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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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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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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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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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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뭘 망설일 것이고,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 시기 즈음 서해상에서 해군 초계함이 북한 잠수정에 피격되어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으로 기억하는 류지호다.

지난해에 일명 ‘대청해전’이라고 명명되었던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의 상해급 경비정과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고속정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바뀌고 한반도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이전 삶과 비슷한 사건이 또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류지호로써는 남북이 ‘짜고 치는 고스톱’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공교로웠다.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북한의 도발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서로가 조준사격을 가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암튼 대한민국 해군의 응사로 북한 경비정이 큰 피해를 입고 퇴각을 했고, 그에 대한 북한의 보복공격 가능성을 고려해서 서해상에서 ‘경계강화’가 반년 동안 이어졌다.

해가 바뀌고도 특이활동이 발견되지 않아 ‘경계강화’가 해제될 조짐이 보였다.

북한의 전술이 변경되었을까.

북한군은 경비정이나 잠수함 도발 대신에 서해 NLL 인근의 해안포 사격으로 도발했다.

자연스럽게 해상보다 서해 5도에 집중 하게 되면서 바닷 속 경계가 느슨해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주)나래안전의 임원들이 온갖 인맥을 총동원해서 해군을 닦달했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된 3세 후계자가 북한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남쪽을 자극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실제로 후계자의 이름으로 ‘적의 도발 행위에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지령이 북한군 간부들에게 하달 되기도 했고.


“일어날 거면 빨리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거라면 무슨 변화라도 좀 있어라...”


이전 삶에서 사건이 벌어졌던 날짜에서 몇 주가 지났다.

그럼에도 서해상에서 불길한 조짐은 없었다.

서해상에서 뭔가 터지길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인 가운데, 류지호는 LA로 돌아가 영화 <Christmas Cargo>의 포스트프로덕션을 마무리 했다.

류지호의 승인을 얻은 최종 프린트가 칸 영화제로 배달됐다.

<Christmas Cargo>가 제 63회 칸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경쟁부문에는 출품을 하지 못했다.

접수기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대신 특별초청 형식으로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사실 <Christmas Cargo> 포스트프로덕션 일정을 국제영화제 접수기간에 맞추질 못했다.

많은 국제영화제 출품을 포기했다.

베를린과 토론토국제영화제가 경쟁적으로 출품을 요청했으나.

두 영화제가 모두 개봉 이후에나 개최되기에 영화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

Eye-MAX 상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칸영화제에도 보내지 않았을 터.

국제영화제마다 수상을 놓고 겨루는 공식경쟁과 주목할 만한 시선 같은 초청작뿐만 아니라, 비경쟁 초청작도 많다.

칸영화제에는 '감독주간'이나 '비평가주간' 같은 유명한 비경쟁 부문 상영도 있다.

각각 프랑스감독협회, 프랑스비평가협회가 주최한다.

공식경쟁부문이나 주목할 만한 시선만큼은 아니지만, 전 세계 언론과 비평가의 주목을 받는다.

칸영화제는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로 넘쳐난다.

따라서 어렵고 지루한 영화에 지칠 때 볼 수 있는 영화도 필요한 법.

그렇기에 장르영화도 초청한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영화제 흥행을 좌우하는 특급스타를 레드카펫에 세우기 위해서다.

그래서 톱스타들이 출연한 영화를 비경쟁이지만 ‘공식’이란 타이틀을 붙여 초청한다.

따라서 올해 칸영화제 최대 화제작은 개막작인 리드 스콧의 <로빈 후드> 그리고 폐막작 류지호의 <Christmas Cargo>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두 영화 모두 거장(?)이 메가폰을 잡았고,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총출동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즉 두 영화를 공식 초청하게 되면 영화에 출연한 톱스타들이 칸을 찾게 되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매스컴에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영화제가 더 크게 홍보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로빈 후드>와 <Christmas Cargo>가 칸영화제를 통해 월드프리미어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영화 마케팅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전략이다.

헌데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는 칸영화제를 통해 세계 최초 공개를 하는 일은 아무 영화나 가질 수 없는 기회다.

1만 여 편이 제작되는 전 세계 영화중에서 오로지 50편만이 가질 수 있는 기회다.

암튼 <로빈 후드>는 칸 영화제 개막작 상영을 시작으로 전 세계 동시개봉에 들어갈 예정이다.

다만 <Christmas Cargo>는 5월 23일 칸 영화제 폐막작 최초 공개를 시작으로 6월까지 월드 프로모션을 진행할 계획이다.

개봉은 7월 2일.

배급사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는 기대작들이 즐비한 5월 개봉을 피해 여름에 개봉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5월을 피했다고 해서 여름 시즌 영화들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로는 <마법사의 제자>, <솔트>, <인셉션>, <이클립스>, 애니메이션 <슈퍼베드> 등이 있다.

류지호는 <인셉션>과 <이클립스> 정도가 최대 경쟁작이 될 것으로 봤다.

그 동안 류지호와 칸 영화제는 특별히 인연이 없었다.

비록 특별초청이고 월드 프로모션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처음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을 예정이다.

나름 뜻 깊다면 뜻 깊은 일이 될 것도 같았다.


“월드 프로모션까지 아주 숨 막히는 일정이네.....”


5월 중순부터 이어지는 스케줄을 확인한 류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랜만 방문하는 유럽이다.

오라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국빈 초청도 있다.

처리해야 할 비즈니스도 몇 건 있고.

칸영화제 참석 이후로 방문해야 하는 국가만 9개, 각종 행사와 미팅 약속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 ❉ ❉


(주)한울합섬은 마산의 향토기업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니었다.

마산에 본사만 두고 있고, 공장은 대구와 수원, 의령 및 해외로 모두 이전했다.

대구 북구 검단동 한울합섬 대구공장에 류지호가 수행원들과 함께 방문했다.


“가온이 인수하기 직전에 큰 불이 났었습니다. 공장 내 원료와 원사 등이 있던 창고와 작업장을 모두 태웠죠. 대략 1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었습니다.”


공장화재 사건은 2007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2003년에도 아크릴방적사 창고 및 스판본드 생산라인과 스판본드 부직포원단 창고를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화재로 연간 3,500톤 규모의 스판본드 생산설비가 전소되어 약 100억 원의 피해와 함께 아크릴방적사 및 부직포원단 피해액도 약 100억 원에 이르러 총 200억 원의 피해를 발생시킨 바가 있다.


“대구 검단공단 내에 있는 단일 사업장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업체 중 하나였습니다. 의령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33명의 직원이 근무했고, 연간 매출액은 대략 110억 원. 부직포의 일종인 스펀본드, 폴리프로필렌(PP)과 아크릴사 등을 주로 생산·관리해 왔습니다.”


한울합섬 신임 CEO 박종태가 자세히 설명했다.

백종익 의장 직속 전략기획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터가 안 좋은 모양입니다. 자꾸 화재가 나는 걸 보니.”


웃자고 한 말인 것은 알겠는데.

눈치가 없는 농담이었다.


“2003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형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새로 건물을 지어 생산을 계속했지만 또 한 차례 대형화재로 공장이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무당이라도 불러다가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


류지호의 말대로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2007년에 발생한 대형화재로 인해 공장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잔해는 어느 정도 치운 것 같아 보였지만, 여전히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화재원인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고도 하고.


“이곳에서 하던 스판본드 생산은 의령공장에서 합니까?”

“예. 의장님!”

“이 부지는 차후 무슨 용도로 사용됩니까?”

“부지를 매각하지 않는다는 방침만 잡혀 있고, 구체적인 활용방안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공장부지 건은 아닌데... 윈디클럽, 레쥬메 같은 브랜드에 관해 의견을 나눈 적은 있습니다.”

“만약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류사업은 깨끗하게 청산하는 것으로 합시다.”

“....예. 의장님.”


박종태 사장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남성 캐주얼 브랜드 윈디클럽 같은 경우는 27년이나 된 브랜드다.

포기가 쉽지 않았다.


“의령 공장에서는 이곳에서 옮겨간 제품만 생산합니까?”

“대구염색산업단지에 조성된 엘렉스 생산 공장은 그대로 남습니다.”


엘렉스(ELEX)는 항균 및 정전기 방지용 특수 섬유다.

MB필터 등과 함께 의료용 마스크에도 사용된다.

가온그룹에 인수되고 단 후 한울합성은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 밀려 고전하던 원료사업부, 침장사업부, 패션사업부 등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두 차례 법정관리를 거치면서 30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는 아픔을 겪으면서 고부가가치 특수·기능성 섬유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한울합섬은 스웨터, 코트, 머플러 등에 쓰이는 아크릴원사 부문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높은 품질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의 60~70%를 점유하고 있다.

마스크, 방호복, 자동차 내장재 등에 쓰이는 부직포를 비롯해 유아 침구류, 병원용품에 쓰이는 항균 기능성 섬유와 반도체 작업복, 군용품 등에 쓰이는 전자파·정전기 방지 프리미엄 원사 등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한울합섬의 주력 제품은 뭐니 해도 스판본드 부직포.

스판본드 부직포는 인장강도가 우수하고 내구성과 내약품성이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으로 산업용에 많이 사용된다.

한울합섬이 자랑하는 100% 폴리프로필렌 소재 장섬유 부직포인 하니본(Hanibon)은 인체에 무해한 소재로 착색성이 뛰어난 것이 장점이다.

꽃 포장지, 초배지용, 포장재, 침대 및 가구용, 인쇄물용 등과 자동차 내장재, 필터, 케이블 보호용, 토목용, 농업용, 코팅용 등 산업용까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정전기를 방지하고, 전자파를 차단해주는 특수섬유인 엘렉스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등 누가 뭐래도 국내 섬유사업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현재 고용현황은 어떻습니까?”

“마산 본사의 관리직과 건설본부, 서울사무소, 대구공장, 의령공장, 천안 핀큐브텍, 안성물류센터까지 해서 450명입니다. 해외 공장에 관리직원으로 이십여 명이 파견 나가 있습니다.”


한울합섬은 1964년 부산에서 한울합성섬유공업으로 설립되었다.

1967년에 본사를 마산으로 이전했고, 1973년 단일기업 최초로 1억 달러 수출탑을 받을 정도로 유망한 섬유수출기업이었다.

1986년 '프로스펙스'로 유명한 국제스포츠를 인수, 이듬해 진해화학 인수 등으로 몸집을 불리다가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부도가 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때 20여 개나 거느리고 있던 계열사들은 다 사라지고, 현재는 건설, 스판본드(부직포) 생산, 브랜드(윈디·레쥬메) 의류판매사업, 인도네시아·중국 현지공장 원사생산, 천안의 열교환기 생산업체인 핀튜브텍 등만 남았다.


“구조조정으로 인원 감축한 것은 없습니까?”

“법정관리 중에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온그룹에 편입된 이후로 일부 직원이 의령공장으로 가는 것에 부담을 느껴 퇴사한 것 외에는 특별히 인원감축은 없었습니다.”

“의령 공장에도 한 번 가봅시다.”


박종태 사장의 안내를 받아 류지호가 경남 의령군 만천리로 이동했다.


❉ ❉ ❉


한울합섬 대구공장 부직포와 펠트(Felt) 생산라인 전체를 의령으로 이전했는데, 1만 8천 평 부지에 2층 규모의 생산동 6개를 갖추고 있었다.


“인수 작업이 완료된 직후 지질조사와 안전진단을 거친 후에 생산동 일부는 증축하고, 또 일부는 철거했고, 그 부지에 새로운 생산동을 건설했습니다. 대구공장에서 돌리던 것보다 새롭게 하나 더 생산라인을 추가해 가동 중입니다.”

“직원들도 함께 의령으로 이주했다면서요?”

“읍에 빌라 3개 동을 확보해 내부 수리 후 직원들에게 관리비만 받고 임대 중입니다. 차후에 직원 아파트를 건설하기 전까지 지내도록 배려할 생각입니다.”


낮은 산자락으로 둘러 싸여 있는 공장 부지는 대체로 한적하고 여유로워보였다.

생산 시설과 창고를 오가는 지게차만 없다면 휴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류지호는 마스크에 쓰이는 멜트블로운(MB) 부직포에 특히 관심을 드러냈다.


“부직포는 폴리프로필렌 소재를 뜨거운 열과 바람, 압축을 이용해 만들어낸 원단으로 마스크의 안감과 겉면을 만드는데 사용되며, 필터 기능이 있습니다. 마스크 뿐 아니라 일회용 기저귀, 옷 커버, 작업복, 자동차 내장재 등에 폭넓게 사용됩니다.”

“생산량은 충분합니까?”


생산팀장이 얼른 대답했다.


“전체 부직포 생산량 가운데 10%만 마스크 제조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MB 부직포는 일반 부직포에 비해 대규모 생산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필터 기능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건용 마스크에 경우 ‘코리아필터(KF·Korea Filter)’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관련 조건을 만족해야 하기 때문에 제조 과정이 까다롭습니다.”

“만약 의령공장을 MB 부직포를 만들기 위한 전용 공장으로 사용한다면 어떻습니까?”

“기능별로 설비가 달라서 그렇게는 할 수는 없고.... 얼마만큼의 수량을 원하시는지 모르지만....”

“하루 400만 장.”

“.....!”

“의령공장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한가.....?”


생산팀장은 난감한 사안이라 대답을 삼갔다.


“마스크 부직포를 생산하는 국내 업체는 몇 개나 됩니까?”

“대여섯 곳 됩니다. 도레이첨단소재가 국내 공급 절반 이상을 생산하고, 그 외에 저희가 10% 정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박종태 사장이 끼어들었다.


“하루에 마스크 400만 장의 마스크를 만들 부직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의령공장의 70% 이상을 가동하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물론 MB 부직포는 별개 문제입니다.”

“MB 부직포 설비는 따로 설치해야겠군요?”

“전례로 보았을 때, 새롭게 설비구매를 해당 업체에 요청하고, 설치하고, 가동하는데 대략 7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의령공장은 법정관리를 고비로 계속해서 생산설비를 축소했다.

한때 생산라인을 잠정 중단하기도 했었고.

그랬던 의령공장에 대구공장의 설비가 옮겨오고 새로운 설비를 들여와 본격적인 부활의 기치를 올리고 있다.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했지만, 현재는 대구에서 옮겨온 직원과 새롭게 채용한 직원 포함 50여 명이 근무하고 있을 뿐.

과거의 성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업무시간이 끝난 후, 모든 직원이 공장 내 식당으로 모였다.

직원들의 가족들까지 초대되었다.

오너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류지호가 직원들 속으로 들어가 허심탄회하게 어울렸다.


“2005년에 12명의 사원이 끝까지 남아서 남은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당시에 500톤인가 재고가 있어서...”

“공장장님, 800톤이었습니다.”

“아, 800톤. 그 재고를 소진하는데 대략 9달 정도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곳 공장은 끝났구나 싶었는데....”


공장장이 말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막걸리 사발을 기울였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을 몸소 겪었던 공장장이 느끼는 소회는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한울합섬 입사 후 두 번의 법정관리 기간을 함께 했던 직원들의 애사심은 일반적인 월급쟁이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직원들의 평균 근속년수가 17년입니다. 의장님.”


가온그룹은 외환위기부터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꽤 많은 기업을 인수해 왔다.

유임된 간부들은 한결 같이 회사가 어려운 가운데도 남아 있던 직원들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을 내비치곤 했다.

그들이 입사했을 때는 상명하복 문화와 비합리적인 권위주의 리더십이 팽배했겠지만, 회사가 어려워지자 그런 리더십은 더 이상 통하질 않았다.

모두가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실업자가 되기 때문에.


“25년 넘은 직원도 무려 10명이나 됩니다. 저기 정근수씨는 정년을 넘어서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 퇴직하겠다고 하는데... 근속년수 신기록 보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간 근무했는데 신기록이라고 하죠?”

“44년을 근무하셨습니다.”

“마산공장 시절에 입사한 분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여기 공장 직원들 간에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 이제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립니다. 함께 사선을 넘은 전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은 끈끈한 동료의식 같은 것이 쌓이는 모양이다.

그룹 내에서 순환배치를 하는 경우가 경우 있는데, 외환위기 시절을 겪었던 간부와 그렇지 않은 직원 간에 서로 건널 수 없는 어떤 강이 중간에 존재하기도 했다.

사실 한울합섬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의 오래된 섬유회사들이 대부분 그렇다.

한울합섬은 1991년부터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인도, 중국 등 해외공장 이전을 추진해왔다.

국내 생산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당연히 노사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가 불 보듯 뻔한 걸.

(주)신진지프 같은 대형 사업장과 작은 사업장이 구조조정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든 버티는 회사들의 공통점은 위기의 순간마다 회사를 살린 직원들의 희생과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연초에 이렇게 다들 모여서 한 해 열심히 해보고 연말 평가에서 적자 낸 부서는 스스로 해체한다는 결의 같은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공장은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하지 마세요. 그런 건.”


박종태 사장이 얼른 말을 보탰다.


“의장님, 저수익 사업부의 해체는 노조와도 합의를 본 사안입니다.”

“의지와 다짐 정도로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만. 앞으로 직원들을 실적 중심으로 내모는 경영행위나 강요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 그것이....”

“그런 거 안 해도 회사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이 80년대도 아닌데 언제까지 직원들 쥐어짜서 성과 낼 겁니까?”

“.....”

“희생 같은 거 안 해도 됩니다. 주어진 일, 월급 받는 만큼만 일 하세요.”

“......”

“대신 R&D 역량을 지금의 10배는 더 강화해야 합니다. 한울합섬이 국내 최초로 섬유 원료를 만드는 공법을 개발한 기업이라면서요? 다른 건 다 뜯어고쳐도 그 기조는 계승 발전 시켜야 합니다. 비록 두 번의 법정관리 속에서 기술개발은 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몇 가지 특수기능 소재 개발에 성공한 걸로 압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직원의 희생보다 중요한 것이 생산성입니다. 땀의 양과 생산성이 비례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한울합섬이 지난 20년 동안 규모가 1/3로 줄어들었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섬유 소재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항균 섬유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점을 가온그룹이 높이 샀다.

단순히 헐값이라고 해서 한울합성을 인수한 것은 아니다.


“비록 국내 섬유산업이 황금기를 달리던 예전의 화려함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고부가가치 분야로 새롭게 도약해 봅시다. 그를 위해서 연구개발만이 답입니다. 공장장을 포함해 간부들은 젊은 직원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세요. 과거처럼 직급으로 찍어 누르다간 가온그룹에서 승진 못합니다.”

“.....!”

“한울합섬이 과거 섬유산업을 이끌었던 리더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여부는 여러분 손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이 걸어갈 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 겁니다.”


간부들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모든 직원과 가족이 숨죽인 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짝짝짝!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

박수가 잦아들고 다시 회식다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박종태 사장이 막걸리를 따라주며 물었다.


“오신 김에 염색산업단지도 둘러보시겠습니까?”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합니다.”


류지호의 눈치를 슬쩍 살핀 박종태 사장이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알고 계신 것 보다 한국의 섬유산업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한울합섬은 건설, 공조 설비 등 비주력 사업에서 연간 1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의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실적에 비해 인수가가 높았던 것은 수원공장, 속초 영랑호리조트 등 알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무주리조트에 매각함으로써 한울합섬의 미래 성장 동력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패션사업은 정리합시다. 내가 볼 때 별 비전 없어요.”

“모그룹에서 지원만 해주신다면 SPA 사업모델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는 ‘자체 상표를 가진 의류회사가 소매점까지 운영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의류회사가 디자인에서 생산·유통·판매까지 모두 맡아 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비싼 입점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중간에서 마진을 챙기는 도·소매업자를 거치지 않는다.

유통 과정이 단순해기 때문에 그만큼 옷값도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다.

소비자 가격을 크게 낮추고, 박리다매 전략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여파로 전 세계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고, 소비자의 씀씀이가 줄어들면서 품질 대비 저렴한 SPA 제품이 각광을 받고 있다.


“계열사인 PISA와 협력한다면 글로벌 유통망 구축에 비용과 시간을 줄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가온백화점이나 인터넷 전자상거래사이트와도 오프라인 멀티스토어 전략을 전개한다면 이른 시간 안에 시장에 안착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와 케냐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도 사업 초기부터 고려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패션 브랜드들이 야심차게 SPA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박종태 사장은 탄탄한 자금력과 네트워크를 가진 가온그룹이 지원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믿었다.


“....흠.”


류지호에 입에서 시큰둥한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PISA‘도 글로벌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이제 시작해서 기존 글로벌 SPA 브랜드를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지.

류지호가 보기에 섬유 부문에만 집중하는 편이 나아보이긴 했는데....


“패스트패션(SPA) 사업진출은 그룹의 신사업추진단, K-마켓, 홈쇼핑, 가온 첨단융복합 연구센터 등 그룹 내 다양한 사업영역과 함께 고민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사실 SPA 같은 트렌드에 민감한 사업은 한국의 대기업과 잘 맞지 않는다.

대기업의 특성상 결재라인이 길고 덩치가 커서 신속한 의사 결정이 안 되기 때문이다.

SPA 즉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사업 속성상 글로벌화가 필수다.

수만 장 단위로 원단을 주문해 원가를 낮추고, 디자이너 수천 명이 한 사람당 매주 수십 가지씩 디자인을 뽑아내야만 박리다매로 이윤을 낼 수 있다.

그런 방식은 자칫 난잡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명확한 브랜드 정체성을 수립해 그에 따라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뚜렷한 색깔을 가져야 한다.

브랜드 이미지가 불분명하면 히트 상품이 나올 수가 없기에.

SPA 브랜드는 상품 판매로 얻은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 반응을 예측해 생산량, 배송물량, 판매가격, 할인전략 등을 결정해야 한다.

매장에서 팔릴 만큼만 생산·배송하는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에게 '지금 사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SPA를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GAAP은 물론이고 일본의 유니클로딩은 30년 세월 동안 그런 판매현장의 데이터를 수집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수립해 놓고 있다.

후발주자들이 쉽게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다.


‘빅테이터 기술과 결합하면 괜찮을라나....?’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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