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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229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2 10:00
조회
549
추천
8
글자
7쪽

모든 것이 하얗게

DUMMY

「세상에.」


오쿨리 투이 역 대합실에서 나와 역전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본 순간, 한울과 미정의 입에서는 똑같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너무 예쁘다! 그렇지 않아?」


미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울은 세상이 이렇게 구성될 수, 아니 그려질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한울과 미정이 보고 있는 전경은 실제로 한 폭의 유화였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차용하는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그림이었다.


「이건··· 진짜 그림이잖아요. 어떻게 세상이 이럴 수가···.」


한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다시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의 대부분을 오후의 태양이 비추고 있었는데, 역사 건물과 맞닿은 면은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작 태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새파란 하늘과 솜털 같은 구름의 높은 콘트라스트로 그 존재와 영향력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역 건물은 흰색과 회색을 사용했지만 벽돌선을 진한 검은색으로 그려넣었고, 광장의 바닥은 연한 녹색을 주로 하여 햇볕이 비치는 쪽은 약한 오렌지색이 포함되었다.


사물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금방 채색을 한 것처럼 붓터치가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물은 멀리서는 형체만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했지만 가까이 갈수록 얼굴의 형태와 안색이 명확해져 표정과 감정이 살아났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정지된 그림에서 느껴지는 시간적인 위화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붓터치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발하는 형태와 색을 뽐내며 그 삶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마치 애니메이션 스크린 속으로 뛰어 들어온 것처럼 화려한 활기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굉장해.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림 속 세상이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키텍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


「이걸 다 아키텍트가 그린 거라고요?」


「그렸다기보다 상상한 거지. 아키텍트의 시각에서 마인드루프는 상상을 현실로 옮겨 주는 하나의 도구야. 화가라면, 붓이나 물감, 캔버스 같은 것.」


「현실이라기에는 리얼리티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어머 왜? 그림은 화가의 마음 속에 현실을 비춘 것이고, 이 루프는 그 이미지를 다시 현실화한 거잖아. 엄연한 현실이지, 이 루프 안에선 말이야.」


「어쨌든 난 너무 적응 안 되네요. 꿈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이 루프 아키텍트가 의도한 걸지도 몰라.」


미정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유화 물감 냄새가 풍기는 것만 같아 짐짓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한울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



자전거는 포기하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자전거 자물쇠를 끄르면서 시계를 보니, 어제 — 라고 생각되는 날의 이맘 때 — 출발했던 바로 그 시각이어서 갑자기 불길해졌기 때문이다.


오쿨리 투이 역으로 가는 버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본 장소들이 대충 생각났고, 시연이 가보지 못했을 뿐이지 역이 아주 변두리에 위치한 것도 아니었다. 오가다 한번쯤은 지나쳤을 수도 있는 장소인데, 어제는 왜 그렇게 낯설고도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버스의 차창 밖으로 비치는 거리의 풍경도 어제와 비슷했다. 아니, 버스가 어제 시연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친 그 거리를 그대로 지나고 있었으므로 풍경은 아주 똑같았다. 그렇지만 그림같았던 그 풍경이 이제는 하나도 아름답게 보이질 않았다. 왠지 음산하고 우울하기만 했다. 반면, 적막해보일 정도로 한산했던 도로에는 자동차가 꽤 있었고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드문드문 행인들이 보였다. 차들은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고 행인들의 낯빛은 칙칙했다.


차내 방송이 다음 정류장 도착을 알렸다. 오쿨리 투이 역 앞이긴 하지만 정류장은 다른 이름이었다. 시연은 불안한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끔찍한 기억의 그 순간 트럭이 달려온 방향을 창문 너머로 내다 보았지만, 그쪽 방향의 도로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휴··· 신경과민이 될 지경이야. 역시, 사고도 꿈이었나?’


이렇게 생각하고 시연이 눈을 감았을 때, 버스는 네거리에 들어서고 있었다. 시연이 확인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어제의 그 트럭이 속도를 높이며 중앙선을 넘어 달려왔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버스 앞유리를 향해 트럭이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앞유리 너머로 트럭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엄청난 긴장으로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뜨고, 핸들을 부숴버리기라도 할 듯 꽉 잡은 양 손에는 핏줄까지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아아 저 사람. 저 사람 괜찮을까.


충돌하는 순간, 앞유리창이 깨지며 토해내는 유리 조각들 하나하나가 시연의 시야에 들어와 꽂혔다. 연이어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허공에 산산이 퍼진 유리 조각들이 이번엔 날아가는 시연의 몸에 들어와 꽂혔다. 마침내 비행이 끝나고, 몸이 뒤집힌 상태 그대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뚜둑, 하고 건조하게 들렸다. 온몸에 유리조각이 박히며 찢어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구겨진 버스 앞문을 통해 한 남자가 다급히 버스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문이 잘 열리지 않는지 깨진 유리창 틈을 통해 간신히 운전사, 그리고 시연의 상태만 확인한 것 같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와 또 한 여자가 서로를 향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남자는 붙잡고 있던 버스 앞문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잠시 후 끼깃, 하는 금속성의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바깥 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자그마한 몸집의 한 여자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시연 쪽으로 몸을 굽혀 잠시 살펴보더니, 다시 허리를 펴고 깨진 앞유리창을 통해 밖을 잠깐 내다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백을 뒤져 뭔가를 꺼내 손에 들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곧이어 생전 처음 듣는,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조금씩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



그러고나서 침대에서 눈을 번쩍 떴다. 아침 8시 3분이었고, 시연은 비로소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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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인들 +4 18.04.12 612 9 10쪽
» 모든 것이 하얗게 +3 18.04.12 550 8 7쪽
7 시간 오류 +3 18.04.11 585 7 10쪽
6 카페 언디파인드 +1 18.04.11 578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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