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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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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271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3 19:00
조회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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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8쪽

병실

DUMMY

「미정씨, 정신이 듭니까? 눈 떠보세요.」


미정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살짝 얼굴을 때리는 메마른 손의 감촉을 느끼며 깨어났다. 내려비추는 형광등 불빛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어 보니, 프로브 케이블은 이미 모두 제거되어 있는 듯했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눈을 깜박이며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병실. 1인실이지만 침상은 두 개 있었다. 미정이 누워 있는 침상은 목재 침대머리가 붙은 고급스런, 그렇지만 수족 구속 장비가 갖춰진 최고급 정신과 전용 침상이었다. 행정고시 합격과 더불어 복지부 특채 채용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인드테크에서 교체해준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큼직한 덮개가 달린, 최신형 루프 진입기 일체형 침상이었다. 덮개가 열려 있고 두꺼운 세 가닥 프로브 케이블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전까지 루프에 진입해 있던 미정을 깨어나기 조금 전에 이 침상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2062년 11월 25일 08시 0분부터 11월 25일 14시 43분까지. 총 6시간 43분 루프 진입 유지. 현재 심박수 77, 체온 36.1, 혈압은—.」


현기준이 루프 진입, 해제, 유지 시간을 시작으로 미정의 각종 바이탈 수치 및 메트릭을 읽기 시작했다. 미정이 마인드루프 치료를 시작한 2060년, 신경외과 레지던트 3년차였던 현기준은 지금은 어엿한 전임의이자 미정의 주치의가 되어 있었다.


「루프 안에선 별일 없었습니까? 진입 시점부터 기억을 하나씩 되새겨 보세요.」


「이번 진입은 치료가 아니라 업무 목적 아니었나요.」


현기준의 표정이 흐려지더니, 한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 다죠. 첫번째 업무 목적 진입이기도 하지만, 132번째 치료 목적 진입이기도 해요. 업무와 치료를 병행한다는 조건 하에 류미정씨 외부활동 동의한 것, 알고 있죠?」


현기준의 잔소리에 미정은 결국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주치의와 환자라는 관계, 그리고 스물 세 살 몸과 그에 못 미치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신의 특별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매번 막내동생 달래듯 하는 과장된 자상함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100번을 훌쩍 넘겨 거의 일상화된 루프 치료는 미정에게는 너무도 뻔하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미정의 케이스에서 루프 진입의 조현병 치료 효과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고집스럽게 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기준을 비롯한 의료진이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루프 안의 세상, 사람들만큼이나.


「자, 언제나처럼 루프 복기를 해 봅시다. 루프 안에서의 기억을 미정씨의 기억으로 체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항상 궁금한 건데—.」


미정이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왜 제 기억으로 체화시켜야 되죠? 매번 루프 진입할 때마다, 저에겐 그쪽 세상이 그저 보일 뿐이예요. 그냥 보였다, 보았다로 남기면 왜 문제가 되는 건가요?」


현기준이 차트를 들고 있던 두 팔을 늘어뜨리고 미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정이 현기준을 똑바로 노려보며 재차 물었다.


「말씀해 주세요. 진입할 때마다 나타나는,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여잔 누군가요? 전 왜 루프 안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그 여자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죠?」


「미정씨, 같은 얘기를 또······.」


「루프에 들어가면 내가 없어져요. 보고 말하고 듣고 느끼지만, 그건 내가 아녜요. 다른 몸에 기생하는 단세포 생물이 되어 버린다구요. 그런데도 의식은 살아 있어 답답하고 괴로운 단세포.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현기준은 한숨을 쉬며, 병실에 대기 중이던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딱하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하며 그들이 주춤주춤 병실을 나가자, 현기준은 미정의 침상으로 다가와 보조의자에 앉아 양손을 깍지끼며 말했다.


「미정씨, 제발 부탁입니다. 미정씨 스스로 미정씨 멘탈이 정상이라고, 그렇게 되어 간다고 믿는 노력이 필요해요. 자꾸, 일부러 분리해서 인식하기 시작하면 일관된 의식을 유지하기 정말 힘들어져요.」


미정의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 말해 주세요. 역시, 분열되고 있는 거죠? 아니, 루프 치료 시작할 때부터, 그 전부터도 원래 분열되어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 여자는 미정씨 본인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구요! 루프 진입 중 모든 브레인 액티비티 측정치가 임계점을 넘고 있어요. 분명히 미정씨의 뇌가 활성화되고 있단 말입니다.」


미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루프 진입시마다 나타나는 또다른 나. 미정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 여자가 미웠다. 그 여자는 루프에만 들어가면 미정의 의식을 깔고 앉아 짓눌러 숨막히게 만들었고, 루프에서 나오는 즉시 의식에서 사라졌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본 것 같기도 하고 강제로 이식한 것 같기도 하며 그저 악몽같기도 한 흐릿하고 불쾌한 기억은 매번 어김없이 남았다. 현기준은 그 기억이 루프 안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미정 자신의 기억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의식적으로 되새겨, 장기기억에 꼭꼭 담아 놓아야 한다고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쉽게 잊혀졌다. 다른 이의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미정의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루프 치료 초기에는 꿈이 잊혀지듯 깨어나자마자 말끔히 기억이 사라지는 통에 루프 복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치료 진입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복기는 차츰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몰래 들여다본 뒤에 그것을 암기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에 미정은 내내 시달려야만 했다.


미정이 울음까지 터뜨리자 현기준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달래는 말투는 여전히 침착했다.


「미정씨,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분명히 미정씨 나아지고 있습니다. 각종 검사 수치와 임상실험 결과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고 그에 근거하여 주치의인 내가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부정해선 안 돼요. 특히나, 이젠 취업도 하고 사회활동도 겸하게 되었으니······.」


「됐어요. 리뷰나 시작하죠.」 미정이 고개를 들고 현기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눈가에는 채 흘러내리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현기준은 후 한숨을 내쉬며 차트를 집어 들었다. 「좋아요. 진입 직후의 일부터 얘기해 보세요.」


「카페에서 장사인씨, 아니 장원장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국민정신건강진흥원······ 이었죠? 진입 후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은 건가요?」


「이쪽 진흥원과 저쪽 플랫폼 루프를 연결하는 핫라인이 개설되었대요. 진흥원 전용으로요.」


「통화내용, 물어봐도 될까요?」


「음, 네······. 뭐, 따로 기밀이랄 건 없는 것 같으니까. 간단한 업무 개요 — 이건 사전에 의료팀에 공유된 위촉장 내용이랑 같았어요 — 및 마인드테크와의 협력 사항, 복지부/진흥원 조직 설명, 동료 ······.」


「잠깐만, 동료라고요? 장사인 원장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경찰 쪽 지원인력이라고 했어요. 플랫폼루프에서 바로 그 사람 만나서 업무를 시작했고, 개인 루프로 이동했어요. 그리고······ 아, 이런······ 어떡해······.」


미정은 두 손으로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얼굴까지 쓸어내린 후, 입을 막고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현기준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 사람을······ 디폴트에 두고 왔어요.」


작가의말

12화 ‘루프 오너' 편에서 시연과 미정을 다시 만나세요!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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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2 kairosc
    작성일
    18.04.15 19:20
    No. 1

    머릿속의 세상을 구현한 상상력이 정말 멋지네요.. 흥미진진합니다.. 다음이야기 기대됩니다.. 와우~
    근데 질문하나 루프 진입기는 벌거벗고 들어가는거 아니었나요? 류미정씨 진입기는 좀 특수한건가요? ㅎㅎ 그냥 읽다가 조금(?)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요.. ㅋㅋㅋ ^^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15 21:26
    No. 2

    아아 이걸 떡밥으로 할까 어쩔까 망설였는데... 주목해주신 독자가 있으니 확실히 떡밥으로 굳혀야겠습니다. ㅎㅎ 다음 주 연재분에서 약간의 힌트가 나올 수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2 23:03
    No. 3

    11화 떡밥리스트:
    16) 미정이 루프 진입할 때마다 나타나는, 미정과 똑같이 생긴 그 여자는 누굴까요? 미정은 왜 그 여자를 미워할까요?
    17) 구한울은 완전 탈의 상태로 진입기에 들어간 반면, 류미정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kairosc 님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5.01 06:49
    No. 4

    멘탈의 분리라... 그건 어떤 의미일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1 10:30
    No. 5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혐오/증오에 시달리던 미정이 방어기제로서 '분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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