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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264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3 10:00
조회
525
추천
7
글자
8쪽

디폴트

DUMMY

죽은 건 아닐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목숨이 끊어지나?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나? 그런 것도 아니야.


그럼 지금, 기절한 건가? 그것도 아니야. 이렇게 의식이 또렷한데.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려. 몸을 꼼짝할 수도 없어. 아니, 몸이란 게 있나? 뭐 느껴지는 게 있어야지.


역시, 죽은 건가? 누가 날 죽였지? 지금 이 상태는 도대체 뭐지?


— 디폴트.


한울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검은 정적을 깨고 던져진 한 마디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소리도 말도 아닌, 그야말로 그냥 한울에게 와 닿은 한 단어일 뿐이었다. 들린 게 아니라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한 조각과도 같은.


— 자기, 괜찮아?


— 나 류미정이야.


생각이 연달아 떠올랐다. 류미정이 어딘가에서 말하고 있나? 소리가 들렸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울은 주위를 둘러 보려 했지만, 움직여 둘러볼 자신의 머리와 목이 느껴지질 않으니 전혀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 우린 지금 디폴트 상태에 빠졌어. 우리가 있던 루프의 오너가 죽은 것 같아.


— 디폴트지만 나하고는 통신할 수 있어. 내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내게 할 말을 떠올려 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없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글자와 단어들의 순서를 맞추어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미정의 ‘말’로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만도 혼란스러워 머리가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 익숙하지 않겠지만 생각을 문자로 표현해서 다시 떠올려야 해. 현재의 프로토콜은 브레인 신호까지는 안 되고 텍스트 데이터 전송만 지원하거든.


한울은 전달된 미정의 말대로 글자와 단어를 생각하고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지금 여긴 어디죠?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요?


— 좋아. 수신되고 있어. [여기, 어디], [너, 어디], [죽음], [나가다], ··· 이런 단어들이 오고 있어.


— 조금 더 집중해서, 문장으로 정리해서 보내 봐. 글자나 단어 수준은 건너뛰고, 문장으로 묶어서 떠올리면 돼.


다시 떠오른 미정의 문장들에 한울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괴상한 형태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는 거로군. 그녀도 나도.


— [다행, 입니다, 괜찮아요, 무사해서]. 어머 이 상황에서 나까지 걱정해주는 거야? 고마워. 근데 사실 무사하다고 할 순 없는데. [디폴트, 라고요. 여기가]. 응. 디폴트는 루프가 갑작스럽게 정지 또는 종료되었을 때 진입해 있던 브레인 스피릿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야. 육체에서 루프로 돌려져 있던 브레인의 모든 감각 신경계가 갈 곳을 모르고 열려 있는 거지. 그야말로 진정한 무의 세계에 퐁당 빠져 버리는 거라고 할까.


미정의 설명이 길어지자 한울의 의식 속에서 명멸하는 단어들이 증가하고 그 속도도 빨라졌다. 산만해져가는 정신을 다잡고 다시 문장을 전송하기 위해 노력했다.


— [어떻게, 대화가, 가능]. 그럼 어떻게 나랑 대화가 가능하냐고? 자기는 내가 시킨대로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전용 진입장치를 썼잖아. 세 번째 척수 케이블이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는 거야. 말하자면 나랑만 직접.


미정과 일대 일로 직접 뇌가 연결되어 있다니. 뭔가 야릇한 기분이다.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때의 기분을 기억해낼 도리는 없지만.


— 너무 부끄러워하진 마. 척수 인터페이스끼리 연결되었을 뿐이니까. 그것도 마인드넷을 통해서 말이야.


[어떻게, 나가야 하죠? 여기서]


— 커뮤니케이션 스킬 많이 좋아졌네? 그럼 이제 에코잉은 그만 할께. 음. 디폴트 상태에서 자력으로 깨어나거나 다른 루프로 이동할 방법은 없어.


한울은 떠오른 문장을 의심했다.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 상태에서 영원히?


[영원히- 이- 상태로- 여기서?]


— 뭐, 외부에서 우리가 디폴트 상태에 빠졌음을 감지하고, 강제로 깨우면 되긴 해.


[가동 중인 진입기가 있는 큐비클에는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잠금 장치에 의해서도, 법에 의해서도.]


— 알아. 알아. 근데 나는··· 진입 중에 모니터링 하는 팀이 있거든. 일정 시간 간격마다 모니터링을 하니까··· 곧 발견하겠지.


[그럼, 전, 어떡합니까]


— 자기도 직원용 진입소에 있으니까, 경비 아저씨가 발견하겠지? 자정 전에 불 끄려고 한 바퀴 돌지 않아?


[자정까지 이 괴상한 상태로—. 그리고 경비가 어떻게 루프 진입을 해제합니까! 큐비클에 들어올 수도 없는데!]


— 그런가? 그래도 왜 느낌표를 쓰고 그래에. 알았어, 내가 먼저 나가서 어떻게 해볼—.


[뭐라고? 여보세요? 이봐요, 이봐!]


갑자기 전송되던 문장이 끊어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단어도, 문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울은 디폴트의 무한한 고요 속에 다시 홀로 남겨졌다.



*



침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울은 홀로, 미정이 디폴트라고 불렀던 이 상태를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세상과 단절되었다. 오직 나라는 의식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확실하지만 그 존재를 믿기 위한 증거, 실재하는 세계와의 증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아니, 나는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던 골치 아픈 주제를 생각하고 있음에도, 한울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즐거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디폴트의 고요처럼, 완전히 비활성화된 그의 감각체계와 함께 감정 역시 무뎌져 갔기 때문이다. 미정과의 통신이 끊어지던 순간의 당혹감과 분노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고, 혼자라는 외로움이 찾아왔다가 물러가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혈육이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치맛폭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로 자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저 말 그대로 타인이 아닌, 한울의 세상에 속하여 일체감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울은 어머니가 사라졌다기보다는 그와 어머니가 유지하던 한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그리고 한울에겐 새 세상이 시작되었다. 한울 혼자와 나머지 타인들이 존재하는 세상. 그래서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낀 시간은 잠깐이었다. 한울과 어머니의 세상이 계속되면서 어머니가 없다면 외로웠겠지만, 애초에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외로움은 대상의 존재가 부재로 변화하면서 발생한다. 처음부터 시작된 부재는 외로움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거기에 더하여 혼자 세상 일에 치이며 싸우며 살아가다보니, 애시당초 인간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울에게 이미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 엄마, 난 왜 아빠가 없어?


— 한울이에겐 엄마가 있잖아.


— 다른 애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따로 있는걸.


— 한울아. 사람에게는 원래 엄마만 있어. 그런데, 엄마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런 때만 따로 아빠라는 사람을 데려오는 거야. 근데, 엄마는 한울이랑 둘만이라도 너무나 행복하거든. 한울이는 안 그래?


— 어··· 나도.


어머니는 어린 한울을 꼭 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게 네 디폴트야, 한울아.



아뇨, 나에겐 나 혼자가 디폴트일지 몰라요.


그런데 더 이상은 혼자 충분히 행복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


작가의말

오늘 자 공지를 확인하시어,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함께 ‘디폴트'를 체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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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폴트 +3 18.04.13 525 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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