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wow (5)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다음 소설 내용에서 등장하는 인물, 배경, 단체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써 현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미리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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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임우영이냐?’
“응, 나다. 연승 축하한다.”
‘뭐, 연승은 이어가긴 했는데······ 오늘 10승 못한 거는 좀 아쉽네.’
입으로는 아쉽다고 언급을 하고 있었지만 조승탁의 목소리에서는 그다지 아쉬운 기색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9회 말에 마무리 송승학을 무너뜨리며 얻어낸 끝내기 승리였기에 선수단이 다 같이 들뜬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으려나.
“낮 경기라서 일찍 끝났겠다. 가게로 넘어올 거냐?”
‘아니, 못 갈 것 같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조승탁의 목소리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톤이었지만, 뒤이어 말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맞는 소리이긴 한데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아쉬운 감정을 들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리그 일정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나도 사적인 건 다 취소하고 야구에만 매진하려고.’
“아아, 그러냐?”
‘대신에 애니는 한꺼번에 몰아볼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겠냐? 일단 내 취향대로 모두 받아놓으라고.’
뭐, 따로 말을 안 해도 이미 지난 아시안게임 기간 때부터 계속 작품들은 축적되고 있다. 아무래도 후반기부터 꽤 빡빡한 일정을 보내왔던 조승탁은 마음 놓고 성수동으로 놀러 오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방에서 같이 놀고먹고 지내던 일들이 꽤 오래 전 일로 느껴진다.
‘다음 날 선발 출장 말고는 투수조도 전원 대기 상태라서 마음 놓고 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너도 MG 팬이면 성적 잘 나오는 게 좋을 거 아니냐. 노력해봐야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아도 돼.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오케이, 고맙다. 아, 그리고······ 너도 좀 알아둬야 할 게 하나 있기는 한데.’
“어, 듣고 있으니까 말해.”
앞뒤 잴 것도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묵히지 않고 바로바로 내뱉는 조승탁이 굳이 이런 식으로 내게 예고를 고하는 게 왠지 새삼스러웠다.
‘아, 음······ 그러니까 말이다.’
꼴에 걸맞지 않게 뜸을 들이기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다. 핸드폰을 붙잡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한 채 머뭇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쓸데없이 웃음이 미식미식 새어나왔다.
“뭔데 그래? 그냥 말해, 인마. 꼴값 떨지 말고.”
‘으음, 그럼 꼴값 그만 떨고 그냥 바로 말하마. 크흠······.’
헛기침까지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던 녀석은 나한테까지 꽁꽁 숨기고 있던 생각을 드디어 토해내었다.
‘이번 시즌 끝나고 다희 씨에게 고백을 한 번 해볼 생각이다.’
“뭐! 고, 고고······ 고오-백?”
고백이라는 두 단어를 귓구멍으로 똑똑하게 듣고만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칠 정도로 화끈거리고 당혹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낯부끄러운 단어인지, [임우영 주의보] 이후로는 나의 사전에서 존재 자체가 말소된 말이 아니던가.
‘그래, 고백이다. 내 깡을 믿고 한 번 덤벼보겠다는 거 아니냐.’
“미쳤어? 너 이번에는 얼차려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죽기 직전까지 맞을 수도 있어. 그래도 말이다, 이 좋아하는 기분을 감추어 두고만 있었다가는 앞으로도 영영 후회할 것만 같다. 그래서 시즌 끝날 때까지 내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성적을 거둔다면 그 때 가서는 확실하게 덤벼볼 거야. 말리지 마라.’
조승탁의 흔들리지 않는 기백은 마치 혼돈의 전장을 향하는 베테랑의 함성,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팀을 구해내기 위해 마운드로 오르는 마무리 투수의 뒷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녀석의 이런 다짐이라면 분명 실현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일마저도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는, 이것이야말로 에이스의 패기인 걸까?
“좋을 대로 해라.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라고.”
‘그래. 그럼 고백을 하기 전에 사전준비를 보다 확실하게 해야겠지. 일단 나의 10승이랑, 팀의 순위 상승을 목표로 두고 있다.’
“그래, MG 팬으로서 나도 부탁한다고.”
조승탁의 목표에 나 역시도 구색을 하나 꺼내 와서 숟가락을 얻어주었다. 그러자 승탁은 호탕하게 웃더니 인사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하는 동안 내 앞에서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김준길은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녀석의 목소리를 전부 들었는지 자꾸만 피식대며 웃음을 지었다.
“오올, 승탁 선수가 드디어 큰 걸음을 나서는 건가?”
“그러게요. 역시 조승탁입니다. 배짱 하나는 역시 알아줘야 해요. 저라면 절대 못합니다.”
“그래, 우리 같이 속 좁은 놈들이랑은 격이 확실히 다른 사람이지.”
사발에 담긴 밥 위에 고추장찌개를 거침없이 퍼 담아 석석 비벼먹던 김 사장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와 자신에 대한 평을 남겼고, 나 역시도 이에 납득을 하면서 다시 밥을 먹는데 집중을 하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나물 반찬을 한 움큼 집어 입에 쑤셔 넣고 밥 한 덩이를 우물거리는데, 먼저 입 안에 내용물을 전부 씹어 삼킨 김준길이 물을 받아 마시더니 난데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오늘 인천 삼산 체육관에서 열린 이란과의 결승전에서······.’
별로 아무래도 상관없을 스포츠 기사가 오롯이 전해질 동안 계속해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김 사장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줄곧 나를 향해있었다. 그가 이런 부류의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던 나는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뭡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음, 할 말이야 몇 가지가 있기는 하지. 그럼 하나 정도만 물어나 볼까? 상관없지?”
“네, 그렇게 부담스럽게 시선을 받느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들어나 보는 게 더 좋겠죠.”
“그래. 그럼 물어보지, 뭐······.”
내 OK사인이 떨어지자 컵에 담겨있던 남은 물을 다 삼킨 김준길이 눈을 흘기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나 툭하고 던졌다.
“음, 그런데 너는 괜찮냐?”
“예? 뭔 소리예요?”
“못 알아들어? 조승탁 선수가 시즌 끝나고 다희 씨한테 고백을 한다는데 너는 괜찮냐고?”
“······.”
무심하게 의표를 찔러드는 질문 하나에 난 어떠한 답변도 남기지 못하고 김준길이 나를 바라보는 식으로 똑같이 쳐다봐줄 수밖에 없었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가게 제일 구석 자리에서 삼겹살에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년 신사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나, TV에서 흘러나오는 국가대표팀의 승전보 같은 잡음들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뭐, 그릇이 소심해서 안 되는 건가?”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
서로를 향한 각자의 눈빛은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꿍꿍이를 가득 싣고선 오가고만 있었다. 김준길이 원체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든 부류의 사람인 것은 잘 알고 있기에, 난 분주히 눈동자와 짱구를 굴려가며 이 인간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를 썼다.
“아니, 난 네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하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용 아닙니까?”
“그래? 넌 아무런 상관없다는 거야?”
일부러 떠보는 투로 목소리를 왜곡해가며 넌지시 한 걸음 떨어져 툭툭 던지는 이 사람의 태도가 점점 내 신경을 긁어댔지만, 여기서 성질을 냈다가는 내가 오히려 지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냥 묵비권을 행사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렇다고 보면 되는 거지?”
“······.”
“확실하지? 그래, 앞으로 잘 하자.”
혼자서 질문만 하다가 자문자답으로 끝난 꼴이 나버렸지만 김 사장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을 했는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 밥그릇을 들고는 주방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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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4일,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인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식을 참관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통해 전격 방한하였습니다. 정치계 일각에서는 북한 정권의 실세 3인방이······.’
“보나마나 화전양면전술이지······.”
여러모로 한국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사건 사고가 넘쳐나고 있는 올 한 해는 뉴스를 줄곧 시청하는 일만으로도 지루함을 꽤나 날려버릴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터진 에볼라 바이러스 환자 때문에 전 유럽이 에볼라 공포에 발칵 뒤집혔다던가, 여야가 여전히 법안 발의로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고 있는 기사 등 1시간짜리 뉴스가 물샐 틈 하나 없이 빽빽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리벤져스와의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베테랑 어중석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며 MG 타이탄스가 13연승의 신바람을 이어갔습니다.’
요즘은 뉴스 말미에 나오는 스포츠뉴스를 절대 빼놓지 않고 챙겨보고 있다. 그동안 미디어에서는 MG의 처참한 성적만을 집중조명하고 있었지만, 시즌 막판 연승을 위시로 한 선전은 MG 팬들에겐 늘 고역이던 스포츠뉴스 시청을 안락하게 만들어주어 정말 좋았다.
‘필승조를 공략해 이틀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둔 MG는 또 한 번, 마무리 송승학에게서 끝내기 안타를 뽑아냈습니다. 10회 말, 1사 만루 찬스에서 6번 타자 어중석이 슬라이더를 공략해내면서······.’
속구처럼 날아오다 바닥으로 흘러 꽂히는 송승학의 슬라이더를 그대로 퍼 올린 어중석의 타구는 약간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우익수 유상준의 키를 훌쩍 뛰어넘어 펜스를 직격했고, 3:3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스코어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MG 쪽으로 완전히 쏟아져 승리를 갈랐다.
3연전 연속 끝내기 승리는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기록된 신기록. 게다가 MG는 97년에 세웠던 최고 연승기록인 10연승을 뛰어넘어 13연승을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 중에 있다. 몇몇 MG에 호의적인 기자들은 지금의 질풍가도에 대해 설레발을 떨며 처음엔 [우주의 기운을 받은 MG]라고 칭하여 많은 야구팬들의 조소를 자아냈었지만, 이젠 이 별칭을 많은 이들이 납득하기 시작할 만큼 MG의 파상공세는 매서웠다.
후반기 고춧가루 폭풍을 일으키려 했던 황봉노 감독의 전술은 다른 4강 경쟁 팀의 승률 하향평준화를 등에 업고 산술적으로 가을야구 진출이 가능한 수준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연승기간 동안, 작두를 타는 것처럼 적재적소에 가용인원이 올라와 막아주는 투수교체는 황 감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처음 감독이 되었을 무렵, 프런트의 바지감독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혁신적인 변화였다.
“우영아, 가자가자. 슬슬 시간 다 되겠어.”
“어, 왔냐? 준비는 끝났고 난 몸만 가면 돼. 내려가자.”
그래서 오늘 난 새로운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과연 내가 직접가도 MG가 이길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연승으로 인해 불티나게 판매하고 있는 잠실구장 티켓을 예매사이트에서 어렵게 구했다. 직관 승률이 영 좋지 않아 주변에서 패배의 아이콘으로까지 불리는 임우영이지만 지금의 MG라면 나의 악운까지 떨쳐내고 승리를 해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희 언니는 오늘 안 오는 거야?”
“어, 다희 씨는 신작 연재 준비 때문에 바쁘셔서 오늘은 시간을 못 내신다고 하더라.”
“으응, 그렇구나······.”
상황 파악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인 홍세영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늘하늘한 치마를 펄럭이며 한진빌라의 계단을 먼저 내려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계단을 내려가는 녀석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팔랑거리는 치마 때문인 건가?
“땅콩 너,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지금 그렇게 좋은 거 아닌데? 그냥 보통이야.”
“그래? 그건 그렇고 오늘은 가르마가 반대네.”
자연스럽게 길어진 녀석의 앞머리는 늘 왼쪽 눈을 덮을 듯, 아슬아슬하게 동그란 모양을 지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방향이 반대였다. 물론 방향이 달라졌다고 해서 홍세영의 트레이드마크인 동그란 단발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어? 머리는 어떻게 알아본 거야?”
“야! 네가 요즘 만날 집이나 가게로 찾아와서 뻔질나게 얼굴을 비추는데 그거 하나 못 알아보겠냐?”
머리숱이 많아서 두툼한 느낌이 일품인 세영의 단발을 손으로 이리저리 헝클어뜨려본다. 난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쓰는 것을 참 좋아한다. 이 짓거리도 한 동안은 불편해서 못했던 행위긴 했지만 이젠 제약이 없지 않나. 마음껏 해줘야지.
“어라, 짜증 안 내?”
“응, 안 내.”
동그랗게 머리를 정돈하는 일은 고데기로 일일이 손을 봐야하는 번거로운 작업이 동반된다. 그래서 이런 짓거리를 하면 녀석은 꼭 짜증이나 불만을 토로해왔었는데, 오늘은 불만도 없고 이게 무슨 일이래?
“약 먹었어?”
“아이 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럴 거니까 안 내는 거지.”
한진빌라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홍세영은 내 팔에 팔짱을 껴오고는 제 멋대로 몸을 기대왔다. 암만 녀석과 내가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근래의 임우영은 심적으로 많이 혼돈에 빠져있기도 하고, 이런 신체적인 접근은 나의 기분을 괜히 아이처럼 뛰어가거나 나비처럼 날아가는 것만 같이 만들어주기에 위험하다. 이대로라면 홍세영에게 격추 당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어허!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던 이 나라 조선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아, 네네. 잔소리 잘 들었습니다. 늦겠다, 빨리 가기나 하자!”
나의 화려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홍세영은 자신의 방침을 고수한 채 내 팔을 질질 끌고 성수역을 향해 걸음을 앞세운다. 강압에 못 이겨 팔짱을 낀 채로 끌려가는 난 점점 애매모호해지는 기분을 충분히 체감하며 한창 깊어온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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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및 구성 : 종량제 / 제작지원 : 김필수
- 작가의말
곧 또 뵙죠.
(16/02/14 1차 오탈자 및 묘사 일부 수정.)
(17/09/20 2차 - 전체 분량 퇴고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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