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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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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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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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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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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여름방학을 앞두고 기말고사 성적이 발표됐다.

그간 해온 노력이 있어서인지 지난 중간고사보다 류지호의 성적이 올랐다.


78등!


드디어 전교 100등 안에 진입했다.

안 돼서 못 거둔 성적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성적이었어.’


최선을 다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룰루랄라.


이미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 떨어질 성적이 없었던 고우찬은 천하태평이다.

김준우는 내심 만족한 한 것처럼 보였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던 석차가 20등 안으로 턱걸이했다.

류지호와 비슷한 등수를 기록하고 있던 황재정이다.

황재정은 마음잡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지난 중간고사보다 난이도가 올랐다.

본인이 어려움을 겪는 과목에서 특히 심했다.

더해 암기에 취약했던 부분에서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출제되는 바람에 원래 기본 실력이 있는 과목이 오른 반면 그렇지 않은 과목의 점수가 곤두박질 쳤다.

따라서 황재정은 간신히 지난 석차를 유지했다.


“......”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를 보며 류지호는 그가 느끼고 있을 허탈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을 수도 없이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한다고 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을 때 느끼는 허무함.

류지호가 황재정의 어깨를 툭 치며 위로를 건넸다.


“실망할 것 없어. 성적이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

“아씨, 짜증나......”


황재정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실망감을 마구 표출했다.


“틀린 문제 복기나 해보자. 잊어먹기 전에 복기를 하는 것이 좋다더라.”


김준우가 시험지를 꺼내며 말했다.


“뺀질이 너도 일루 와.”


황재정이 태평한 표정의 고우찬에게 짜증을 부렸다.


“날도 더워 죽겠는데 무슨 공부야. 니들은 공부가 지겹지도 않냐?”


고우찬이 치가 떨린다는 듯 온몸을 동원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류지호 역시 동의를 표했다.

솔직히 시험도 끝났는데 류지호라고 해서 공부를 붙잡고 있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하아~ 싱숭생숭하네. 놀고 싶다. 누구보다 더 격렬하게 놀고 싶다.’


류지호는 좀 논다는 날라리들 못지않게 열심히 놀았던 경험이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시절 나이트클럽과 룸살롱을 전전하며 제대로 풍류를 즐긴 적도 있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음주가무에 심취해 이놈저놈 어울리며 방탕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 방탕함 때문에 뼈아픈 인생 실패를 맛보았지.’


자기 주관이 명확하게 확립하지 않은 청소년기.

유혹에 한번 타협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중독에 빠져 어느 순간 타락하게 된다.

친구들과 이제 막 공부에 재미를 붙여가려는 시기다.

놀러 다니기 시작하면 방학 내내 유흥 속에서 허우적거릴 가능성이 높았다.

마치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류지호처럼.

게다가 친구들과 마음 편하게 공부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시기가 지나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

문제는 공부만 가지고 꾸준히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행히 공부에 관심이 없는 고우찬은 태권도를 함께 하고 있다.

다른 두 친구가 문제다.

언제든 공부에 싫증을 느낀다면 튕겨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류지호는 사인방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르지.’


류지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시험지는 넣어둬.”


친구들은 공부에 강박적이던 류지호의 말에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시험지 복기 안 해?”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뭔데?”


김준우가 물었다.

류지호가 말을 하려는데 황재정이 빨랐다.


“야, 나 우울해. 술이나 마시러 가자!”


얼른 고우찬이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친구가 우울하다잖아. 그럼 위로를 해줘야지.”


항상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고우찬이다.

황재정이 가방을 챙겨 일어서자, 친구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류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디로 몰려갈지 뻔했기 때문이다.


❉ ❉ ❉


류지호의 예상대로다.

사인방은 연하대 술집 아네모네에서 술을 마셨다.


“너희들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


류지호가 신중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또 그놈에 커서 뭐가 될래! 그놈에 대학! 젠장!”

“어른 흉내 내면서 잔소리 늘어놓을 거라면 하지 마! 우리 아빠도 안 물어보는 걸 너는 왜 매번 물어봐!”

“꿈은 발설하면 안 돼. 그러면 그 순간 멀리 달아나 버리는 거야.”


김준우, 고우찬, 황재정 순으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류지호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부자도 되고, 남들이 선망하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친구들은 시큰둥했다.


“그러냐?”

“열심히 해.”

“화이팅!”


류지호는 친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사업 한번 해보자.”

“누가?”

“우리가.”

“아이스케키 장사하게?”


고우찬이 빈정거렸다.


“내게 사업아이템이 있어.”

“아이템? 그게 뭔데?”

“I. T. E. M, 물품, 목록의 항목.”


황재정이 친절하게 영어단어의 뜻을 알려줬다.


“일일찻집이라도 하게? 그거 표 팔려면 엄청 빡센데.”


김준우가 끼어들었다.


“아서라. 괜히 선생들한테 걸려서 정학 받기 싫으면.”


황재정이 오버하려는 김준우를 타일렀다.

술집 출입이 적발되면 최소 근신이다.

그런 주제에 ‘정학‘을 입에 올리는 황재정이다.


“날라리도 노는 것에 금도가 있어. 온갖 잡놈들에게 표 팔기 위해 아양 떨고 싶냐? 양아치들이 와서 깽판 치면 어떻게 할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양아치는 걱정하지 마. 내가 아는 양아치 형들 전부 부르면 끝나.”


황재정과 고우찬이 티격태격하자 류지호가 나섰다.


“그만!”


두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정신없던 분위기가 수습되고 나서 류지호가 친구들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난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써놨어. 효도하자! 성공하자! 가정을 소중이 하자! 당당한 사내가 되자! 우정을 소중히 하자! 그것들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해.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면 좀 더 쉽게 이룰 수 있겠지. 삶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잠시 멍한 표정으로 류지호를 보던 친구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일일찻집을 몇 번을 해야 되냐?”

“고등학생이 벌면 얼마나 번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흥,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


다시 친구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다.

가만히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며칠 동안 이것저것 알아봤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사업이겠더라. 그런데 솔직히 나 혼자서는 무리야.”


진지한 표정의 류지호를 보며 황재정이 정색했다.


“뭐 할 건데?”


친구들이 류지호의 입을 주시했다.


“웨딩촬영!”


또다시 친구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웨딩사진?”

“그게 뭔데?”

“결혼식 때 사진 찍는 거?”


류지호가 앞에 놓인 생맥주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축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결혼식을 하면 기념촬영을 해. 나는 단순한 예식장 단체사진에 더해 결혼식 전체를 기념하는 앨범을 만들어 주는 것을 생각했어. 결혼식 전에 예복을 입은 신랑신부를 풍경이 좋은 곳으로 데려가 촬영을 하는 거야. 또 예식이 모두 끝나고 하는 단체사진 외에도 본 예식 전체에 대한 스냅 사진도 찍는 거지. 물론 폐백도 찍어. 그 모든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서 신랑신부와 가족에게 주는 거야.”

“사진 앨범은 지금도 주는 건데?”


누나만 셋인 김준우가 반론을 제기했다.


“너희 집은 부자니까 그런 것도 가능하지. 거기에 결혼식만 들어있지?”

“응.”

“우리는 야외 촬영과 스냅사진을 찍을 거야. 또 패키지로 비디오도 찍을 거고.”

“비디오?”

“결혼식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한 후에 편집해서 주는 거지. 돈을 받고.”

“비디오는 부잣집에만 있는데?”


황재정의 말대로다.

아직 비디오플레이어의 보급률이 5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참고로 93년에 가서야 보급률이 80%에 달한다.

30만 원대 비디오플레이어가 대량으로 생산 시판되기 시작한 것이 불과 1~2년 전부터다.

특수한 분야에 국한 되어 사용되던 비디오가 최근에 들어서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당장 하자는 것이 아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데 주먹구구식으로 뛰어들 순 없지.”

“그럼 언제 시작하는데?”

“먼저 사전조사가 필요하고, 또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워야겠지.”


류지호의 표정과 어조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알아볼 것 다 알아봤다는 투다.

이쯤 되면 친구들도 류지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


사인방이 각자 생각에 잠겼다.

황재정은 류지호의 설명을 심각한 표정으로 반추했고, 대화에 끼지 못한 고우찬은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희들, 대기업 회장들이 하루에 몇 시간 자는 줄 알아?”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겠지. 회장이잖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밤 11시까지 일한다고 하더라.”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총수는 결재만으로 하루 반나절을 꼬박 사용할 터.

대기업 총수들은 하루 5시간 이하로 잠을 자며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정신없이 일을 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노력조차 안 해보고 대기업 회장을 무턱대고 욕하고 봐.”


대기업 총수치고 노력하지 않고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들이 정도만을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노력까지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도 쥐뿔도 없는 우리가 뭔들 못하겠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해도 충분하잖아?”


황재정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이야기하지. 미래를 위해 참아라. 근데 당장 힘든데 미래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야. 지금이, 현재가, 당장, 지옥인데. 지옥을 벗어나려면 뭐든 시도를 해봐야지. 지금 당장 말이야.”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류지호는 열심히 살지 않았다.

그냥 막살았다.

자신은 꿈을 위해 한길만 걸었다고 자위했더랬다.

그러면 뭐할까.

돈을 버는 것은커녕 성공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도 못 지켰다.

그런 삶이 후회스럽다.

다시 시작하는 지금, 현재, 덧없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류지호가 살아보니 인생은 생각하는 것보다 짧았다.

다행스럽게도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아직까지는 좋았다.

학창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그래서는 자신들의 인생이 별로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류지호가 호기롭게 말했다.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 거야. 나만 믿어.”


스와힐리어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이다.


“나는 믿을게! 지호 덕분에 성적도 올랐는데 못 믿을 이유가 없지.”

“난 안 올랐거든!”

“나도!”


고우찬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자, 황재정이 한소리 했다.


“넌 공부를 안했잖아!”

“야, 머리 아파. 이제 다 끝났으면 술이나 마셔!”

“자, 위하여!”


사장 채연지가 뻥튀기를 가져와 퉁명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술만 마시지 말고, 안주도 좀 시켜. 나는 뭐 먹고 사니?”

“아줌마, 방학 때 장사 안 되죠?”


류지호가 뻥튀기를 집어 먹으며 채연지에게 물었다.


“개강하기 전까지 파리만 날리는 거지 뭐.“

“평상시 가게에 여자 손님은 좀 있어요?”

“다른 가게보다는 좀 있는 편이지. 왜, 대학생 누나 꼬셔보려고?”

“신 메뉴 하나 알려드려요?”

“신 메뉴?”


채연지가 미심쩍은 눈으로 류지호를 바라봤다.


“칵테일 소주라고.....”


류지호는 기억 속에서 소주방이 유행했던 걸 끄집어냈다.

90년 중반 즈음으로 기억했다.

누구는 여성에 대한 작업주에서 시작됐다고 하고, 소주가 부담스러운 사람을 위해 소주를 칵테일처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칵테일 소주의 기원이 어떻든 가장 대표적인 레몬소주를 시작으로 체리, 오렌지, 키위, 포도 등 갖가지 과일로 다양한 종류의 소주메뉴가 유행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소주의 쓴 맛을 힘들어하는 손님에게 목 넘김을 부드럽게 해줘요.”

“칵테일이라...... 드라이 진이나 위스키 대신 소주를 쓴다는 거야?”

“역시 칵테일을 알고 계시네요.”


칵테일이 대중화가 되기 전이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시기다.

칵테일을 마시려면 호텔 바에 가서 마셔야 했다.

그것도 서울의 대형호텔 바를 제외하고는 경험하기 힘들다.

여담으로 90년대부터 외식산업의 발달로 웨스턴 바(Western Bar)가 등장하게 되고, 그때 가서야 칵테일의 대중화 바람이 불게 된다.


“칵테일은 종류도 많고, 따로 배합방법을 공부해야 하죠. 하지만 레몬소주는 쉬워요.”

“너란 애는 참......”


채연지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저도 칵테일은 마셔본 적 없어요.”


왠지 마셔봤을 것 같다.

그녀가 보기에 신기한 구석이 참 많은 고등학생이다.

술장사만 몇 년인데.

별의별 인간을 상대로 술장사를 해 본 경험에 비춰볼 때 류지호가 십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생들이 술을 마시러 오면 성년임을 드러내기 위해 짐짓 오버하거나, 미성년자임이 들통 날까봐 구석에 처박혀서 마시다가 조용히 나가거나 한다.

류지호는 그렇지 않았다.

올 때 마다 자연스러웠다.

마치 어른이 어린 후배들을 데리고 술을 마신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소주에 레몬을 타 먹으면 맛있어?”


김준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레몬 맛이 나겠지.”


황재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줌마, 가게에 레몬 있어요?”

“몇 개 있을 걸.”

“주방에 한 번 가 봐요.”


류지호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채연지와 친구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채연지가 재료를 꺼내놓았다.

류지호는 먼저 큰 사발에 얼음을 담고, 소주 한 병과 사이다 반병을 부었다.

레몬을 깨끗이 씻어 절반은 즙을 내고, 나머지 반은 슬라이스로 잘랐다.

레몬즙과 슬라이스를 큰 사발에 넣고 잘 섞일 수 있도록 저었다.

소주잔에 레몬소주를 따라 시음을 해보며 사이다와 설탕을 첨가하며 맛을 조절했다.


“자, 한 잔씩 마셔보세요.”


고우찬은 싱거운지 입맛만 다셨다.

김준우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황재정은 다시 한 번 따라 마셔보고는 사발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아봤다.

채연지는 이래도 되나 싶어 류지호를 향해 물었다.


“이런 거 막 알려줘도 돼?”

“특별한 것도 아닌 데요 뭘. 다 같이 먹고 살아야죠.”


류지호는 내심 미래의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빼앗았다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계기로 아네모네도 살리고, 침체된 연하대 후문 유흥가도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지 않을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여간 넌 특이하다니까.”

“잘 안될지도 몰라요.”


이 당시에는 주로 대학생들이 계란말이, 파전, 삼치구이나 김치찌개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고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젊은층의 호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못했다.

또한 외산 수입과일 값이 제법 비쌌다.

어떤 것이 유행하려면 경제와 사회 모두 그 문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변곡점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급속도로 변한다.

전반적인 환경이 열악한 이때 레몬소주가 반드시 통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이유다.


“레몬에 사이다에 설탕에... 원가를 계산하면 소주 한 병을 파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어울리는 안주도 생각하셔야 하고요.”

“아줌마가 알아서 할게.”

“어쩌면 날라리들이 많은 신포동이나 주안에서 통할 수도 있고요. 성급하게 시작하지는 마세요.”

“알았어. 내가 간 다 보고 할 거야. 여차하면 가게를 신포동으로 옮기지 뭐.”

“자, 우리는 이만 주방에서 나가자.”


자리로 돌아온 류지호를 친구들이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우리가 모르는 천재였냐?”

“UFO에 잡혀갔다가 살아왔다던가...”

“류지호의 껍데기를 쓴 외계인이라던가......”


류지호는 놔두면 더 귀찮아 질까봐 아예 친구들의 말에 신경을 꺼버렸다.

레몬소주에 대한 정보는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 보다 훨씬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미래 프랜차이즈 사업을 알고 있으니까.


‘문제는 항상 돈이지.’


웨딩촬영을 결심했을 때, 나이에 대한 한계를 잊기로 마음먹은 바가 있다.

마음먹은 것과 현실은 별개다.

사업을 도모하고 싶어도 자금이 없다.

어른들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다.

허락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집안 사정상 투자 해 줄 돈도 없다.


‘행복이 별 거 있겠어. 내 주변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사는 거지. 지금처럼.’


류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호 학생 잠깐 주방으로 와볼래.”

“나 아줌마한테 갔다 올게.”


류지호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난 솔직히 불가능한 일에 헛심 쓰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 재정이 너는 어때?”

“자식이~ 집은 부자면서 은근히 간이 작아서는....”

“우리 아빠가 부자지 내가 부자냐!”

“고등학생이 창업을 한다고 생각해봐. 신문이고 방송이고 인터뷰한다고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 날 거 아냐. 그리고 준우 너 정도 외모에 젊은 사업가라면 여자가 줄줄이 따르지 않겠냐?”


김준우는 은근한 사탕발림임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혹했다.


“정말 그럴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청년실업가 타이틀, 외모, 거기에 인격까지 겸비한 김준우. 야, 이거 생각만 해도 근사할 거 같지 않냐?”


김준우는 황재정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근사한 정장 수트를 입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멋진 디자인의 회사건물 최상층의 넓은 사무실에서 예쁜 여비서가 커피를 가져오면 창밖을 내다보며 모닝커피를 마시는 젊은 사업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김준우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고우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김준우에게 물었다.


“무슨 상상을 하느라 그렇게 신이 났어? 야한 생각했냐? 좀 같이 즐기자.”


김준우는 고우찬을 무시했다.


“진짜 지호 계획대로 하면 명품 양복에 예쁜 비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글쎄, 사업해서 다 성공하면 개나 소나 말이나 양이나 다 부자 되게.”


황재정이 다시 비관모드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때 고우찬이 치고 나왔다.


“스케일이 작아서 어따 써? 양복에 여비서? 흥 나라면 빨간색 외제 스포츠카 하나 뽑아서 타고 다닌다. 그러면 강남의 마담뚜 아줌마들이 서로 모셔가겠다고 난리도 아닐걸? 겨우 여비서에 목을 매겠냐?”

“고우찬, 그건 진짜 내가 올해 들어본 최악의 헛소리다.”

“아씨, 근데 난 사업 같은 건 자신 없는데.”

“넌 몸 쓰는 거 해.”

“몸 쓰는 거?”

“경비.”

“왜 나만 경비야. 나도 양복 잘 어울려!”

“그럼 양복 입고 근무해.”

“아휴, 이놈을 친구만 아니면 확 패버리는 건데.”


류지호와 친구들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먼 훗날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을 회상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아줌마한테 서비스 왕창 뜯어 왔어.”


류지호가 접시에 수북이 쌓여있는 돈가스 안주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김준우가 류지호에게 우려를 나타냈다.


“근데 우리끼리 잘 할 수 있을까?”

“빨라도 내년 봄, 아마 내년 가을 결혼 시즌이나 되어야 뭐가 될 거야. 그때까지 함께 머리를 맞대보자.”

“우리가 뭘 알아야 머리를 맞대지....”


황재정이 떠보듯이 물었다.


“우리가 안 하면 너 혼자 할 거야?”


류지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해!”


너무나 단호한 류지호로 인해 친구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후회 없이 해보자. 후회하고 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

“이놈은 잘 나가다가 또 노인네처럼 말한다니까.”


고우찬이 구시렁거렸다.


“과거는 말이야 상처를 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볼 땐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더라.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어보자.”


LOG 컴퍼니 애니메이션 <사자왕 심바>에서 원숭이 주술사 라피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도망만 치려는 심바에게 가르침을 주는 말이다.


“문예부 앞에 두고 어디서 잘난 척하고 지랄이야.”

“크크크.”

“내 뒤를 걷지 마. 내가 이끌지 못할지도 몰라. 내 앞을 걷지도 마. 내가 따라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내 옆에서 걸어가며 친구가 되어줘라. 까아뮈이~!”


황재정이 말끝을 길게 끌며 한껏 콧대를 세웠다.


“먹물만 빨지 말고, 술 좀 빨아 새끼들아!”


고우찬이 괜한 짜증을 부렸다.


“따라 해봐.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친구들과 일찍 사업을 시작하면 좋은 점 있다.

딴 짓을 못하도록 녀석들을 굴릴 수가 있게 된다.

가령 만화방, 당구장, 술집, 디스코텍 같은 업소 출입 같은 딴 짓들.

그렇게 장마 끝자락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작가의말

올해도 5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연말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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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4) +10 22.01.04 11,413 223 24쪽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4 22.01.04 11,465 236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1 22.01.03 11,443 233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891 233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91 246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513 256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517 246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93 233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63 242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55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90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53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32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98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96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33 273 20쪽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38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606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56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93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91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96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63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83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78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21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8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69 337 20쪽
2 Again 1987. (1) +20 21.12.20 27,799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56 4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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