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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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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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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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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저쪽의 나

DUMMY

휴대폰의 벨소리가 큐비클의 정적을 깨고 현기준의 귀를 때렸다. 인철이 나간 후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기준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빨리 와 보셔야겠습니다.」 짐작한 대로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의국, 류미정을 담당하고 있는 수련의였다.


「무슨 일인가?」 이렇게 말하면서 기준은 이미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새 베드에서 좀 쉬겠다고 해서 옮기게 했는데··· 의국에 잠시 다녀온 사이 자가 진입을 한 모양입니다.」 진입기 일체형 베드에서 자는 척 하면서 다시 루프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이런······ 모니터링은?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거야?」


「진입기 단말을 확인하니, 약 14분 정도 지난 것으로 보입니다.」


「환자, 식사는 좀 했나?」


「아뇨, 안 한 모양입니다.」


「난감하군. 이전 진입 때도 공복상태였는데. 어쨌든 지금이라도 모니터링 개시하고, 5분마다 디폴트 체크하도록 해.」


류미정은 자신의 동료가 정신건강센터의 직원용 진입소를 통해 진입했고, 함께 디폴트에 빠졌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겠노라 류미정을 일단 진정시킨 후, 정인철의 진료실로 오면서 직원용 진입소에 들러 확인해 보았지만 큐비클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그 친구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드물지만 디폴트로 빠지자마자 운 좋게 깨어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더 드물게는, 루프 오너의 죽음으로 디폴트로 빠졌을 때 루프 오너가 극적으로 회생, 다시 원래의 루프로 복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고 정식으로 보고된 케이스도 없다. 다행히 류미정의 동료는 전자에 해당, 이미 큐비클을 나와 건물을 나간 것 같았다.


류미정에게 그것을 알려준다는 것을 깜박 잊고 인철의 모니터링을 시작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자가 진입하여 그 동료를 찾으러 간 모양이다. 디폴트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외부에서 깨워 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거의 유일한 방법인데, 무슨 생각으로 다시 진입을 한 걸까? 미정은 조현병 치료 중인 환자지만, 마인드루프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에 그녀 이상의 전문가는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융통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류미정이 마인드루프에 관련하여 내린 결정이라면 뭔가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류미정······ 오랫동안 치료해 온 환자지만 기준은 아직도 그녀를 다 알지 못했다. 환자로서도, 여자로서도, 그리고 AI로서도.



*



미정이 튜링 역 진입기 큐비클을 나오며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허기였다. 출근 첫날이라 긴장이 됐는지 입맛이 없어 아침을 걸렀다. 디폴트에서 나오면서 깨어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했지만, 루프 안에서 먹는 것은 어차피 의미가 없다. 루프가 뉴런을 자극하여 맛과 포만감을 시뮬레이트해준다 하더라도 화학적 영양소를 현실 세계의 육체에 제공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미정은 너무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바로 진입했더니 고지식한 마인드루프는 그 상태 그대로 배고픔을 시뮬레이트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으로라도 일단 이 허기를 달래야 했다. 튜링 역 대합실로 나와서 망설임 없이 카페 언디파인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생각 좀 해 봐야겠어. 오늘 일은 도통 뭐가 뭔지—.’


미정은 비워 두었던 카운터 자리에 앉아 마구잡이로 가지고 온 쿠키며 초콜렛, 샌드위치를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이긴 하지만 탄수화물이 들어가니 그나마 뇌가 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지금 먹고 있는 탄수화물 시뮬레이트가 미정의 몸에서 실제로 포도당으로 변환되어 진짜 뇌로 공급될 일은 없겠지만.


진흥원장 장사인은 첫날인데도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문자메시지로 일감만 던졌다. 미정아 미안하다. 곧 네 파트너가 될 친구와 면담을 해야 해. 내가 잘 얘기해 둘 테니, 플랫폼루프에서 만나서 업무 개시하도록 해라. 좋은 팀이 될 거다.


좋은 팀이 될 거라던 파트너 구한울은 생각보다 마인드루프 경험이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서 잘난 체나 하고. 인물 값 하려는지 까칠해서는. 저쪽의 나랑 비슷해.


‘저쪽의 나’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찬 우유 시뮬레이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말 싫어. 밖에서 난 대체 왜 그럴까.


‘저쪽의 나’가 징징거리는 것이나 현기준을 제외한 의료진이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미정의 인격이 이쪽과 저쪽, 마인드루프 안과 밖으로 분열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건 주치의 현기준을 포함하여 누구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당사자 미정을 제외하고는. 문제는 당사자인 미정이 현실 세계에서는 무슨 일인지 루프 안의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여, 자꾸 다른 인격이니 분열이니 하며 분리하려 한다는 점이다. 현기준만은 어렴풋이나마 이 점을 짚고 있었다.


자기는 ‘좋은 나’, 나는 ‘나쁜 나’라는 거야? 나쁜 계집애. 나한테 먹혀 버릴 것 같으니깐 방어기제랍시고 발동시키는 거지.


사실 미정은 오래전부터 이미 자신의 정신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과 사례로 논문을 하나 써도 충분할 만큼 자신이 있었다. 감은 잡고 있으나 미정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도리는 없는 주치의 현기준은 아는 것만큼 말주변은 없어서 확진을 못 내리고 저쪽 미정이나 다른 의료진에게 자꾸 흔들리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세상에서 나 다음으로 나를 잘 아는 사람인데.


그나저나, 저쪽에서 자꾸 분리하려고 떼를 쓰니 나까지 물드는 것 같아. 어머, 이것 좀 보라지. 지금도 ‘저쪽’이라는 말을 쓰고 있잖아. 나는 이제 하나인데, 어떤 이유로든 아직도 나 스스로 나를 분리하려고 하고 있어. 저쪽에서만. 그래, 그땐 그랬지. 나뉘어져 있을 때가 있긴 했어. 근데 그것조차 원래 하나였던 거였잖아. 왜 넌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서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는거야? 나를 떼 내고도 네가 온전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정은 화가 치밀어올라 우유팩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허공에 휘둘렀다. 우유가 테이블 위와 미정의 앞섶에 온통 튀었지만, 닦을 생각도 않고 혼자 씩씩대며 계속 먹고 마셨다. 처음엔 허기를 달래려고 먹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분통을 참을 수가 없어 먹고 있었다. 뭐 어때, 여기선 암만 먹어도 살도 안 찌는걸. 내 카페에서 이럴 게 아니라 플랫폼루프 시내로 나가 제대로 먹을걸. 미슐랭 레스토랑 마인드루프 지점들이 즐비한데.


근데 나, 밥도 안 먹고 이번 진입 왜 한거지? 아, 파트너 구하러 들어왔지. 디폴트에 빠진. 음, 디폴트에 빠진 사람을 무슨 수로 구해? 그것도 루프 안에서. 아 젠장, 저쪽 나는 무슨 생각으로 무단 진입을 한 거야? 아니아니, 이러면 안 돼. 내가 결정했던 일이고, 내가 들어온 거야.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다시 들어오려고 했더라? 뭔가 실마리가 떠올랐으니 앞뒤 안 가리고 들어왔겠지······?


루프에서 나올 때마다 루프 안의 기억을 잘 못하는 것처럼, 루프에 진입했을 때는 현실 세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아 힘들었다. 현실에서는 현기준과 복기라도 해서 그나마 루프 안의 기억을 다져 놓지만, 지금은 현기준도 없으니 미정 혼자 낑낑대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금방 재진입을 했으니,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현기준과 간단한 복기를 하다가, 파트너 얘기를 했지. 그때 비로소 디폴트가 생각났고, 현기준한테 말했어. 그는 자기가 직접 확인해보겠다고 했고, 나는 그가 정신건강센터 직원용 진입소,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전용 진입기를 썼을 거라고 했지. 그러고는 병실이 비었을 때, 진입기 겸용 침상을 바라보았는데······ 최신형······ 전용······.


다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물을 쪽쪽 빨아먹다가, 미정은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이윽고 빨대를 입에서 떼고 촉촉한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은— 세 가닥 케이블 진입기를 썼어.


작가의말

미정은 어떻게 구한울을 찾을까요? 누구의 도움을 받을까요? 

‘>’ 를 클릭하고 18화 ‘이진수(1)’ 편에서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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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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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18 09:22
    No. 1

    이 회차는 4월 15일 11화 '병실' 편 댓글로 kairosc 님께서 지적해주신 떡밥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한울은 어떻게 된 걸까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9 12:05
    No. 2

    17화 떡밥리스트:
    28) 세가닥 케이블 진입기를 썼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29) 한울은 정말 엑싯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맘세하루
    작성일
    18.05.01 22:27
    No. 3

    마인드 루프도 식후경이군요.ㅎㅎ 홧팅,홧팅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1 22:48
    No. 4

    넵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5.07 09:38
    No. 5

    가끔씩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그때 내 속에 다른 인격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리..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7 21:25
    No. 6

    ㅎㅎ 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미정의 멘탈에 대해서는 차기작에서 자세히 다뤄볼 예정이었는데... 지금 연재 상태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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