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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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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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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5.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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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4. 고백 (2)

DUMMY

미정은 눈을 뜨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소환이 성공했다면 카페 언디파인드, 실패했다면 디폴트일 것이다. 디폴트라면 다시 소환하라고 하면 된다. 디폴트에 빠지지 않고 즉사했다면? 그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리도 없잖아.


「깼어요?」


현기준이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미정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현기준이 다가와 미정이 일어나 앉는 것을 부축했다.


「여기서 뭐 해? 열차편 복구되면 진입한다고 했잖아.」


「펜로즈 고객지원센터에서 비상 미니 열차를 내 줬어요. 그런데······.」


「아, 또야? 그놈의 고객지원센터!」


현기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었어요?」


미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구? 그 깡패들이 지들 보스하고 합심해서 떼로 덤비는 바람에, 죽을 뻔 했다구! 치사하게 오토바이 하나 빌려준 거 빌미로!」


「보스? 누구 말이예요?」


「누구긴? 화려하게 복귀하신 류미진 부사장님께서 친히 날 죽이려고 하셨다구!」


어리둥절해 있는 현기준에게 악이 받쳐 소리지르고는 있었지만, 미정은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현기준은 류미진과 자신의 불화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살아 돌아온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지쳐 있었다. 아무나 붙잡고 있는 대로 욕을 해 준 다음 모든 것을 잊고 푹 자고 싶었다.


미정의 바람과는 달리 현기준의 얼굴이 굳었다. 의사 특유의 엄한 표정을 지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무슨 일 있었는지 차근차근 말해봐요. 루프 진입이 벌써 몇 번째인데, 아직도 무의식 통제를 못 합니까!」


현기준의 엄한 목소리에 미정은 살짝 기가 죽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고 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의사는 의사구나······. 말 한마디로 환자를 이렇게 휘어잡을 수 있다니. 그럼 난 역시 환자인가봐. 아직, 아직도 다 낫지 않았나봐.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미정은 더욱 기가 죽었다.


「그게······.」


미정은 현기준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류미진이 직접 나서면서까지 미정이 윤시연에게 가는 것을 막았다는 말에, 현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류미진 부사장님은 아마도.」


깍듯한 ‘부사장님’ 호칭에 미정은 또 짜증이 치밀었다. 나한테는 매번 미정씨, 미정씨면서.


「아마도 뭐? 류미진 ‘부사장님’ 께옵서 뭘 어쨌다구?」


현기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미정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아마도, 보호하려고 한 걸 거예요.」


「칫, 지가 뭔데 날 보호해! 내가 어린앤 줄 아나!」


「미정씨 말고요.」


「누구 말이야 그럼?」


「윤시연 말입니다. 펜로즈 고객지원센터가 미니 열차를 내 준 것은 정인철 박사 때문이 아니었어요. 류미진 부사장이 직접 제게 윤시연을 상담해 봐 달라고 하더군요.」


「시각이 회복된 걸 숨긴 게 들통날까봐 그랬겠지! 어, 박사님 혹시 그 여자와 한패야?」


현기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미정은 또 목소리가 높아졌다. 「알고 있는데 그래? 사람이 어떻게 그런······.」


현기준이 타이르듯 말했다. 「일부러 숨긴 게 아니예요. 윤시연 스스로가 요청한 거랍니다.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도록.」


미정이 다시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자기 눈이 멀쩡한 걸 자기가 모르는 척 한다고? 자진해서 장님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현기준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재킷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 사진을 보니, 애가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정은 현기준이 내민 사진을 받아들어 살펴보았다. 사진에는 복부 위치에서부터 하반신이 없고, 양팔이 절단된 소녀가 머리에 수많은 전극을 꽂고 입에는 호흡기, 복부 아래에는 인공 장기를 단 채 누워 있었다.


미정이 잘 알고 있는, 루프 안에서 만났던 그 시연이였다. 초롱초롱하던 회색 눈동자가 아니라 촛점이 없는 검은 눈동자라는 점만 달랐다.



*



「아저씨, 나 이상해요! 머리, 머리가 너무 아파요!」


아이가 계속 울부짖었다. 정인철은 아이를 두 팔에 안은 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일단 안정이라도 시키기 위해 아이를 들쳐 안고 응급실로 뛰어가 아무 침상이나 잡고 뉘였다. 발버둥치던 아이는 진정제를 주사하자마자 금세 잠잠해졌다.


구한울은 발작하던 아이가 잠잠해지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식별 태그를 살펴보니 여전히 ‘ACTIVATED’ 상태였다. 원래 스피릿을 담고 있던 컨테이너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가 1층 로비라고 외쳤던 게 기억났다. 문을 향해 뛰어가려던 순간, 몸을 돌려 보관함 플레이트 위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들쳐업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다시 망설였다. 이 아이가 깨어나서 다른 자신을 보아도 괜찮을까?


정인철은 아이가 누운 침상 옆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아이는 ‘아저씨들이랑 동시에’ 라고 했다. 이 병원에, 나 말고 이 아이를 데려온 누군가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아이가 데려온 아이는 누군가? 플랫폼루프로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모든 게, 너무나 간단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정인철은 포켓에 손을 넣어 다시 한 번 황전길의 메스통을 만져 보았다.


구한울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식별 카드를 집어들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이를 다시 단단히 고쳐 업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이가 한울의 등에 업힌 채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오래 걸렸어요.」


정인철이 화들짝 놀라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정인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인철은 조금씩 아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깨달았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윤시연의 눈처럼.


「미안해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한울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눈물 때문에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 생각한 대로 해요. 내가 당신에게 심은 시나리오대로.」


정인철은 아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심어 놓다니? 이 병원에 다른 이 아이와 함께 있는, 그자에게 하는 말인가? 정인철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 상태로 플랫폼루프까지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메스통을 잡고 있는 손에 땀이 차올랐다.


「아저씨, 미정 언니, 아니 상무님께 전해 줘요. 언니가 하고 싶었던 말대로, 색은 내 안에서 끄집어 내는 거라고.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나에게선 더 이상 끄집어낼 게 없다고.」


이 말만은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구한울은 알 수 있었다. 트럭 운전사의 총에 맞기 전, 류미정이 시연에게 하려던 말. 자신이 희미한 존재라고 푸념하던 시연을 다그치던 말. 그렇다면, 이 아이는 그때 그 시연이가 맞나? 그럼, ‘상무님’ 은 무슨 말이지?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두 번 살게 해 주신 것, 평생 잊지 않았고,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꼭 기억해 주세요.」


이 아이, 지금 동시에 두 사람에게 말하고 있군. 아니, 그렇다면 이 아이와 지금 함께 있는 그자가 이 쪽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정인철은 메스통을 꺼내 열었다.


「내가 세웠던 계획인데······ 지금 보니 너무 질투가 나. 그 여자만 행복해지는게······. 너무 슬퍼. 너무 미안해. 당신을 살인자로 만든 게······.」


무슨 개소리야? 정인철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건 살인이 아니라 수술이라고! 쓸데없는 조직이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과 다를 바 없는! 그리고 모든 건 다 내 생각이고 계획이었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는 메스통에서 메스 하나를 꺼내 오른손에 단단히 잡았다.


살인자? 다른 시연이와 함께 있는 사람은 역시, 트럭 운전사 그자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울은 조바심을 참지 못하며 위 버튼을 자꾸 눌러댔다.


「처음으로 살고 싶었어. 창피한 얘기지만, 나 그때 포기했었거든. 자기가 나한테 CPR할때. 근데 자기는 이미 포기한 나를 살리려고 미친 사람처럼 애를 쓰고 있더라구.」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울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댔다.


정인철은 혼란스러워졌다. CPR이라니? 정인철이 한 CPR을 말하는 건가, 시뮬레이트 황전길이 한 CPR을 말하는 건가? 지금 내 앞의 이 아이는 윤시연인가, 윤시연의 시각 중추를 깔고 앉은 종양인가? 정인철의 생각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 아니 컨테이너는 천천히 시연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아니 그의 컨테이너가 메스를 든 팔을 들어 올렸다.


「부끄러웠어. 남의 목숨을 살리려고 저렇게 애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내 목숨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니. 내 목숨을 뺏으려고 했다니. 그때, 죽으면서 울었어. 너무 후회돼, 너무 후회돼. 근데 이젠 어쩔 수가 없어.」


1층 문이 열리자마자 한울은 응급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불이 켜진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빨라진 아이의 심장 박동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이제 해. 내가 시킨 대로. 사랑해. 안녕.」


이렇게 말하며 아이는 정인철을 바라보며 목을 꼿꼿이 세웠다. 정인철은 눈을 부릅떴다. 버스와 충돌하기 전,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그때처럼. 그리고 계속 중얼거렸다. 혼란을 잠재울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야. 넌 윤시연이 아니야. 넌 종양일 뿐이야. 이제, 시연이한테서 꺼져.」


목을 꼿꼿이 든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울의 등은 더욱 축축해졌다. 한울은 응급실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안 돼! 그만둬!」


정인철이 메스를 가로로 똑바로 잡고 그대로 아이의 목을 그었다. 아이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남아 있던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메스가 지나간 자리에 줄 하나가 나타났다. 회색이 아닌, 선명한 붉은 가로줄이. 그리고 곧 그 가로줄에서 피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가 눈을 번쩍 뜨고 정인철을 노려보았다.


「나 사실은, 당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어.」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몸이 천천히 기울더니 결국 모로 쓰러진다.


정인철이 메스를 내던지더니 머리를 감싸쥐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울의 목을 감고 있던 아이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한울은 빈 침상에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 놓고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한울이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정인철의 손목에 채울 때, 식별표가 떨어졌다. 그 문구는 ‘ACTIVATED’ 가 아닌, ‘DISCARDED/MURDERED’ 표시로 바뀌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정인철이 기다리는 루프 종료는 찾아오지 않았다.



*


쿵—.


둔한 굉음과 함께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객실 앞쪽 상단의 붉은 색 ‘오류’ 상태표시등 역시 꺼졌다.


윤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상’으로 표시된 상태표시등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수고했어,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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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불법 사용자 색출의 문제 +2 18.04.25 582 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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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무의식의 지령 +3 18.04.21 535 6 9쪽
21 빙의(憑依) (2) +3 18.04.20 534 6 7쪽
20 빙의(憑依) (1) +4 18.04.20 569 6 8쪽
19 이진수 (2) +5 18.04.19 564 6 7쪽
18 이진수 (1) +5 18.04.19 537 6 9쪽
17 저쪽의 나 +6 18.04.18 522 7 9쪽
16 두 의사 +5 18.04.18 552 7 11쪽
15 금기(禁忌) +5 18.04.17 558 8 8쪽
14 함정 +5 18.04.17 506 6 7쪽
13 시뮬레이트 +5 18.04.16 548 7 8쪽
12 루프 오너 +3 18.04.16 504 8 9쪽
11 병실 +5 18.04.13 574 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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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인들 +4 18.04.12 612 9 10쪽
8 모든 것이 하얗게 +3 18.04.12 550 8 7쪽
7 시간 오류 +3 18.04.11 585 7 10쪽
6 카페 언디파인드 +1 18.04.11 578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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