 갈림길까지는 같이 가야 하는지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주 걸었다. 마침 땅만 바라보고 걷던 유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두 사람과 만난 것은 하늘의 연이오,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그건 이 못난 형도 마찬가지일세."
"저라고 다를 게 있겠습니까. 현덕이나 백규 형님을 만나서 그간 참으로 즐거운 일만 겪었습니다."
세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흘리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고는 하나, 그들은 이미 헤어짐이 주는 독한 술 한 잔에 너끈하게 취한 뒤였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 나갔을까.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 척준경과 유비, 공손찬이 나란히 서 있었다. 유비는 그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헤어짐이 아쉬워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아직 서로 먹먹한 마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만,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길엔 그윽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어찌나 마음이 절절한지 그를 바라보는 공손찬과 척준경의 눈가도 붉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척준경은 곧 민망함에 고개를 저어야 했다.
‘이런 망할. 어차피 나는 유비를 따라갈 것이 아닌가. 뭘 아쉽다고 눈물을 흘리는 겐지.’
어차피 자신은 유비를 따라 길을 나설 것이었다. 다만 아직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적당히 그를 따라가다가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하면, 분명 유비는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장비와 관우, 두 사람과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셈이었다. 주변에선 당장 낙양으로 올라갈 채비를 마치라고 했지만, 어차피 연고도 없고, 홀로 떨어진 그에게 있어선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뚱딴지같은 말들을 듣느니 그냥 따라가고 싶은 사람 따라가는 게 낫지. 그가 먹먹한 가슴을 내치며 진정하려 할 때,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척준경은 있는가! 척준경!”
“......뭐지?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없긴 왜 없어. 이놈아! 누님께서 들으시면 경을 치실 거다!”
“누, 누님이요?”
“자네. 아무리 억지로 글공부를 하러 왔다고는 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네. 그래도 낙양에서는 이름 꽤나 알리신 분이 아니신가.”
“허. 참.”
하지만 당초 유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척준경의 움직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 의해 크게 어그러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누님은 또 뭐고, 낙양은 또 웬 말인가. 척준경이 알기로 그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인데, 여기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두 사람 다 진중한 표정이었고, 멀리서 달려오는 자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척준경은 바짝바짝 타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막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거칠게 풀어헤친 머리, 청색 비단으로 짠 하의에, 붉은 비단으로 짠 상의가 아무리 봐도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주는 자였다. 그는 척준경을 보곤 피식 웃었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큰 일이 날 뻔 했소.”
“무슨 소리요.”
“딱 보니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게, 분명 이 두 분 중 한 분을 따라가실 요량이셨을 테지.”
“......!”
“하하. 말이 없으신 걸 보니 정곡을 찔리신 게로구려? 걱정 마시오. 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어차피 낙양 땅에선 이 아만의 눈을 피해갈 게 없다, 이 말이요.”
“아만?”
“아아. 그건 예명이요. 12살 때까지 쓰다 보니 입에 익어서. 반갑수다. 난 그쪽 누님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조조, 자는 맹덕이라 하오.”
“조조!”
척준경은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조조라니. 훗날 원소와 자웅을 겨루는 것도 모자라, 왕을 끼고 유비와 대적하는 진정한 호걸이 아니던가. 삼국지연의에선 그를 무조건적으로 악한 인물로 봤지만, 적어도 척준경에겐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그가 일으킨 적벽 대전은 승패 여부를 떠나, 척준경에겐 너무나도 짜릿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뜨악한 공손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봐. 준경. 아는 사람인가?”
“예? 아. 누님께 말씀 정도는 들었습니다.”
“하하.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닙니다. 뭐. 절 따르는 놈들이 몇 놈 있긴 하지만, 아직 효렴의 작위밖에 받지 못했으니 그저 심부름이나 하기 딱 좋은 놈이지요. 그 쪽의 두 분은 처음 뵙겠소. 방금 말했지만 조조, 자는 맹덕이라 하오.”
“아. 나는 공손찬, 자는 백규요.”
“저는 유비, 자는 현덕입니다.”
척준경은 세 사람의 만남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과거 삼국을 나눠가질 패자들의 첫 대면. 특히 유비와 조조가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척준경에겐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어차피 다들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조조가 다시 척준경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자. 어서 가십시다. 누님께서 기다리시오.”
“......알겠소. 그렇게 하지.”
“고분고분하니 좋네. 겨우 이 조 효렴의 위신이 좀 서겠소. 요새 계속 밥만 축냈거든. 하하하.”
넉살좋은 조조의 말에 척준경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후에 그가 보여줄 카리스마나 날카로운 성격은 여기선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공손찬과 유비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조조를 따라 그 ‘누님’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루 빨리 낙양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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