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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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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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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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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글자수 :
27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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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2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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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비각성 옵션

DUMMY

한울은 오쿨리 투이 역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정이 접속 해제 문제를 말한 후 덧붙인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청구서만 쌓여 있는 내세(來世)라. 이승의 삶을 끝내야만 갈 수 있는.


차사처럼 나타나 천사처럼 생명 연장을 선물하여 전원 재계약을 달성한 그 영업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미각성 상태의 스피릿들을 회유하여 목표를 달성한 영업 방식의 합법성에는 분명 의문의 여지가 있어 보였지만, 한울로서는 딱히 불법적인 측면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개인 루프에 투입된 마인드테크 영업사원들이 가져온 것은 분명히 오너 스피릿의 서명을 첨부한, 유효기간이 갱신된 합법적인 계약서였을 것이다.


루프 진입 상태, 즉 비각성 상태 스피릿의 의사 능력을 인정할 수 있을까? 행위의 의미나 결과를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겠으나, 그 정상의 효력은 당사자의 세계, 루프 안에 한정될 것임은 분명하다. 마인드루프 영업사원들은 그 효력의 범위를 이세계인 ‘현실’에까지 전용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당시의 허술한 루프 관련 법 체계를 악용한 것이다.


「비각성 진입, 해본 적 있어?」


류미정이 불쑥 뒤돌아보며 한울에게 물었다. 류미정은 한울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한울은 그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온 것으로 착각했다. 무언가 서늘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있을 리 없었다. 머쓱해진 한울은 괜시리 뒷덜미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해봤을 리가 있나요. 개인 루프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치료 목적이 아닌 개인 루프 개설 비용은 일반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류미정도 모르진 않을 터였다.


「하긴 그렇지······. 그래도, 경찰 하면서 혹시 해봤나 해서.」


한울은 피식 웃었다. 「현실 세계를 깡그리 잊고, 무슨 수사를 해요.」


「그건 그렇지만······. 마인드트레인 티켓을 살 때 각성 비각성 옵션을 선택할 수 있거든. 관리나 공무 목적일 경우에만.」


한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여자, 가만 보니 쓸데 없는 일에 괜히 집요하다.


「수사에도 응용할 수 있지 않아? 루프 안 스피릿들에게 절대로 들킬 일 없는, 비각성 상태의 완벽한 잠입 같은 거.」


류미정은 한울의 침묵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결국 한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한울은 다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으면서 루프 안에 들어가는 목표를 상실하는데, 어떻게 임무를 수행해요?」


「사전에 루프 안에서 행동할 시나리오를 짜 넣어야지. 살면서 그럴 때 있지 않아? 분명 내 의지대로 사는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미리 정해진 루트대로 따라가고 있는 듯한 기분. 그걸 루프 안에서 시뮬레이션하는 거지, 최면처럼.」


「없어요, 난. 누가 내 머릿속 건드리는 것도 싫고.」 한울은 냉정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딱 잘라 말했다. 이 말에는 류미정도 질려버렸는지 입을 한 번 삐쭉 내밀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플랫폼루프의 직영 카페를 운영하는 말단이었다면서도, 마인드루프에 관한 지식이나, 비록 어긋난 것일지라도 열정만은 상당했다. 장사인이 국민정신건강진흥원의 첫 직원으로 소위 루프 ‘빠’를 영입했군.


그런데 나이도 꽤 있고, 마인드루프 사업에도 이렇게 열의가 있는데 왜 말단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그보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나이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눈물을 보일 정도면 꽤 상처가 깊은 사연인 것 같고, 그런 사연까지 공유하기에는 너무 이른 관계인 것 같아 이야기 듣는 것을 사양했지만, 지금은 좀 후회가 되기도 했다. 늦었지만 말을 꺼내 볼까. 그렇지만 류미정은 이미 1인용 소파 의자를 열차 방향 쪽으로 돌려 앉아 한울을 등지고 있는 상태여서 다시 말을 걸기는 쉽지 않았다.


한울은 슬쩍 자신의 의자를 90도 돌려 복도 쪽을 바라보게 한 후 다리를 쭉 뻗었다. 기지개를 켜고 나자 머리로 피로감이 몰려드는 동시에 몸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루프 진입 시간이 길어졌을 때 흔히 나타나는 컨디션 불일치였다. 오늘 이미 18시간 이상을 깨어 있었고 루프 진입만도 6시간 넘게 유지했다. 그러면서 마인드트레인 열차로 두 번 이동했고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디폴트까지 갔다 왔다. 지속형 식량 캡슐이 일정 시간마다 영양분을 공급하여 몸 상태는 평균 이상으로 유지되겠지만, 브레인은 아마 그로기 상태일 것이다.


한울은 다시 한 번 두 팔을 번쩍 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반 정도는 일부러 하품도 했다. 마인드루프가 기지개나 하품 동작을 어떻게 해석해 뇌에 어떤 리프레쉬를 전달할 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든 머리의 피로감이 약간은 가시는 기분이 들긴 했다. 그런 후에 새삼 열차 안을 둘러보았다. 오쿨리 투이 역으로 가는 노선을 두 번째 타고 있지만, 이번 열차는 이전의 것과는 실내 분위기가 달랐다.


흰색 의자커버가 씌워진 녹색 1인용 소파 의자가 좌우로 1열씩 늘어서 있고, 앞뒤의 공간은 넉넉하여 각 의자가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푹신하고 안락한 소파 의자는 온통 녹색이었고, 바닥마저도 연두색의 카페트가 깔렸다. 열차 방향의 오른쪽 차창으로부터 출발했던 플랫폼루프의 시간과는 어울리지 않게 오후의 햇살이 실내의 녹색과 어우러져 따뜻한 황녹색으로 환히 비추고 있었으나, 열차답지 않게 꽤 높은 천정의 구석구석까지 밝히지는 못하여 천정 일부 모서리는 어두웠다. 정면으로는 하얀 벽 가운데 역시 하얀 문이 앞 열차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알게 했지만 그 문은 굳게 닫힌데다 손잡이가 없어 왠지 갑갑한 느낌만 주고 있었다.


‘저 문이 아니라면, 이 객차의 비상구는 어디지? 뒤쪽에는 문이 있을까.’


한울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구한울 경위님, 미안해. 아무래도 이 루프 사건은 비각성으로 조사해야 할 것 같아. 자기 스피릿에 타겟(시연이), 파트너(나-류미정 경장), 인명 수색 및 보호, 강력범죄 수사 시나리오 넣어 놨어. 국정원 전담 AI가 다년간의 실제 수사 데이터 분석 후 짠 시나리오니까 믿을 만할 거야. 우리 둘이 혹은 시연이랑 같이 목격했던 사항들도 물론 다 넣었고. 사실은 오쿨리 투이 가는 이 티켓, 비각성 옵션으로 샀거든. 잠 깨고 나서 이 메시지 읽는 순간 비각성 모드 시작될거야. 참, 혹시 몰라서 각성 전환 매직 프레이즈도 설정해 놨어. ‘카페 언디파인드에서 커피 한잔 하시죠.’ 이 말을 누군가에게 듣거나 자기가 말하게 되면 즉시 각성 전환돼. 이 메시지 읽고 있을 때는 아니구. 다시 각성했을 때, 너무 화내기 없기야. 자긴 화낼 때 좀 못생겨지거든.


한울은 주머니에서 꺼내 든 어느 카페의 명함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면에는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메모가 한 장 가득했고, 뒷면은 카페 상호명과 대표자 이름, 그리고 문구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한울은 말없이 재킷 안주머니에 명함을 도로 넣었다. 그리고, 앞자리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류미정의 어깨를 두드려 깨웠다. 류미정은 잠이 잘 깨지 않는지 부은 눈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리더니, 한울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혹시······?’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한울이 말했다. 류미정이 다시 눈을 깜박였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첫 사건 잘 해보자, 파트너.」



*



한울과 미정이 내리고 난 후에도 객차 안에는 내리지 않고 남아 있는 승객이 한 명 있었다. 조금 전 한울이 궁금해했던 흰 문은 손잡이 없이도 자동으로 열렸고, 그 문을 통해 내린 둘은 한참 뒷자리 구석에 홀로 앉아 있던 이 승객을 보지 못했다.


그 승객은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여자였는데, 목이 높이 올라온 긴팔 구식 남보라빛 원피스를 입고, 같은 컬러의 장식 없는 카플린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꼬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뭔가를 계속 읽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읽고 있는 것 외에도 도착 전부터 꺼내 놓은 각종 책자며 노트들이 조금 어지럽게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직전 객실 점검을 위함인지 차장이 뒤쪽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승객이 뜻밖이었는지 여자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님, 이 열차는······.」


「아 네, 알고 있어요.」 여자가 앉은 채로 차장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얼굴 전체가 환하게 웃고 있지만, 두 눈동자만은 마치 얼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역에서 내립니다. 오늘부터 왕복 확장 노선 개통하는 거 맞죠?」


차장이 빙그레 웃었다. 「네, 맞습니다. 역 이름은······.」


「오쿨리 메이. 나의 눈, 이라는 뜻이죠.」 여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호오, 잘 알고 계시네요.」


「네.」 움직이지 않는 여자의 눈이 빛났다.


「제가 세운 역이니까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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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성 옵션 +2 18.04.26 613 6 9쪽
29 동그라미 이어서 +2 18.04.26 569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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