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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 듀라미스 작가, 북풍광입니다.

척준경, 삼국지에 빠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3.27 19:44
최근연재일 :
2014.04.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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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03

작성
14.03.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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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서장 - 유비를 만나다

DUMMY

그것은 희평熹平 5년 9월, 후한도 끝나가는 영제靈帝 때의 일이었다. 역수易水 가의 작은 초당草堂에선 스승과 제자들 간의 마지막 수업이 한창이었다. 물론 아직 노식의 입에선 이별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척준경은 알고 있었다. 이제 유비와 공손찬에게 당부를 마친 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임을. 척준경의 황망한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이냐. 대체 여기가 어디야.’


분명 인조의 명을 받들어 이자겸을 척살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그 요망한 자의 목을 자신의 주군에게 바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것인가. 그리고 삼국지의 세계관을 쏙 빼닮은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유비가, 유비가 바로 옆에 앉아 있다니.’


그것은 당대에 고려를 휩쓸던 영웅으로서,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대면했던 영웅과의 만남이 순수하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옆에 있을 뿐인데, 입이 바싹 마른다. 단지 힘으로만 고려를 호령한 척준경에겐, 그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유비가 마치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책장이 넘어간다. 따라서 책장을 넘겨야 하는데 쉬이 손이 뻗어지질 않았다. 마치 온몸이 굳은 것 마냥. 천하의 척준경이 이게 무슨 꼴인가. 자신을 아무리 자책해도 손은 멈춰있다. 그 때, 옆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아프면 말을 하면 될 것을......”

“유, 유비!”

“잠시 쉬도록 하게. 스승님껜 내가 말씀 드리겠네.”

“어째서 내, 내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어째서라니. 지금까지 같이 수학受學하며 지낸 친우에게 민망스럽게 존대는 또 무엇인가.”


유비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하려던 척준경은 고개를 저었다. 혀가 굳었다. 임금을 만나도 굳지 않았던 혀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다보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유비의 조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안 그래도 이쪽을 흘끔거리던 노식이 입을 열었다.


“유비! 무슨 일이냐.”

“척준경의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다소 외람된 말씀이지만, 더 나빠지기 전에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누워있는 게 어떨까 하여......”

“음. 의외로군. 마지막 수업이라 꼭 들었으면 했는데. 준경은 나가 있으라.”

“예? 아. 예.”

“푹 쉬게.”


유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척준경은 멍한 눈을 들어,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작은 초당이었기에 조금만 걸음을 걸어도 금방 따뜻한 햇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는다. 방금 전까진 심하게 떨리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진정이 된다. 그래. 그는 고려의 척준경. 검 한 자루로 적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기던 고려 최고의 무신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활약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닌가.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유비가 노식의 문하에 있을 때라면 이제 막 태평도의 무리들이 들고 일어설 때. 그야말로 사방에서 의병들이 빗발치기 시작할 때다. 늙어가면서 검을 휘두를 일이 줄어들어 상심한 그에겐 딱 맞는 시대였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나이가 어려졌다.’


아침에 세수를 하기 위해 들른 역수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아닌, 이제 막 약관이 지난 20세의 척준경이 들어 있었다. 외견뿐만 아니라 무겁던 몸이 훨씬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았다. 당장 시대의 영웅이 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척준경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역수의 비릿한 강 냄새가 코로 스며든다. 기분이 한결 개운해 졌다.


‘유비와 공손찬이라.’


삼국지의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다. 글을 읽기 싫어하던 그가 밤을 새워 읽었던 게 바로 이자겸이 구해다 준 삼국지였다. 호기심에 들떠본 이래, 몇 십 년을 삼국지를 손에 들고 놓지 않았다. 이제 노식이 유비와 공손찬에게 각기 다짐을 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떠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유비를 따라가려면, 수업을 마치고 노식과 유비가 만나는 장소에 찾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마침 낯이 익은 사람이 척준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보게. 준경. 사부님께서 찾으시네.”

“사부님께서? 대체 무슨 일로?”

“모르겠어. 현덕과 백규도 이미 따로 부르셨네. 아무래도 세 사람을 가장 예뻐하셨으니, 따로 전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겠지.”

“허......”

“안 갈 텐가?”

“아니. 아닐세. 지금 당장 들어가지.”

“그래. 현덕의 얘긴 들었네. 아무쪼록 몸이 힘들겠지만 사부님의 마지막 말씀은 듣고 가도록 해.”

“......알겠네.”

“우리는 향기로운 술과 시문을 논할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하겠네. 이야기가 다 끝나면 마지막을 함께 함세.”

“그래. 그렇게 하지.”


척준경은 고개를 끄덕이곤, 총총걸음으로 떠나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기억이 없는 상태로 노식의 문하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같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모두가 자신을 알고 있다. 게다가 유비와 공손찬에게만 특별한 가르침을 내렸던 그 때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니. 아무래도 노식의 눈도장을 찍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척준경은 조심스럽게 작은 미닫이 문을 열어 젖혔다.


“어서 오너라.”

“준경! 몸은 좀 괜찮은가?”

“아. 예. 괜찮습니다.”


척준경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근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발성성한 이 노인이 아무래도 노식인 듯 했고, 그 옆에 있는 대장부답게 생긴 자가 공손찬, 마지막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자가 유비였다. 첫눈에 상대방을 압도할 만큼 위엄 있는 풍채, 풍채와 딱 어울릴 만큼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가히 한눈에 봐도 영웅의 상을 지닌 자였다. 유비와는 다른 의미의 카리스마를 전신으로 뿜어내는 자다. 지금껏 글로만 얼굴을 봐 왔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하면서도 재미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삼국지라는 거대한 연극 속에 등장인물로 잠깐 출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공손찬과 유비 사이에 앉자, 노식은 한 손으로 수염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자. 준경까지 왔으니 이야기를 매듭짓도록 하자꾸나.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남쪽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킨 탓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여강 태수로 가게 되었다. 하여 다른 건 아쉽지 않으나 배움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 제자들이 자꾸 발목을 붙잡는구나. 허나 이미 저들은 다 제각기 살 길이 있음이요, 걱정할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재능이 특출한 너희들이 이대로 스러질까 안타까워 따로 부른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 이 백규의 심금을 울리옵니다. 스승님.”

“솔직히 이대로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허허. 나도 그렇다. 설마 태평도보다 먼저 남쪽 오랑캐들이 난리를 칠 줄은 몰랐구나.”

“아무래도 저희를 부르신 것이 단지 그 뿐만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만......”

‘아.’


유비의 말에 작고 깔끔한 방 안에 공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유비를 슬쩍 바라보고 고개를 돌린 공손찬과는 다르게 준경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공손찬의 대응은 책자와 달랐다. 하지만 유비는 책에 적힌 내용과 똑같은 대화를 읊고 있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노식의 표정을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노식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애제자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런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막상 느긋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책과 달리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안에서 책의 내용을 바로바로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식은 잠시 자신들을 바라본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요즘 항간에 떠돌고 있는 참요讖謠를 알고 있느냐.”

“참요라,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이 참요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지요?”

“과연 준경이로구나. 그래 대체 그게 무슨 뜻이겠느냐?”

“푸른 하늘은 아마 뱀이 아니겠사옵니까. 지난 건녕 2년 온덕전에 떨어져 군신을 놀라게 한 그것에 빗댄 말이겠지요. 천하가 뒤집히는 해로 갑자년을 잡은 것은 이제 제놈들의 뜻을 펼칠 때가 몇 해 남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더욱이 저 태평도의 무리들은 특별히 누른 빛깔을 숭상하니 아마도 참요의 누른 하늘은 저들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다고 봐야 좋을 것입니다.”

“내 뜻이 너와 같다.”


노식의 말에 유비와 공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준경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삼국지라면 이미 고려 땅에 나와 있는 필사본은 전부 읽었다. 나중엔 거금을 주고서라도 가문이 소유한 것을 강제로 빼앗아 오질 않았던가. 당시 이렇다 할 즐길 거리가 없었던 척준경에게 삼국지는 그야말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자, 온갖 영웅들이 자웅을 펼치는 대결의 장이었다. 하여 온갖 삼국지를 전부 섭렵한 그에게 이와 같이 뻔히 보이는 질문은 너무나 쉬운 셈이었다. 방금 전 유비를 바라보던 눈길로 준경을 본 노식은 이내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셋은 책 읽기를 즐기지 않아 경전의 장구에 밝지 못하고, 시사詩思에 빠져 문장을 곱게 다듬지도 않았다. 배우는 자로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일이나 내가 너희들을 크게 꾸짖지 않은 것은, 그래도 큰 줄기는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절 또한 장부가 시문이나 읊고 무릎을 칠 때가 아닌지라, 큰마음으로 봐 준 것이다.”

“예. 스승님.”

“나는 백규의 씩씩하고 굳건한 기개와, 현덕의 부드러우면서도 사람을 이끄는 힘, 마지막으로 준경의 거칠 것이 없고 자신이 생각한 정의를 위해 휘두르는 사상이 곧 이 난세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너희 셋은 앞으로도 서로 보기를 친형제처럼 하여, 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공손찬과 척준경이 시원스럽게 대꾸했지만, 유비는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이내 겁먹은 듯 더듬거리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비는 아직 스승님의 문하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견식이 얕고, 배움이 없습니다. 본래 천성이 게으르고 모자란 놈인지라, 스승님의 곁을 벗어나면 홀로 깨우칠 재간이 없으니 그저 앞이 아득할 뿐이옵니다......”

“허허.”


유비의 말에 노식은 길게 장탄식을 남겼다. 있는 힘껏 자신을 낮추면서도 정작 필요한 말은 상대가 하게 만드는 힘. 척준경이나 공손찬에게선 죽었다 깨나도 나올 수 없는 힘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말임에도 유비가 전혀 미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가지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드는 것이었다. 사실 노식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비는 이제 열일곱. 아직 한참 더 채우고 다듬을 나이였다. 낙양에 뒷배경을 둔 척준경이나, 든든한 장인을 가진 공손찬과는 그 배경조차도 너무 다르다. 이제 자신이 손을 놓으면 이 아이는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신세란 말이다. 노식은 유비를 바라보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여강을 소란스럽게 할 오랑캐를 토벌하는 일에 너무 마음이 빼앗긴 것 같구나. 그래. 아직 네 나이가 많이 어리니, 좀 더 배움을 채워야 할 필요는 있겠지. 내가 알기로 지난날에 나와 함께 수학受學한 장강성이 아직 수백 문도와 함께 향리에 있다고 들었다. 길이 멀지만 네가 굳이 배우기를 원한다면 추천하는 글을 써 주겠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스, 스승님. 저도 어떻게 추천서를 좀 써주시면......”


유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척척 해주는 것도 모자라, 뒷날 학문만으로도 벼슬을 사사받은 정현을 소개해 주겠다니 공손찬도 몸이 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식은 고개를 굳게 저어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문중에 든 지가 오래니, 그만 제 갈 길을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정리가 되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에게 구배지례를 올렸다. 노식은 그것을 스승된 자의 도리로 흐뭇하게 바라보았으니, 바야흐로 차후 중국을 집어삼킬 거대한 세 명의 세력의 발판을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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