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6.29 09:05
연재수 :
896 회
조회수 :
3,815,157
추천수 :
118,365
글자수 :
9,922,097

작성
21.12.20 18:10
조회
27,772
추천
398
글자
21쪽

Again 1987.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허억!”


류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이는 것은 낯선 듯 어딘지 익숙한 방안이다.


“뭐지? 난 얼어 죽었는데?”


류지호의 기억 속에 기괴했던 초거대 극장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여, 여긴?”


좁은 방이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던 반지하방이 아니다.

80년대 풍의 단독 주택 작은 방.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고,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낯익은 구식장롱과 철로 된 책상.

책상 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참고서들.

촌스러운 벽지가 발라진 벽에는 농협에서 배포한 87년 달력이 걸려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갖게 된 류지호의 방과 흡사했다.

류지호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마른세수라 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수염 한 톨 없는 매끈한 피부다.

볼도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으으.”


순간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몰려왔다.


“윽!”


두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데, 급격히 피로까지 몰려왔다.


‘....안 돼!’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뜬다면 비루했던 50년의 삶으로 되돌아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파도치듯 밀려오는 수마(睡魔)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


류지호는 잤다 깨기를 반복했다.

깰 때는 두통에 신음했고, 잠들었을 때는 꿈을 꾸었다.

선명한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다.

기분 좋은 꿈도 있고, 무척이나 슬픈 꿈도 있다.

그 모든 꿈들은 류지호 살았던 인생의 주마등같았다.

전생이든 악몽이든.

뭐라고 부르던지.

꿈에서 보여주는 한 사람의 인생은 바로 류지호 자신의 50년 인생이다.

결국 비참하게 끝이 나버린 인생.


‘지금 이 상황은 혹시 타임슬립?’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왔다.

죽기 전, 절박한 마음을 담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었다.

하필 타임 슬립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 영화이긴 했다.

마지막이란 생각에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 날에서야 그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결국 영화로 성공하리라는 꿈을 접기로 결심했다.

망설인 끝에 준비하던 시나리오를 삭제 해버렸다.


‘한심했어. 정말 난 머저리였어.’


류지호는 마치 타인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자신을 평가했다.

이도 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었다.

끝내 죽는 순간까지 비루하고 비참했다.

과거였는지 미래인지 그도 아니면 전생인지 모를, 50년 인생.


‘실패한 삶. 그 모든 걸 외면하지 말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그 후에 목적의식을 또렷하게 세워야 한다.

자신에 대해 정의하자 흐렸던 시야가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이전 삶에서 했던 모든 실패들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막혀 있던 의지가 열망을 불쏘시개 삼아 확장되고, 사고가 깊어졌다.

그렇게 류지호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아~”


천장의 촌스러운 벽지가 확연하게 류지호의 눈에 들어왔다.

류지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껌벅껌벅.


흐렸던 눈빛은 아주 맑게 변해 있었다.

몸은 몸살을 앓은 것처럼 불편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무척이나 상쾌했다.


끼이이익~


류지호가 나무로 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서 쌀을 씻고 있는 어머니 심영숙이 인기척에 돌아봤다.


“.....”


평생을 못난 자식을 위해 희생만 하셨던 어머니.

중풍으로 고생하던 늙은 어머니 대신 불혹을 갓 넘긴 어머니의 모습이다.

순간 류지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감정들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눈물을 쏟아 낼 수밖에.


“어머니!”


류지호가 피곤한 안색의 심영숙에게 달려가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무, 무슨 일 있었니?”


심영숙은 덜컥 겁이 났다.

창백한 안색의 큰아들이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꿈을 꿨어요. 가족도 내팽개치고, 홀로 노숙자처럼 비참하게 사는 꿈.”


심영숙은 그 악몽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다 큰 얘가 이러나 싶었다.


“그래, 가위에 눌렸었나보네. 괜찮아, 괜찮아.”


어머니의 잔잔한 음성이 류지호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그 자상함과 사랑이 류지호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그럴수록 더욱 서러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어허허허헝. 어머니!”


류지호의 울음이 진정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젠 울 힘도 없어서 씨근거릴 뿐이었지만, 결코 어머니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진정됐으면 엄마 좀 풀어줘. 엄마 힘들어. 자, 착하지.”


등을 토닥거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류지호는 팔을 풀 수밖에 없었다.

심영숙이 큰아들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이 아기처럼 울기는......”


류지호는 짐짓 부끄러움에 말을 돌렸다.


“동생들은요?”

“한 밤중이지.”

“아버지는요?”

“잔업하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늦으실 거야.”

“그렇군요.”

“지호야, 지금 어머니라고 했니?”

“네, 어머니.”

“왜 갑자기 엄마라고 부르던 녀석이 징그럽게 어머니라고 불러?”

“처, 철이 드려나 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류지호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심영숙은 큰아들의 어설픈 존댓말을 들으며, 언제부터 경어를 썼나 싶었다.

어딘지 어색한 존댓말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날 밤 늦게.


“으아아앙~”


류지호는 퇴근한 아버지 류민상을 안고 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눈물이 또 다시 펑펑 쏟아졌다.

류민상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아내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

아버지는 어색한 손길로 아들의 등을 토닥여줬다.


“허, 참.......”


류민상은 천애고아였다.

청년시절 전국을 떠돌며 막노동을 하다가 인천에 정착해 아내 심영숙을 만났다.

지금은 철강회사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다.

이 당시 대기업의 대졸 초봉이 35만 원 정도, 교사의 초봉이 30만원이다.

반면에 철강회사 현장근로자 반장 직급을 달고 있는 류민상의 월급이 30만원 조금 넘었다.

죽어라 잔업을 해야 40만원을 겨우 채울 수 있다.

류민상은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잔업과 초과근무를 밥 먹듯이 해야만 했다.

철이 없었던 류지호는 부모님의 그런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잘해드리자. 세상 그 어떤 부모보다 행복하게 해드리자!’


류지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큰아들, 내일 학교 가려면 자야지.”


심영숙은 울다 지친 큰아들을 달래 잠자리에 들게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류지호는 고향 집이라는 포근함에 취해 깊은 숙면에 빠졌다.

수십 년만에 느껴보는 안락함이다.


❉ ❉ ❉


다음 날 아침.

류지호의 눈이 떠졌다.

정신이 번쩍 들어 반사적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과거로 돌아온 것이 꿈이 아니다.


후우.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류지호는 감회에 젖어 잠시 책상 책꽂이의 참고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국영수 참고서를 하나하나 빼서 들춰보았다.

학기 초인 것 같다.

책마다 중간부터 새것처럼 종이가 깨끗했다.


“...윽.”


여전히 머리가 무거웠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보아도 묵직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류지호는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거실로 나갔다.


“옵빠아아~”


막내 여동생 류아라가 쪼르르 달려와 류지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라야!”


류지호가 류아라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아이구~ 우리 막내 잘 잤어요?”

“형, 말투가 느끼하게 그게 뭐야?”

“응?”

“아빠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 같아.”

“순호야, 이리 와봐라 형이 한 번 안아보자.”

“미쳤어? 징그럽게!”


류지호가 다가가자 류순호가 질색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오빠, 오빠, 작은 오빠는 안아주지 마. 나만, 나만!”


류아라가 류지호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떼를 썼다.

류지호가 기억을 뒤졌다.


‘요맘때 아라가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텐데.....?’


류아라는 늦둥이다.

개구쟁이 인 것 빼고는 구김 없이 바르게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큰오빠인 류지호를 필요 이상으로 따를 시기였다.

무뚝뚝한 아버지를 닮아 두 아들이 모두 내성적인 편이다.

둘째 류순호는 무뚝뚝한 성격에 말 수까지 적었다.

류아라는 놀아달라고 떼를 써보아도 요지부동인 작은 오빠를 진작 포기해버렸다.

잘 놀아주는 큰오빠를 집중 공략했다.

류지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의 어리광을 귀찮아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다.

지금의 류지호 가족은 매우 화목하고 정이 흐르는 시기다.


“하하하.”


류지호가 웃으며 자신의 뺨을 류아라의 볼을 부비며 장난을 쳤다.

류아라가 까르르 웃었다.

애교가 많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류아라다.

그런 늦둥이가 집안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류순호는 못 볼꼴을 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오줌싸개! 쉬 했어?”

“나 오줌싸개 아냐! 작은 오빠는 바보 똥개!”


류아라가 ‘빽’ 소리를 지르며 류순호를 흘겨봤다.


“형. 방해하지 마.”

“뭘?”

“변소.”


류순호는 뚱하게 말을 하고, 영어사전을 손에 쥔 채 현관을 빠져나갔다.

녀석은 한동안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영어단어를 암기할 것이다.

류순호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은근한 비교가 싫었다.

때문에 형에게 공부는 지기 싫다며 열심히 공부했다.

안타깝지만 공부 머리는 따로 있는 모양이다.

류순호의 성적은 노력에 비해 신통치 않았다.


“큰오빠, 나 내려줘.”


류아라가 오빠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사이 류지호는 현관을 빠져나와 좁은 마당을 둘러보았다.

대문 옆으로 화장실과 목욕탕이 붙어있고, 마당 구석에 항아리 몇 개가 놓여있다.

목욕탕으로 들어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았다.

세숫대야를 들고 비좁은 목욕탕에서 빠져나왔다.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겨울에 세수를 하려면 부엌에서 물을 끓여 마당에 있는 목욕탕으로 퍼 날라야 했다.


“하하...”


류지호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불편함을 겪고 보니, 정말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왔음을 절감했다.

부엌에서는 심영숙과 류아라가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엄마가 음식 만들 때 얌전히 있으랬지! 그거 만지지마! 안 돼!”


류아라는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 곁에서 오빠들 도시락에 들어갈 반찬을 집어 먹었다.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듣고는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볼을 잔뜩 부풀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무서운 눈을 부라리는 엄마를 이길 수 없다.


“힝, 엄마는 만날 나한테만 그래.”


시끌벅적한 시간이 지나가고, 네 명의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았다.

고기 한 점 없는 소박한 식단이다.

하지만 류지호에게는 익숙하면서 무척 그리운 맛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어서 일까.

류지호는 식사 시간 내내 행복했다.

별 것 아닌 평범한 일상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라고 믿었다.

헌데 그런 일상이 버젓이 현실이 되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류아라의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아침을 먹었다.

심영숙은 설거지를 잠시 미뤄두고, 분주하게 두 아들의 가방에 도시락을 넣어줬다.

류지호의 도시락은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항상 두 개다.

류아라가 책가방을 메고 나섰다.


“나도 오빠들이랑 같이 학교 갈래.”

“지금이 몇 시인데 국민학생이 학교를 가. 얼른 방으로 안 들어가?”


류아라는 엄마에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몇 대 맞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서럽게 울었다.


“정말 내 배속에서 나온 게 맞나 몰라. 오빠들은 얌전했는데. 쯧쯧.”


심영숙은 투덜거리면서 두 아들을 현관에서 배웅했다.

교복자율화로 인해 형제는 사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쉽네. 교복도 한번 입어보고 싶었는데.’


교복이 다시 부활하게 될 때는 류지호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가 될 터.

류지호가 교복을 입어볼 기회는 없다.

형제가 집 앞 골목길을 벗어나 언덕길로 들어섰다.

기와지붕 색깔과 주택의 외향이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동네.

5년 전만 하더라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즐비했던 동네였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불량주택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어 현재의 깨끗한 동네가 탄생했다.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가난한 원주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쫓겨났다.

현재 입주민들은 주택 대출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류민상의 경우 공장노동자일지언정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개발 된 주택 대출금을 감당할 수 있었다.


“......”


류지호는 동생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

쉽지 않았다.

영화계에 몸담았던 류지호는 경제적으로 무능했었다.

홀어머니를 동생에게 떠맡기듯이 방치했었다.

제 살기도 바빠 가족을 돌보지 않은 형을 류순호는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그런 서먹했던 기억 때문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이 미안했다.’


류아라와 달리 류순호와는 친해지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저녁에 집에서 보자.”

“어.”


류순호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른 길로 걸어갔다.

다니는 중학교가 집에서 가까운 편이라 류순호는 걸어서 등하교를 하고 있다.


‘이제부터 고등학생으로 다시 시작하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묘한 설렘이 있다.

이 당시 버스요금은 성인 120원 학생 90원이었다.

버스에 올라 탄 류지호가 호주머니에서 회수권을 꺼내 통 안에 넣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안내양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버스 안내양을 볼 수 없었다.

여담으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버스 안내양 제도가 폐지된다.

시내버스는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금방 승객들로 가득 찼다.

콩나물시루처럼 승객들로 가득한 버스는 점점 시내 중심가로 이동했다.

고층건물이 보이지 않는 차창 밖 풍경.

류지호는 마치 시골 읍내를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인천이 광역시였던가?’


인천은 1981년 직할시로 승격되었다가 1987년 강화군·옹진군·김포군 검단면을 통합해 인천광역시로 개칭했다.

사실 그런 문제를 고민할 처지가 아니다.

버스가 동인천에 가까워지자 류지호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1학년 때 몇 반이었더라?“


소소한 일상의 기억이어서 그런지 희미했다.

마침내 인천 최대 번화가인 동인천역에 버스가 도착했다.

류지호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그런 번화가를 끼고, 응봉산 정상 부근에 위치했다.


‘시대극 야외세트장을 걸어가는 것 같네. 아니지. 마치 영화 속을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몇 분 걷다보니,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고 넓은 언덕길이 펼쳐졌다.


우뚝.


류지호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저 멀리 언덕길의 끝을 바라보았다.


두근두근!


모습조차 아련한 방송부 동문들 그리고 장례식장에 찾아와 슬퍼해줬던 고등학교 사인방 친구들.

그들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요동쳤다.


“후우웁!”


류지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뭐해?”

“헉!”


류지호가 깜짝 놀라 돌아섰다.

뿔테 안경을 낀 황재정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다.

녀석은 류지호가 고등학교 3년 내내 붙어 다니던 사인방 멤버 중 한 명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둘도 없는 사이로 지냈던 죽마고우.

모범생이며 학구적일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말술에 골초 흡연자였던 날라리 친구다.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냐?”

“그냥 신기하네.”

“뭐가?”

“모든 게 다.”

“싱겁기는.”

“재정아, 반갑다. 인마!”


류지호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황재정을 덥석 안았다.

황재정은 기겁하며 류지호를 밀쳐냈다.


“이게 아침부터 상한 음식이라도 처먹었나. 왜 이래 쪽팔리게?”

“반가워서 그러지 뭘 왜 이래. 이리 와봐라.”

“저리 꺼져! 새끼야!”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류지호를 보며 황재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무슨 좋은 일 있냐?”

“아무 일도 없어.”

“근데 왜 아침부터 실실 쪼개?”

“그냥... 너도 반갑고... 다시 사는 오늘 아침이 즐겁다.”

“미친 놈!”


황재정이 별꼴 다 본다는 듯 통박을 줬다.


“흐흐흐.”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답할 기회가 류지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날은 더 나은 삶을 이루어갈 수 있는 첫 날이다.

어찌 흥분되고 설레지 않겠는가.

류지호는 학교로 향하는 완만한 언덕길을 황재정과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

선도부와 함께 눈을 부릅뜨고 교문을 지키고 있는 학생주임이 보였다.


“머리 잘라라. 확 밀어버리기 전에!”


학생주임의 손에는 체벌몽둥이와 가위가 들려있다.

학교가 군대도 아닌데, 스포츠 헤어스타일을 강요하는 시대다.

오리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과 함께 나란히 걷던 류지호의 시야에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리모델링하기 전의 고등학교 전경이 펼쳐졌다.


“아~”


류지호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포고등학교.

인천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인문계 남자 공립 고등학교.

입학고사가 폐지되고, 소위 뺑뺑이로 전환된 후에도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고등학교다.


‘입학이 결정됐을 때 부모님이 동네방네 자랑이 대단하셨지 아마?’


이때만 해도 명문고 이미지가 강해 대다수 어른들은 신포고에 입학하면 서울 소재 대학입학은 따 놓은 당상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명문대학 입학률이 제법 높았다.

신포고는 공부를 잘하는 학교이기도 하고, 공부만 시키는 학교이기도 했다.

멀뚱히 서 있는 류지호에게 황재정이 말을 걸었다.


“뭘 보냐?”

“감회가 새롭다. 재정아~”

“뭐냐. 그 어이없는 노인네 말투는?”

“나 먼저 방송실로 간다. 1교시 끝나고 매점에서 보자.”


류지호가 경쾌한 걸음으로 뛰듯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저런 놈이 아닌데 이상하네......”


황재정이 아는 류지호는 내성적이다.

저렇듯 명랑하고 활동적인 성격이 절대 아니다.

황재정은 점심시간에 녀석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류지호는 각종 상패와 깃발이 전시된 본관 현관을 지나 중앙 계단을 올라갔다.

양옆으로 교무실과 학생부실을 사이에 둔 방송실이 자리하고 있다.


“.....음.”


류지호는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방송실 문을 열었다.

그리운 사람들과 방송실 풍경이 펼쳐졌다.

중앙에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있고, 한쪽으로 중간에 유리창으로 구분되어 있는 대형 오디오믹서와 스튜디오 방음부스가 보였다.

각종 방송장비를 보관하는 사물함들이 한쪽 벽면에 줄지어 있다.

방송실 입구에서 류지호가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일찍 다녀라.”

“어서 와.”


선배와 동기 몇 명이 가볍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2학년들이 사물함에서 시간표를 확인해 가며 교과서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원래 방송비품을 보관하도록 되어있는 사물함이다.

방송부는 그 중 몇 개를 비워 개인사물함처럼 사용했다.

재물조사를 나오는 날만 원상복구 시켜놓으면 학교 측에서 별달리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학생 개인용 사물함이 없던 시대다.

학교에서 개인 물건을 보관할 수 있다는 건 모두의 부러움이다.

때문에 날라리 학생들이 담배나 성인잡지를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송부는 그런 부탁을 들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몇몇 방송부 졸업생들은 방송실이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류지호가 보기에 그 선배들은 약간의 선민의식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봐야 수많은 서클룸 중에 하나일 뿐이고, 선생들 눈치 안보고 군기 잡을 수 있는 장소일 뿐이지.’


류지호는 방송부로 활동했던 추억이 소중했을 뿐.

방송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행복한 밤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4 22.01.04 11,453 236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1 22.01.03 11,434 233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880 233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82 246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501 256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506 246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81 233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551 242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443 258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76 260 20쪽
19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242 238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219 262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87 265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8 21.12.28 13,582 244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120 273 20쪽
14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3) +7 21.12.27 14,322 280 22쪽
1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2) +11 21.12.26 14,592 277 21쪽
1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 +12 21.12.25 15,141 266 22쪽
11 돈을 왕창 벌자! +13 21.12.25 15,578 272 20쪽
10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2) +9 21.12.24 15,274 275 20쪽
9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1) +8 21.12.24 15,879 260 21쪽
8 Goodfellas. (4) +10 21.12.23 16,145 279 20쪽
7 Goodfellas. (3) +13 21.12.23 16,669 262 20쪽
6 Goodfellas. (2) +12 21.12.22 17,261 292 19쪽
5 Goodfellas. (1) +20 21.12.22 18,504 295 21쪽
4 Again 1987. (3) +25 21.12.21 19,260 328 20쪽
3 Again 1987. (2) +11 21.12.21 22,046 337 20쪽
» Again 1987. (1) +20 21.12.20 27,773 398 21쪽
1 프롤로그. +49 21.12.20 40,615 462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