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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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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278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7 19:05
조회
559
추천
8
글자
8쪽

금기(禁忌)

DUMMY

「함정이라고?」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정을 뜨악하게 쳐다보았지만, 이렇게 물은 것은 한울이었다.


「그래. 두 번의 교통사고에서 모두 시연이가 피해자였고, 첫번째는 아예 시연이가 표적이었어. 장소도 두 번 모두 여기 오쿨리 투이 역 앞 네거리고. 시연이는 그 메시지의 지시에 따라서 그 장소로 오는 도중에, 거의 다 와서 사고를 당했고.」


「그런데?」


「시연이가 그 장소에 있어야만 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 거기로 끌어내기 위해 그런 감상적인 메시지를 남긴 것이고.」


「이해가 안 돼요.」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던 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꼭 쥔 두 주먹이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테이블이 흔들려 한울의 남은 커피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내가 왜 굳이 나 자신한테 이런 짓을······.」


「글쎄. 예지몽에, 자살 충동 같은 건가? 스스로 사고에 뛰어들라는 무의식의 지령?」 미정이 자신의 컵을 들어올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시연이 발끈하며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올라갔다.


「언니······. 어떻게 그런 말을······.」


「말이 심하잖아. 생각 좀 하고 말해.」


보다 못해 한울이 끼어들었다. 시뮬레이트의 태도가 냉소적으로 바뀐 걸 보니 시연은 지금 심적 혼란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정시킬 대상은 미정이 아니라 시연이겠지만 실제로 무례를 범한 시뮬레이트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시연은 한참 동안 주먹을 꼭 쥐고 어깨를 치켜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분을 쉽게 가라앉힐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만 하지. 함정은 몰라도, 자살 얘기는 말이 안 돼.」 한울이 이렇게 말하며 미정을 쏘아보자 미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안. 잘 몰라서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다보니—.」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흘러내리기 전에 재빨리 양 손으로 훔쳐낸다.


「괜찮아요.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한울과 미정은 이 말을 듣고 둘 다 흠칫했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니? 그럼 너······.」


「그런 생각 안해본 건 아니라구요. 다들 그러지 않아요? 제 나이 땐······. 그렇다고 언니가 말한 것처럼 진짜 자살을 시도했던 건 아니구요. 그냥 생각만요, 생각만······. 아니, 살짝 해본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마인드루프에서 자살은 각성 못지 않은 금기사항이다. 마인드루프 초기에는 몇몇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자살이 루프 탈출의 한 방법으로 쓰인 적이 있긴 했다. 물론 이론적으로 루프를 탈출하여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은 가능했지만, 많은 경우 현실의 브레인이 자살로 인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제 사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당시 이러한 자살 포함 살인, 테러 등 마인드루프 내에서의 생명경시 현상은 결국 첨예한 사회이슈가 되기도 했다. 급진론자들은 자살 역시 인간 존재와 의지 실현의 한 방식일 뿐이므로 마인드루프에서도 이를 동일하게 시뮬레이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종교계와 루프 반대론자는 자살 뿐 아니라 모든 인명 관련 범죄 예방을 위한 보호 코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척점에 섰다. 결국 정부가 중도파의 안으로 마인드테크를 압박, 자살로만 범위가 한정된 보호 코드를 모든 오너 스피릿의 구현체에 삽입하는 것을 원칙화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프의 오너 스피릿은 자살을 할 수 없도록 강제된다. 자살에 대한 태도 역시 극단적인 부정으로 세팅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상의 자유가 부정되었다고도 할 노릇이다. 첨예한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현재 출시되고, 관리되는 모든 마인드루프는 이 제약을 안고 설계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루프는 만들어진 루프가 아니군. 열차에서 류미정이 했던 말과는 달리, 아키텍트에 의해 설계되고 마인드테크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비정상, 혹은 불법 루프.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미정이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항상 그런 건 아닌데. 가끔······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요. 어쩐지, 이방인 같은.」


「그게 무슨 말이야? 세상과 안 어울린다니.」


「절 보세요. 모든 게 희미하잖아요. 대부분 하얀 색. 색깔이 있어도 엄청 연한 회색 뿐이구. 언니나, 아저씨나, 다른 사람들처럼 선명하고 구체적이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이 루프에서, 시연의 컨테이너는 예쁜 소녀의 이미지로 꽤 잘 그려졌지만 무채색에 디테일이 너무 약했다. 수채화풍이라고는 해도, 그 색은 흰색, 검은색 그리고 회색 뿐이었다. 게다가 너무 연해서 굳이 따지자면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단 스케치에 가까웠다. 새삼스레 다시 카페 안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우울해 보이긴 해도 어쨌든 진하고 비교적 선명한 색깔이었다. 시연처럼 흑백 카툰 이미지에 가까운 컨테이너는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한울과 미정의 컨테이너도, 지난 번 사고 때와는 달리 현실처럼 구체적이라, 그림 속에 실사를 띄워놓은 것처럼 도드라졌다. 너무 선명해서 유화로 표현된 카페 안 배경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위화감마저 들 정도로.


미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울은 이 여자, 아니 시뮬레이트가 또 삐딱한 말을 내뱉을까봐 걱정스러웠다.


「선명하면 뭐 좋니? 세상과 안 어울리는 이방인은 우리 둘 같은데.」 미정이 한울을 힐끔 보며 말했다.


「넌 아직 덜 그려졌을 뿐이야. 네가 왜 죽었다가 자꾸 깨어나겠니? 더 그리라고 그러는 거지.」


뭐가 우스운지 미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대다가, 한울과 시연의 뜨악한 표정을 보고 무안해진 듯 곧 손을 내렸다.


「그리고—.」 시연이 뭐라고 대꾸하려고 하자 미정은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말을 막더니, 조용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세상과 어울리려고 하지 마. 세상은 빈 캔버스일 뿐이야. 세상이 원하는 건 너와의 조화 따위가 아니라 그냥 너야. 세상 속에 너를 어떻게 그릴건지 그것만 생각해. 누구도 너를 그려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색은—.」


탕—.


이 공간, 이 분위기에는 너무나 조화롭지 않은 소리였다. 시연과 마주앉은 미정의 얼굴에 시연의 회색 피가 튀어 흐릿하게 물들었다. 시연의 얼굴 위로도 피가 쏟아져내렸다. 천천히 시연의 고개가 수그러들고 상반신이 앞으로 쓰러졌다. 시연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미정의 가슴에도 명중했는지, 미정 역시 입에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이 피는 붉었다.


한울이 고개를 돌리며 일어선 것과 총을 든 남자가 몸을 돌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지며 초록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한울은 이번에도 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뒷모습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정이 ‘훤칠한 뒷태’ 라고 감탄했던, 사고를 낸 그 트럭 운전사. 그때와 똑같이 그자가 등을 보이고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뒷태를 시작으로, 다시 하얀 붓선들이 온 세상을 지우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16화, ‘두 의사'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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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2 22:22
    No. 1

    15화 떡밥리스트:
    23) 시연은 자살 시도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근데, 루프 오너는 자살을 생각도 못 하도록 강제된다면서요? 한울의 생각대로, 이 루프는 불법 루프인 걸까요?
    24)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지며 ( )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오호호 소오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맘세하루
    작성일
    18.05.01 22:21
    No. 2

    마인드 루프, 좋은 게 아닌가 보네요.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1 22:47
    No. 3

    ㅎㅎ 모든 것은 사용하기 나름이겠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5.05 05:11
    No. 4

    내가 이방인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5 13:32
    No. 5

    네 그렇죠.. 그리고 대화 중인 세 사람은 실제로 모두 그 세계의 이방인들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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