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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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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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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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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0.1% 부자란....!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의 가족이 급거 뉴욕으로 날아갔다.

평소에는 LA~뉴욕 노선에서 시간당 약 900km의 속도로 비행했다.

대략 4시간 20분 걸렸다.

이번에는 안전에 문제가 없는 최고 속도로 30분을 단축했다.

뉴욕 공항에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깐깐한 보안절차를 단축해주었다.

류지호 가족이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가 맨해튼으로 향했다.

단 한 번도 미국병원 순위 10위 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뉴욕장로병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특실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임종을 앞둔 대니얼 그레이엄을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레오나가 '죽음의 꽃'이라는 검버섯이 가득한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리 와 있던 매튜 그레이엄이 입을 열었다.


“며칠간 기운이 급속도로 떨어졌다고 하더라. 식사도 끊었고,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대.”


그때 침대에서 가래 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나냐?”

“네. 할아버지... 저예요. Jay도 함께 왔어요.”

“Jay.....?"

"접니다.“


류지호가 자신의 얼굴이 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침대로 바짝 다가섰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여상한 여조로 대답했다.


“천국으로 갑니다.”

“.....그래. 그랬구나..... 그곳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야....”

“당신은 훌륭한 할아버지였어요.”

“고맙다. 아가야.”


레오나가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나도 사랑한다. 우리 아가.”


끔벅끔벅 하던 대니얼 그레이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옅은 코골이를 하며 잠이 들어버렸다.

이러다 영원히 깨지 않는 것은 아닌지.

간호사가 별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당장 숨이 끊기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


대니얼 그레이엄의 자손들이 속속 특실로 모여들었다.


그날 밤.


직계 가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니얼 그레이엄이 영면에 들었다.

향년 87세.

노년에 암수술을 받고도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한 것이다.

따라서 그레이엄의 후손들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슬픔은 있을지언정 안타까움은 없었다.

가문의 황금기를 이끈 큰 어른을 잃었다는 것에 아쉬움은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미국의 재계는 큰 별이 떨어진 것이고.


‘한국식으로 따지면 호상(好喪)이지....’


꼬장꼬장하고 비정했던 기업가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지 상관없이 누구도 예외 없이 맞이하는 것이 죽음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간다.


[타협하지 않은 불도저, 고집불통, 철혈의 사업가.]

- The New York Times.


자타공인 부고 기사의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The New York Times.

그곳에서 부고를 실으며 대니얼 그레이엄을 평가한 내용이었다.

대니얼 그레이엄의 전성기 시절 사진이 함께 실린 부고에는 87년 삶의 주요 이력과 함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광물자원 사업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즈니스맨으로만 알려져 있던 고인이 살아생전 자선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했으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몽상가적인 도전과 실패가 있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의 신문 부고란에는 고인의 사회적 지위나 몸담았던 단체들, 유가족의 이름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열거하는데 기사 대부분을 채운다.

하지만 The New York Times 같이 부고기사로 명성이 높은 언론에서는 잘나갔던 인물이나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상관없이 압축된 전기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고인의 삶에 대해 정성스럽게 작성해서 부고를 싣는다.

대니얼 그레이엄의 부고에는 ‘Funeral private’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조문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다.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별도의 초대가 없다면 참석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그레이엄 가문에서 초대하는 조문객들 대부분이 류지호와도 친분이 있는 이들일 터.

따로 조문객을 초대하지 않았다.

미국 신문의 부고 밑에는 조의금을 자선단체에 기탁해 줄 것을 당부하는 문장이 있는 경우가 많다.

대니얼 그레이엄의 부고도 마찬가지다.

조의금을 기탁하라고 남겨놓은 재단의 이름이 J&L Foundation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되었거나 가문의 재단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외손녀 부부의 재단에 조의금을 보내라고 특별히 당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 못 말리는 양반이라니까.....’


왠지 대니얼 그레이엄의 속셈을 알 것도 같았다.

마지막 심술이라고 할까.

죽기 직전에 고문변호사를 통해 급하게 조의금 기탁 단체를 변경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이유가 궁금해서 안달복달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며 부고까지 미리 계획해두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고문변호사조차 그 이유에 대해 함구했다.


‘할아버지 이름 걸고 의미 있는 곳에 쓰도록 할게요. 걱정 마세요.’


어차피 조의금으로 재단에 기탁하는 기부금에는 ‘누구누구를 추모하며’ 라는 메시지가 달린다.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지호 부부가 생색을 낼 일은 없다.

암튼 대니얼 그레이엄은 죽어서 행해지는 것까지 자기 직성에 풀려야 하는 모양이다.

장례식장과 묘지, 반드시 초대해야 할 이들까지도 일일이 후손들에게 남겨두었다.

어쩌면 죽음 이후까지도 준비해 둠으로써 후손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자상한 성격은 아니었던 양반이니...’


대니얼 그레이엄의 영결식은 성 패트릭 대성당이 아닌 뉴욕 파크애비뉴에 위치한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성당에서 열렸다.

장례미사에는 초대를 받은 극히 일부의 조문객만 입장할 수 있었다.

언론에는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장례식에는 전직 대통령 부부, 전·현직 부통령 부부, 연방 상하원 대표, 뉴욕주지사, 에드워드 버펫을 비롯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장들, 금융기관 단체장들, 미국의 주요 상속가문 가주들, 동부지역 재계 거물들이 참석했다.

비공개로 치러진 장례미사는 한동안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킥킥.

호호.


그런데 난데없이 성당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고인의 막내아들인 매튜 그레이엄이 많은 조문객들 앞에서 아버지를 회고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조크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반드시 2010년까지 사시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상속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화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집념에 찬사를 보냅니다. 좋은 소식은 나와 아버지가 화해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그럼에도 우리 부자는 결코 좋은 관계로....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엄숙한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추모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간간이 조문객들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조디 워커 대통령과 공화당이 상속세를 대폭 줄이거나 아예 없애려고 한 적이 있었다.

민주당은 조디 워커 정부의 감세정책을 반대했다.

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마침내 2001년 상속세법이 개정되었다.

당시 개정된 상속세법에 의하면 상속세율을 점차 줄여가다가 2010년 한 해 동안만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 다음 해부터는 다시 상속세를 부활하게 되어 있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미국인들은 그들의 연로한 부모가 이왕이면 2010년에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졌었다.

매튜 그레이엄은 그런 배경을 조크를 던진 것이다.

대니얼 그레이엄은 철혈의 심성과 함께 무척 짠돌이로 알려진 인물.

자식들과 원만하지 않았던 관계들까지 조문객들이 떠올리면서 매튜 그레이엄의 조크에 폭소를 터뜨리고 박수를 쳤던 것이다.

얼핏 이런 미국식 장례문화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장례식에서 고인의 가족이 조크를 하다니.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초상집이 절간처럼 조용하면 안 되고 떠들썩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


앤서니 그레이엄의 추도사만 딱딱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 외 추도사는 대체로 고인과 관련된 조크들이 한 마디씩 들어가 있었다.

오죽하면 류지호조차 대니얼 그레이엄의 고집과 관련한 일화를 유머를 섞어 추모사로 읊었을까.


“괜찮아?”

“...응.”


혹시나 아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담담하게 장례를 치러냈다.

장례미사는 금방 끝났다.

대신 가족부터 조문객들이 저마다 추도사를 하느라 시간을 꽤나 잡아먹었다.

그런데 장례식의 추도사는 맛보기 일 뿐이었다.

일주일 후에 따로 열리는 추도식에는 더 많은 이들이 짧게나마 추도사를 읊을 예정이다.

미국의 장례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시신을 방부처리 하여 조문객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을 ‘Viewing‘이라고 한다.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조문객들도 관 안에서 마치 잠자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꾸며놓은 고인의 모습을 보며 작별인사를 한다.

류지호도 레오나와 함께 최고급 관 속에서 영면에 들어간 대니얼 그레이엄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대니얼이 입고 있는 정장이 어딘지 낯설지가 않았다.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수트였어.”


먼저 떠난 로렌 부인이 생전에 남편의 옷 중 가장 좋아했던 정장을 입혀놓은 것이다.

장모가 귀띔으로 알려주었다.

류지호가 우두커니 서서 속으로 대니얼 그레이엄에게 말을 걸었다.


‘몇 년 만 더 사시지 그러셨어요?’


당연히 죽은 대니얼은 대답이 없었다.

대니얼 그레이엄은 윌리엄 파커와 다른 면에서 류지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인물이다.

철혈의 비즈니스 마인드 따위는 배우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가르침이라는 것들이 명령에 가까운 강요라 반감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업적 수완이라던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을 배웠다.

과거로 돌아오고 한 동안 겪었던 회귀자로서 혼란과 과도한 의욕을 묵직하게 누러주었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고.

모두가 ‘잘한다‘ 칭찬할 때 유일하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준 어른이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면서 세상이 만만하게 보일 때마다 바보처럼 굴지 않도록 다잡아 준 것도 대니얼 그레이엄이었고.

류지호는 대니얼 그레이엄에게 할리우드 빅6를 모두 합한 규모의 거대한 영화 스튜디오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었다.

20년 전에.


‘조금만 더 살아서 그 약속을 지키는 걸 보고 가시지.....‘


심술쟁이에 고집불통 노인에게 자랑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당신의 작은 호의가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23년 전의 10만 달러 투자를 받기 위해 끙끙대던 소년이 이젠 세상을 호령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또한 방황하고 망가졌던 막내아들과 의형제를 맺고는 그가 세계 4대 투자은행 최고경영자이자 월가를 대표하는 금융인이 되는데 일조했다.


‘당신의 자식 농사는 결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고 떠난 겁니다.’


그러니 온 삶을 가문을 위해 살았고, 가문의 재산 증식에 모든 인생을 바친 후회스러운 삶이었다고 여기지 마시길....


“저 조각상은 못 보던 거네....?”


대니얼 그레이엄의 시신이 안장된 공동묘지 터에는 부조(浮彫) 조각상이 있었다.

마치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을 새긴 것 같았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청혼하던 때를 조각해 놓은 거래. 남들에겐 못되게 굴어도 자신의 여자에겐 순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설명을 마친 매튜 그레이엄이 키득거렸다.

웃으면 안 되는데, 류지호 역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대니얼 그레이엄에게 로맨틱한 면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시신은 아내 로렌이 잠들어 있는 뉴욕 맨해튼의 그린우드 공동묘지(Green-Wood Cemetery)에 안치되었다.

미국에선 영결식만을 교회에서 치루고 교회부속의 묘지에 매장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과는 달리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

관의 크기만큼 땅을 파서 묻는 평장(平葬)의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1기당 묘지면적은 작았다.

그러니까 생전 고관대작이었던 사람이나 부자였던 사람이나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은 후에 똑같이 1평 남짓한 땅에 묻힐 뿐이란 거다.

물론 매장 면적만 적다뿐이지, 한국의 왕릉처럼 묘지 앞에 석상을 세우거나 기념 조형물을 만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인을 돋보이게 만들기는 한다.

그레이엄 부부가 잠든 묘지 터 역시 실제 묻힌 땅은 둘 합쳐 2평도 안 된다.

하지만 묘지 터를 둘러싸고 부조 조각상과 탑 모양의 각종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기념 조형물과 화려한 비석이 고인의 생전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린우드 공동묘지는 일반인들에게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부유층의 경우 막대한 비용을 내고 피라미드를 본뜬 능과 스핑크스, 천사상 등을 무덤 앞에 세워놓아 구경거리가 제법 풍부하기 때문이다.

곳곳에 연못도 있고, 조경이 아름다워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산책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도 햇빛도 잘 들고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도 보이는 것이 좋은 곳에서 쉬시네.”

“무조건 엄마가 묻힐 곳은 이 언덕이어야 한다고 협박을 했어. 그때 정말 온 뉴욕시를 다 뒤집어엎을 기세였다니까.”

“그래야 할아버지답지.”


뉴욕 시내에는 묘지가 부족하다.

따라서 부유층에 밀린 가난한 사람들 혹은 중산층은 고향이 뉴욕이더라도 외곽지역에 묘지를 만들거나 아예 화장을 하고 있다.

죽어서 1평 남짓한 땅에 평등하게 묻히지만, 뉴욕 같은 도시에서는 죽어서도 생전의 부와 권력이 유지되는 모양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매튜 그레이엄에게 류지호가 물었다.


“기분이 어때?”

“그냥 그래.”

“결국 화해는 한 셈인가....?”

“화해라고 할 것까지야.....”

“돌아가시기 전에 사랑한다고 했으면 화해의 손을 내미신 거 아닐까?”

“며칠 전에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긴 했어.”

“....진짜?”

“뭐가 미안하냐고 물었더니, 대답 안 해 주더라.”

“마지막 남은 후회가 형이었을 거야.”

“모르지. 후회가 아니라 미련이었을지도.....”


아버지와 아들은 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다.

잘났든 못났든.

편견 없이 사랑하는 어머니와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레이엄 가문은 특히 일반 가정과 많이 달랐다.

그레이엄가의 부자관계는 남자 대 남자 간의 미묘한 권력관계, 힘의 관계가 역학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 같다.

잘난 아버지는 잘난 아버지대로, 못난 아들은 못난 아들대로.

툭하면 불화를 일으켰다.

생각해보면 보통의 아버지들은 잘난 아들만 진정한 아들로 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못난 아들을 차별 대우하면서도 크게 미안해하지 않는 편파성을 가진 것이 아버지라는 종족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이 반항하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을 향해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아버지가 까다로울수록, 학식과 사회적 위상이 높을수록 아들에 대한 요구가 많아진다.

대니얼 그레이엄이나 윌리엄 파커 같은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동시에 문턱이 참 높은 존재다.

혈연으로는 분명 아버지인데, 저 멀리 있는 딴 세상 사람 같다고 할까.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홀로 극복해 온 그 자신감과 고집스러움, 오만함은 아들에게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었을 터.

소유욕과 권력욕 강한 아버지는 자식을 누른다.

특히 아들이 하는 행동은 다 못마땅하고 눈에 안 찬다.

아들의 성장은 자신의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에 방해하고 꺾는 심리도 존재한다고 한다.

때문에 권력자의 아들에게 비극이 많다.

한때 류지호는 그레이엄 부자관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 반대는 어떨까.’


세상에는 실패하고 좌절당한 나약한 아버지가 더 많다.

나약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부자관계 역시 대부분 좋지 않다.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아버지가 거의 없듯이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하는 아들 역시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버지는 잘난 아들에게 나약하고 무책임하고 초라한 존재 그 자체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는 자존심만 내세우기 십상이고.

류지호와 아버지가 그럴 뻔했다.

이전 삶에서는 분명 그랬다.

제 잘난 줄만 알았던 아들.

그저 평범할 뿐이었는데 자격지심을 가졌던 아버지.

그런 부자지간은 결코 화목할 수 없었다.

결국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고.

다행히 과거로 돌아온 이후는 부자간에서 크게 갈등이 없다.

류지호는 아버지를 평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

잘나고 못 나고는 자식에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류지호는 아버지의 강한 윤리의식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존경하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로서 류민상 역시 잘난 아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류지호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자식은 아버지를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누가 이기고 지는 관계가 절대 아니기에.

아버지는 시간이 흐르면 죽어서 사라진다.

결국 자식에게 지는 존재가 아버지, 즉 부모다.


“형도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어봐야 알 수 있을 텐데...”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다만 부모가 되고도 본인이 자식이었던 시기를 까맣게 잊고, 부모의 입장으로만 자식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함정이지만.


✻ ✻ ✻


미국의 장례 절차는 한국에 비해 훨씬 간소하게 진행된다.

단 이틀 만에 장례식이 모두 끝났다.

영화든 사업이든.

다 제쳐두고 한동안 뉴욕에서 머물기로 했다.

상실감에 힘들어할 아내와 장모의 안정을 위해서다.

장례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서 급히 날아온 부모님과 동생부부들까지 롱아일랜드 저택에서 머물다보니 하루하루 집안이 시끌시끌했다.

일주일 후에 열린 추도식도 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행사만 남겨두었다.

바로 유언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허드슨 강 건너편 뉴저지 알파인에 소재한 그레이엄 가문의 저택.

직계가족이 모두 모였다.

류지호와 레오나도 참석했다.

대니얼 그레이엄은 빈손으로 이승을 떠났다.

반면에 후손들은 엄청난 재산을 손에 쥐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이었다.

월튼마트 창업자 사후로 재산상속을 받은 자녀들이 단숨에 Forbes 선정 미국부자순위 상위권을 차지한 일이 있었다.

대니얼 그레이엄 사후에도 그런 진풍경이 펼쳐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2011년 미국의 상속가문 순위에서 그레이엄 가문은 카질-맥밀란(곡물사업) 가문에 이어 5위를 장식했다.

이 시기 카질-맥밀란가문의 추정 재산은 300억 달러다.

Forbes는 미국 상속가문 1위에 월튼마트의 창업자 가문을 꼽았다.

월튼가문의 추정 재산은 무려 800억 달러를 상회한다.

류지호가 보기에 Forbes의 추정은 실제와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자신이 얼추 추산한 월튼가문 상속자들의 모든 재산을 합하면 1,200억 달러가 넘는다.

카질-맥밀란가문 역시 재산이 최소 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근거는 별 것 아니다.

미국의 10대 상속가문인 그레이엄과 파커 가문의 재산을 통해 추론해 보면 되기에.

암튼 내년 Forbes 미국부자 순위는 무조건 요동치게 되어 있다.

가주로써 중요 사업을 모두 물려받은 장남 앤서니 그레이엄은 말할 것도 없고, 딸인 캐서린에게도 상당한 재산상속 내용이 유언장에 담겼다.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었던 매튜 그레이엄에게도 엄청난 상속이 예정되었다.

외손녀인 레오나는 부동산과 약간(?)의 신탁을 받았다.

약소하다고 표현한 상속 수준이 무려 5,600만 달러 규모다.

부촌으로 유명한 벨에어에서 손에 꼽힐 고급 주택을 한 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허니, 라나이 섬이라고 알아?”

“어디 있는 섬인데?”

“하와이.”

“혹시 게이츠씨가 비밀 결혼식을 올린 그 섬인가?”


레오나가 박수를 쳤다.


짝짝!


정답인 모양이다.

하와이 주의 137개 섬 가운데 6번째로 큰 섬이 라나이섬이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은둔의 섬’으로 불린다.

지금은 세계 두 번째 부자이지만, 한때 최고 부자였던 PS의 창업자 헨리 게이츠가 1994년 라나이섬 전체를 통째로 빌려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로 사생활 노출을 피하고 싶은 기업인과 연예인 등 숱한 유명인들의 휴양지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라이나섬이다.


“그 섬은 왜?”

“할아버지가 나와 허니에게 그 섬을 주셨어.”

“.....?”

“고문변호사 윌슨 아저씨가 내일 함께 사무실로 오래.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하와이주 PUC에 소유권이전 신청서를 접수할 수가 있대.”

“그 말 뿐이야?”

“응. 자세한 건 사무실로 와야 해줄 수가 있다나봐.”

“하와이란 말이지....?”

“우리도 이제 휴양섬이 생긴다, 그치?”

“휴양섬이 갖고 싶었어?”

“뭐 꼭 휴양섬을 소유하고 싶다기보다... 아이들이 파파라치 없이 편하게 물놀이 할 수 있는 바다나 호수를 끼고 별장을 소유하는 걸 고민하긴 했지.”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사치나 과시는 졸부들이나 하는 것이다.

류지호 같은 초부자들은 굳이 과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주목한다.

사치의 기준도 일반적인 부자들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자책할 거 없어. 어차피 허니는 세상 어떤 섬이라도 언제든 통째로 빌릴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우리 아이들만의 섬은 다르지.”


백원일보 일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 일가가 하와이에서 전개하려던 호텔과 리조트, 골프장 사업을 훼방 놓고 심지어 빼앗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하와이에 호텔&리조트 거점을 확보해놓은 것으로 만족했다.

당시 하와이주 부속 섬들의 대략적인 가격은 0.5억~1.5억 달러 사이였다.

현재는 2억 달러는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최고 부자라는 녀석이 슈퍼리치 사이에서 그 흔한 휴양섬 하나 없다니 참 딱하다. 라고 어르신이 말씀하셨지.”


다음 날 찾아간 캐서린 & 윌슨 로펌의 공동창업자이자 대니얼 그레이엄의 고문변호사 윌슨이 부부에게 한 말이었다.

류지호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대신 미국에서 10위 안에 드는 대목장을 소유하고 있잖아요.”

“넓은 땅은 가지고 있으면 뭘 해, 산과 바다는 없지 않느냐... 라고 하실 것 같지 않나?”

“바다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에이 관두죠.”


이미 죽은 사람 흉보는 것도 아니고, 윌슨 변호사와 이러쿵저러쿵 입씨름할 것까진 없었다.


“저와 레오나 공동 명의죠?”

“그렇다네. 일체의 비용과 세금은 자네가 따로 지불할 일은 없어.”

“섬만 달랑 남겨 주셨어요?”

“아, 잠시만....!”


윌슨 변호사가 깜박했다는 듯 금고로 향했다.

금고 문을 열고는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왔다.


“이것도 받게.”

“....?”


류지호가 두툼한 봉투를 흔들어보곤 이내 안에서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작가의말

장마에 비 피해 없으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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