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랄프C의 서재입니다.

나인스카이즈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270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26 07:05
조회
569
추천
6
글자
9쪽

동그라미 이어서

DUMMY

침대에서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하지만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시연의 움직이지 않는 눈을 부시게 했다.


실제로는 ‘눈부신 느낌’이란 신호를 내 뇌에 보내주고 있을 뿐이야, 마인드루프가.


언제부턴가 시연은 마인드루프에 진입할 때마다 루프 안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런 류의 냉소를 중얼거리곤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임을 잊게 될까봐.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찾아오는 절망의 크기를 줄여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반복되는 루프 진입과 복귀의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반복되는 시각의 복구와 재상실은, 거듭될수록 시각 외 다른 모든 감각의 신뢰성까지 의심하게 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튜링 역 정인철의 사무실이었다. 정인철은 보이지 않았다. 시연은 몸을 일으켜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진료용 침상에 걸터 앉았다.


또 꿈을 꾸었다.


언제부턴가 시연이 마인드루프 진입할 때 원인 모를 시간 지연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현실과 플랫폼루프는 1:1 시간비가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지연이 발생할 때는 현실의 진입 시간과 플랫폼루프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꽤 차이가 났다. 처음에는 5분, 10분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30분 이상, 심할 땐 두세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꿈을 꾸었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 그녀의 루프에서 살아가는 꿈을.


처음엔 불필요하게 시간만 잡아먹는 이 꿈이 짜증나고 불쾌했다. 진입 시간 지연이 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것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더욱 아까웠다.


시연에게는 마인드루프에서 하는 일과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가상일지라도 시연에게 두 번째로 주어진 빛의 세상이었다. 그 축복을 일 분 일 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그 시간을 낭비로 치부해 버린 마음의 저변에는 시기심과 열등감이 있었다. 그녀는 꿈 속의 어린 자신을 질투했다. 그 아이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시각 중추가 멀쩡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볼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연이 마인드루프 안에서 절치부심하며 그리고 만든 세상을, 그 아이는 아무런 댓가 없이 보고 듣고 느끼며 향유하고 있었다.


윤시연은 열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었다.


자전거에 앉은 그녀가 찢어지는 듯한 클랙슨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시연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돌진하고 있던 것은 짙은 주홍색 대형 트럭의 전면이었다. 출차한 지 얼마 안 된 그 트럭은 천만다행으로 브레이크 상태가 매우 좋아, 시연의 몸을 가루로 부숴 버리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몸을 안장 위에서 튕겨내고 머리부터 떨어지게 하여, 땅에 부딪힐 때의 충격이 시각 중추를 뒤흔들고 그것을 박살내 버리는 데는 충분했다.


2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났을 땐 이미 암흑의 세계가 시작된 후였고, 그녀의 뇌리에 남겨진 최후의 이미지는 진홍색 TANTAN사 대형 트럭의 전면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도 결국 점차 세월에 짓이겨져 희미해져갔다. 시연 스스로도 끔찍한 그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려 노력했다.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기 위해 개인 루프의 모든 자동차 시뮬레이트를 승용차와 버스로만 설정했다.


덕분에 트럭이 관계된 모든 건축 물류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해져 시연의 루프에서는 중소 규모 이상의 건축은 매번 루프를 멈추고 오너 아키텍트인 시연이 직접 구조물이나 건물을 그려 넣어야 했다. 건축/건설 자동화 옵션을 사용하지 않은 루프 건축은 무척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지만 자신의 포트폴리오 루프에 가장 끔찍한, 잊고 싶은 이미지를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온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 그 지연, 그 꿈 때문에.’


사고 후 20년 동안 지워버리려고 몸부림쳤던,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 시연의 의식 저편 심연 밑에 가라앉은 공포를 억지로 깨워 수면 위로 끌어올리곤 했던 그 저주받을 트럭이 다시 꿈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첫번째에서는 20년 전과 같이 자전거에 타고 있던 시연을 들이받았고, 그때와는 다르게 시연은 결국 사망했다. 꿈속이었지만 그 끔찍했던 고통을 또 한 번 겪었다. 어찌나 충격이 심했던지 진입은 실패하고 패닉 상태로 다시 깨어나고 말았다. 깨어난 직후였는데도 꿈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시연은 자신에게 왜 그런 발작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기억나는 것은 결국 그 트럭 뿐이었다.


첫번째 꿈 속 사건을 정인철에게 호소하자 그는 다음 진입때 함께 동행해 주었다. 그런데 하필 그 진입때 또 지연이 있었고, 꿈을 꾸었고, 트럭이 나타나 타고 있던 버스와 정면충돌하여 시연을 죽게 했다. 그래도 정인철과 동행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패닉은 없었고 진입 역시 매끄럽게 성공했다.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꿈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트럭과 함께 트럭의 운전사가 기억났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정인철이었다. 왠지 불길한 꿈 같아 그 사실만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정인철은 두 꿈 모두 걱정할 필요 없다며 시연을 안심시켰다.


— 아, 왜 이렇게 안 믿어. 신경외과가 아니라 정신과를 전공으로 했어야 했나.


— 그럼, 내 눈 수술은 어떻게 해 주려구요.


— 그런가, 하핫. 어쨌든 신경 쓸 것 없어. 수술 앞두고 받는 스트레스가 꿈으로 나타난 것 뿐이야. 그리고 죽는 꿈은 반대라잖아.


— 반대라면, 뭐 말예요?


— 재생이나 부활.


시연은 그때 재생과 부활을 자신있게 말하던 정인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자신감과 여유는, 진짜였을까. 그 돌진하는 트럭에서 당신, 무섭도록 긴장하고 있었는데. 곧 죽을 걸 알면서도, 나보다 당신이 걱정됐어. 당신, 괜찮은 거지. 당신, 별 일 없는 거지. 당신,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시연은 갑자기 못 견디게 정인철이 보고 싶어졌다. 말 그대로 뼈저리게 보고 싶었다. 시연은 정인철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루프 안에서 시연이 보는 것은 마인드루프가 스캔된 그의 몸을 시연의 뇌에 뿌려주는 이미지일 뿐이었다.


수술을 받고 시각을 찾아 제일 먼저 그를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 그의 눈, 그의 가슴, 그의 팔, 그의 어깨, 그의 허리, 그의 다리······ 그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처음부터 다시 그를 느껴 보고 싶었다. 마인드루프가 매개하지 않은 진짜 정인철을.


두려웠다. 나는 진짜로 그를 보게 되면, 그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시각 이미지가 아닌 진짜의 그를. 그라면?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시각 이미지가 아닌 진짜의 나를. 눈동자가 살아 움직이는 나를.


그가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는 유리알 눈동자의, 윤시연의 시각 이미지일 뿐 아닐까. 마인드루프 밖의 나는, 그리고 그는 어떤 존재일까. 밖은 어떤 세상일까. 나는 다시 거기에 속할 수 있을까.


정인철은 얼마 전, 수술 전 필요한 시술에 대해 얘기해준 다음 메모 한 장을 건네주었다.


— 내가 쓴 건 아니야. 여동생 읽는 시집에서 베꼈어.


직접 자필로 쓴 다음, 점자 사전을 찾아 가며 점자로 다시 썼다고 했다. 두툼한 점자 용지 메모지를 건네 받으며 더듬어 잡은 그의 손이 평소 같지 않게 따뜻했다.


— 지금, 있는 그대로의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어.


정인철은 그렇게 말했다. 시연은 눈을 감고, 재킷 주머니를 뒤져 메모지를 꺼내어 글자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올렸다. 루프 안이었으므로 보고 읽을 수 있었지만, 정인철과 그의 마음을 떠올리기엔 이 방법이 더 나았다. 이 글귀에 손가락을 짚어 하나씩 읽어 가면 정인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시구를 점자로 적은 메모지를 건네며 시연의 손을 잡은 채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정인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 순간 전해진 그 모습, 오직 그것만이 그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었다.


시뮬레이트 눈물이 한 방울 얼굴 위를 구르며 떨어졌다. 진입기 안에 누워 있을 진짜 나도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시뮬레이트가 아닌 진짜 눈물을.


— 우리 동네 그림 그린 새하얀 도화지에

— 동그라미 두 개 그려 기차역을 만들었네


— 너의 눈인 너의 역에 가고 싶은 나는 없네

— 나의 눈인 나의 역에 보고 싶은 너는 없네


— 동그라미 그려서 가보지 못한 역 짓고

— 동그라미 이어서 가보지 못한 길 내어


— 그 길 따라 그 역으로 내가 가고 네가 오고

— 너의 눈엔 내가 있고 나의 눈엔 네가 있게


— 나는 떠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 따라.

— 너도 떠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역으로.


작가의말

구한울/류미정/윤시연이 모두 움직입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 을 클릭하여 지금, 확인하세요!

선작 고정! 매일 한표! 추천 한방!

.

.

.

.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인스카이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5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5. 빛의 여제(1) +2 18.04.30 642 7 15쪽
34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4. 진료 기록 +2 18.04.29 577 7 10쪽
33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3. 외계인에 관한 변명 +2 18.04.28 581 7 10쪽
32 이니셔티브 +2 18.04.27 603 6 10쪽
31 마인드테크 개발자 컨퍼런스 2트랙(마인드루프 운영 실무) 3세션: 실시간 스피릿 백업 +2 18.04.27 616 6 12쪽
30 비각성 옵션 +2 18.04.26 613 6 9쪽
» 동그라미 이어서 +2 18.04.26 570 6 9쪽
28 안전한 접속 해제의 문제 +2 18.04.25 576 6 7쪽
27 불법 사용자 색출의 문제 +2 18.04.25 582 8 8쪽
26 양날의 검 +2 18.04.24 597 6 7쪽
25 소환 +2 18.04.24 595 6 10쪽
24 펜로즈 고객지원센터 +4 18.04.23 654 4 14쪽
23 비동기화 +3 18.04.22 620 6 9쪽
22 무의식의 지령 +3 18.04.21 535 6 9쪽
21 빙의(憑依) (2) +3 18.04.20 534 6 7쪽
20 빙의(憑依) (1) +4 18.04.20 569 6 8쪽
19 이진수 (2) +5 18.04.19 565 6 7쪽
18 이진수 (1) +5 18.04.19 538 6 9쪽
17 저쪽의 나 +6 18.04.18 524 7 9쪽
16 두 의사 +5 18.04.18 554 7 11쪽
15 금기(禁忌) +5 18.04.17 559 8 8쪽
14 함정 +5 18.04.17 507 6 7쪽
13 시뮬레이트 +5 18.04.16 548 7 8쪽
12 루프 오너 +3 18.04.16 505 8 9쪽
11 병실 +5 18.04.13 574 8 8쪽
10 디폴트 +3 18.04.13 526 7 8쪽
9 연인들 +4 18.04.12 612 9 10쪽
8 모든 것이 하얗게 +3 18.04.12 550 8 7쪽
7 시간 오류 +3 18.04.11 585 7 10쪽
6 카페 언디파인드 +1 18.04.11 579 8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