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gg (4)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다음 소설 내용에서 등장하는 인물, 배경, 단체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써 현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미리 알립니다.
“우영아, 많이 기다렸어?”
따로 앉을 자리가 없어서 출구 근처 벽에 기대있던 내 앞으로 상시 익숙한 모습의 홍세영이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아니, 나도 방금 왔다.”
마치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한 데이트 파트너가 늦게 도착한 상대방에게 매너 있게 던질 법한 멘트를 던진 나는 벽에서 등을 떼고 옷을 탁탁 털었다.
“따로 먹고 싶은 것은 생각해뒀냐?”
“응, 먹고 싶은 것도 그렇고 다른 할 것들도 다 생각해놨어.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잘 따라와야 된다?”
금방 역으로 들어오며 우산을 접었던 홍세영은 우리가 다시금 밖으로 향하는 바람에 접이식 우산을 또다시 펼쳤다. 여전히 광화문 일대는 부슬비가 어중간하게 내리고 있어 홍세영이 간만에 꺼내 입은 베이지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가 하늘색 우산에 가려지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 옷 간만에 보는 것 같다. 너 신입생 때 입고 다닌 거 말고는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우영이 너 면회 때문에 파주까지 갈 때도 입었었거든?”
“아, 그랬었냐? 워낙 군대일은 잊고 싶은 기억뿐이라서······.”
“우우, 잊을 게 따로 있지······.”
그렇게 모른다고 핀잔하는 투로 따지면 곤란하다. 그 당시에도 홍세영이 이 옷을 입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는 게 당연하니 말이다.
그 당시에는 국방색 위장무늬 전투복을 입고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옷가지보다는 홍세영이 챙겨온 피자와 치킨에 대해서만 자세히 기억 하고 있었다. 분명 핫 후라이드 치킨이랑, 쉬림프골드 한 판을 가져왔었지. 정말 감사했었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 여기 길 건너면 교보문고 쪽인데? 어디 아는 곳이라도 있어?”
“종로 1가까지만 지나면 돼. 오늘은 저번 분식집보다는 비싼 곳이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을 걸?”
우산을 살짝 옆으로 젖히며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웃음을 보이는 홍세영. 지금처럼 이렇게 웃는 것은 진심이다. 이럴 수가, 오늘 중으로 그 동안 쟁여두었던 여유 자금과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기, 암만 내가 알바를 해서 돈을 버는 입장이지만 너무 비싼 곳은 301호 가계 재정상황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친단 말입니다.”
“너무 그렇게 겁 안 먹어도 되는데? 그냥 적당한 부담 수준인걸.”
암만 회유를 한다고 해도 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주변에 회사나 사무실들이 밀집한 이 동네는 서울 내에서도 밥값이 천정부지를 자랑하는 지역이지 않나. 여기서 술 마시면 소주 값만 6000원을 당당하게 받는 가게들도 많단 말이다.
그렇게 고민을 해가며 고층 건물로 싹 바뀐 옛 피맛골 앞을 지나는 도중, 난 재정에 대한 부담을 핑계로 가는 사람을 멈춰 세우고 담배 하나를 꺼내 피웠다. 그런데 필터 중간을 깨물어도 있어야 할 구슬이 터지지 않는 게 뭔가 이상했다.
“뭐야, 캡슐이 왜 없지?”
“무슨 캡슐이 없어?”
이상하다. 난 분명 습한 여름에 어울리게 상쾌한 아이스 블라스트를 구매했을 텐데 지금의 개비에는 필터 안에 있어야할 터뜨리는 캡슐이 없었다. 담뱃갑을 꺼내서 확인 해봐도 내가 쥐고 있는 곽에는 분명 파랑색과 검정색이 아날로그 스타일로 꾸며진 아이스 블라스트가 정확히 맞긴 한데?
“젠장, 안 좋은 징조다. 아블에 캡슐이 없다니! 단팥빵에 팥 앙금이 없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내가 분노에 휩싸인 사람마냥 조금 과장되게 옆머리를 쥐어뜯자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홍세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 옷소매를 쭉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우영아, 이러면 내가 농담을 할 수가 없잖아. 그렇게 비싼 곳 안 갈 거라고. 애슐리가 비싼 곳은 아니잖아.”
“아니, 지금은 가격부담보다는 담배에 있을 게 없으니까······ 응? 그게 뭐냐? 밥집 이름이냐?”
“으음······ 따지고 보면 밥집은 밥집인가?”
흐음, 밥집 이름 치고는 상당히 세련된 느낌이 물씬 드는구먼. 앞마당에 널려있는 바질을 넣고 향을 살린 된장찌개를 메인 메뉴로 내올 것 같다.
“거의 다 왔어. 저기 횡단보도만 건너면 돼.”
홍세영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은 보신각 건너편에 있는 높은 타워였다. 생각보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 나는 이 내용물이 빈약한 담배를 바삐 빨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홍세영과 함께 다시 밥집을 향해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건물 지하 식당가에는 홍세영이 말했던 이름의 밥집이 있었다. 정확히 분류를 하자면 이곳은 밥집이 아니라 패밀리레스토랑이었는데 내가 여태껏 이 상호를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홍세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
“아니, 생각해봐! 골방에 박혀서 담배만 뻑뻑 피며 야구나 보는 사람한테 이런 곳은 애초부터 접할 일이 없다니깐.”
“이거 우리 학교 병원 뒤쪽에도 있거든?”
“잠깐만. 우리 있잖냐, 모교에 대해서는 좀 언급을 자제하는 게 어떨까? 한동안 있고 지냈던 안 좋은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으니까.”
임우영 주의보로 인해 고통 받았던 세월이 다시금 떠올라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지만, 홍세영은 또다시 올라간 나의 트라우마 스위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가져온 피자와 스파게티를 오물오물 먹을 뿐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먹고는 있었지만 홍세영의 식사량은 역시 언제 봐도 놀라웠다. 저 조그만 몸에 이게 다 들어가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나도 뷔페에 온 만큼 정신을 도로 차리고 가져온 먹을 만한 음식을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얌마, 암만 앞에 먹을 게 있어도 옷에 묻은 물기는 좀 더 터는 게 좋겠다. 네 머리에도 물방울 좀 고여 있다고.”
비가 흩날리듯 뿌려지는 보슬비였기 때문에 두 사람 다 우산을 썼어도 모르는 새 여기저기 젖은 부분이 많았다. 물론 식사 상대가 잘 먹는 건 보기에도 좋고 절로 흐뭇해질 정도지만 옷이 젖은 줄도 모르고 이렇게 먹는 것에 정신 팔려 있는 걸 보면 단정한 겉모습과는 너무도 이질감이 들어 피식 터지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임우영, 그런 건 좀 미리 말해줘. 이제 와서 보니까 민망하잖아. 음식을 담아왔을 때부터 이 꼴이었을 거 아냐?”
“아니, 그냥······ 웃기잖아.”
허둥지둥 옷과 머리를 털어낸 다음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외견을 정리하는 홍세영을 보면서 난 그 동안 그 친구에 대해 걱정했던 일을 잠시나마 잊은 채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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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때마침 비도 거의 그쳐서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수준의 날씨가 되었다. 배도 꺼뜨릴 겸 경복궁이나 한 바퀴 걷고 오자는 홍세영의 권유에 난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배가 빵빵해진 와중에 다른 무언가를 하는 건 아무래도 더부룩하고 부담스러운데 산책 정도라면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평소처럼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은 채 나란히 궁궐 내를 돌아다니며 각자의 감상에 잠긴 관람을 계속했다. 처음 입장할 때는 시끄러운 외국 관광객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지만, 안 쪽 향원정 일대는 구석진 곳에 있어 많이 한적했기 때문에 사소한 감상을 서로 나누며 천천히 구경을 하는 게 가능했다.
한 바탕 비가 쏟아진 덕분에 습하긴 해도 날이 선선해서 괜찮았다. 언제쯤 굵은 빗줄기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늘에는 먹구름이 껴있긴 했지만, 그 덕에 뜨거운 햇볕이 쪼이지 않았으니 하릴 없이 시간을 쓰며 걸어 다니기 아주 적당했다.
“이렇게 조용한데서 같이 산책하고 그러니까 옛날에 같이 학교 다니던 때 생각나지 않아?”
“그러게 말이다.”
“히히, 그 때는 우영이 너도 꽤 괜찮은 소리도 하고 많이 의젓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좀 글러먹게 됐지, 안 그래?”
나긋나긋한 분위기로 눈웃음을 지으며 홍세영이 내게 되묻자 난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은 개판이니까.”
야자가 끝나면 늘 각자의 손에 간식거리를 들고선 집까지 가는 길을 홍세영과 동행했다. 시내를 벗어나 캄캄해진 가도를 나란히 걸으면서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막막했던 게 많았는지 서로의 고민거리를 내내 중얼거렸었는데, 그 당시의 나는 지금처럼 개판으로 살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홍세영의 고민거리를 꽤나 해결해주곤 했었다.
“그래도 우영이 너랑 같이 대학교도 다니게 됐고 지금도 나쁘진 않아. 물론 예전이 더 믿음직스럽긴 했지만.”
“그러냐? 그렇구만.”
학업에 지친 날에는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긴 길을 걸었었다. 그 당시의 나는 피곤이 가득한 홍세영에게 그래도 개운하게 같이 산책이라도 하니까 좋지 않냐는 말을 하며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꽤나 쓸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 그 때는 내가 생각해도 괜찮았다고. 홍세영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정도인데 말이다.
“슬슬 나갈까?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돌아가자.”
“좋을 대로 하세요. 오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날이니까.”
연못을 배경으로 잘 정돈된 동그란 머리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끌게 만드는 균형 잡힌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온다. 나긋한 기분이 드는 편안한 눈웃음과 미소 띤 작은 입술은 다시금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홍세영과 함께했던 근래의 시간 중에서 이렇게 마음이 놓였던 게 얼마만인지, 그 동안 줄곧 스트레스로만 남게 되었던 뒤틀린 이 애와의 일들이 천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지금 순간이 완전히 되돌리지 못한 강박 속의 단편이라 할지라도 지금만큼은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 복잡한 생각만을 지속하는 건 이제 나도 많이 지쳤다. 편해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임우영, 느려-어. 빨리 가자.”
한껏 거리를 좁히며 내 옆에 선 홍세영이 팔을 잡아끌며 나가는 길을 재촉하기에 난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준다. 발을 맞추는 것도 제대로 해내지는 못했지만 어찌어찌 끌려 가다보니 어느 새 광화문 앞까지 끌려나올 수는 있었다. 큰 길을 건너고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는 도중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에 우리는 바로 옆에 있던 스타벅스에 비도 피할 겸, 커피 한 잔을 마시려 들어갔다.
“커피는 내가 살 테니까 자리 좀 잡고 있어. 뭐 마실래?”
“쓰지만 않으면 되니까 시원하고 적당히 단 거로 부탁한다.”
생각보다 대기가 거의 없었기에 홍세영은 카운터에서 커피를 기다리기로 했고 나에게는 자리를 맡는 중책이 떨어졌다. 굳이 높이 올라갔다가는 괜히 피곤했기에 난 2층 한 구석에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고 음료를 기다렸고,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홍세영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맡은 자리를 알아서 찾아와서 앉았다.
“카페모카는 달달하니까 먹을 만할 거야.”
“땡큐.”
홍세영으로부터 아이스 카페모카를 건네받은 나는 꽂혀있는 빨대를 이리저리 비틀며 음료 위에 쌓여있는 휘핑크림을 뒤섞은 다음, 뽀얗게 된 커피를 천천히 빨았다.
“오늘은 어땠어? 나쁘진 않았지?”
“음, 다른 말은 안 보탤게. 좋았다.”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식혀가며 마시던 홍세영은 나의 후한 평가가 떨어지자 밝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그러게 말이다.”
홍세영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 쥐었다. 이후 빗줄기가 굵어지며 세차게 광화문 광장을 때리는 풍경을 돌아보던 홍세영은 감싸 쥔 커피 잔을 응시하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한 동안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예민했었잖아. 그래서 너한테 억지라도 부려서 이렇게 예전처럼 둘이서 노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 같이 있으면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고······.”
“저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응? 무슨 말이라니?”
말을 잘라먹고 밀어붙인 내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홍세영이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돌아왔지만 난 딱딱한 분위기를 풀지 않고선 그대로 맞섰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홍세영과는 절대적으로 편해지고 싶고, 다툼을 만들기 싫다. 하지만 옛날처럼 다시 산책을 하며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바래왔던 홍세영과의 관계는 변치 않는 단단한 미소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안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돌이키고 싶었다. 같이 귀가를 하면서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는 일없이 편안함을 공유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는 너무도 거쳐야 할 과정이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비루한 기대나마 비벼 볼 수밖에.
“아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말이 허투로 나왔네.”
“우영이 너 이상하네. 암만 듣기 싫어도 내가 말하는데 얘기는 좀 잘 들어줘.”
잠깐 동안 굳어있던 홍세영이 다시 풀어지며 소파에 등을 기댄다. 난 고개를 돌리며 홍세영이 잠시간 바라보았던 비 내리는 광화문 광장을 응시했다. 창밖의 서울 풍경은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시야가 더욱 어둑하게 바뀌어갔다.
#.21/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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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및 구성 : 종량제 / 제작지원 : 김필수
- 작가의말
오늘은 강의가 이상하게 바뀌는 바람에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내내 쓸 수 있었네요. 다음 연재분에서 뵙겠습니다.
(15/12/20 1차 오탈자 및 묘사 수정.)
(17/09/19 2차 - 전체 분량 퇴고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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