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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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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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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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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8.03.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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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49. 용서와 응징

DUMMY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공기는 끈끈하고 무거웠고, 수십 걸음마다 켜져 있는 조그마한 횃불이 빚어내는 불빛을 집어 삼킬 듯했다.

한 사내가 희미한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지하의 공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폭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너무 규칙적이어서 영원히 멈춰서지 않을 듯 느껴졌다. 하지만 불과 이 장 정도의 거리를 더 걸은 후 사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사내가 멈춰선 곳은 두꺼운 나무가 격자 형태로 단단한 벽을 이루고 있어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나무 격자 벽 너머에 또 다른 사내가 봉두난발한채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목에는 칼을 찬 채.

“누···누구시오?”

목에 칼을 찬 사내가 물었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사승상이었다. 그는 황궁 내 가장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있는 특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대대로 대역죄인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에게 낯선 사람의 방문은 두려움이자 희망이다. 참수를 당하러 끌려 나갈 것 같은 두려움과 감옥에서 풀려 나갈 것 같은 희망이 교차하는 것이다.

사승상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말이 없던 규칙적인 걸음의 사내가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백랑랑白娘娘이란 여인을 아는가?”

사내의 말에 사승상은 순간 당황했다. 두려움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백랑랑?’

들어본 이름이고 익숙한 이름이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아~ 하고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사랑이 증오로 변한 여인이었다. 자신을 거절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사승상이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증오했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 또렷하게 생각난 탓이다. 상황은 점점 희망보다는 두려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역시 내자불선이다.

“그 분의 아들···”

앞에선 사내의 나지막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묵태부의 손자겠구나. 어린 손자 하나가 사라졌다더니···”

사승상의 목소리에 이제 당황은 없어졌다. 상황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대신 체념이 묻어 있었다. 찾아온 자는 절망이지 희망이 아니었다.

사승상의 머리 속에 지난 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동창에서 묵태부를 제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 묵태부 집안 전체를 몰살할 것을 주장했다. 자신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복수였고 증오였다. 그 뒤 북천회로부터 집안은 몰살했지만 어린 손자 하나가 사라졌단 얘길 들었다. 기분이 찜찜했다. 하지만 곧 잊었다.

어린 놈 하나가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하지만 항상 큰 문제의 시작은 조그만 불씨다. 그때 완전히 제거했어야 했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찾아 왔느냐? 복수를 하겠다는 게냐?”

묵태부의 손자라고 했건만 상대가 말이 없자 사승상이 다시 상대에게 물었다.

“···”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사승상의 목소리가 다시 떨려 나왔다. 복수라는 말에 두려움이 다시 밀려온 것이다.

“내 손에 네 더러운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 너는 곧 요참腰斬으로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단지 그걸 알려주러 왔을 뿐이다.”

사내가 말을 마치곤 사승상이 갇혀 있는 옥을 지나쳐 걸어갔다.

사승상은 사내가 떠나자 머리 속이 혼란되고 오장육부가 진탕되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 이마와 등에서 식은 땀이 솟고 손발이 떨려왔다.


요참腰斬···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이다. 통상의 죄인은 참수(머리를 자르는 형벌)하지만 간혹 대역죄인은 요참을 시행한다. 요참이 참수에 비해 더욱 처참한 형벌인 이유는 바로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려진 허리에서 흘러 내린 피로 수십 글자를 쓸 수 있는 동안 살아있다 천천히 죽어간다. 자신의 눈으로 잘려진 자신의 하반신을 보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실로 끔찍하고 처참한 형벌이었기에 실제 요참의 형벌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사승상은 요참이란 생각만으로 숨이 막혀오고 혀가 밀려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안돼··· 그 전에 먼저 죽어야 해. 살아 요참을 당하는 그 고통을 겪을 수는 없어···’

그러나 사승상은 어떻게 해야 스스로 죽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통상 그렇듯 본성이 나약한 인간은 죽겠다는 생각뿐, 스스로 목숨을 거두기 어려운 법이다. 그저 요참을 당할 때까지 상상의 고통 속에 서서히 말라갈 뿐.


사승상이 갇혀 있는 옥獄을 지난 사내가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두 개의 옥이 나타났는데 각기 한 명씩의 죄수가 갇혀있었다.

“이보시오. 제발 살려 주시오. 나는 잘못이 없소. 그저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흑흑.”

두 죄수 중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사내가 앉은 자리에서 급히 달려 나와 옥문을 부여잡으며 앞을 지나가는 묵진휘를 향해 애원조로 울부짖었다. 얼마 전 대주로 승진했던 동창의 정조장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묵진휘는 얼굴조차 돌리지 않은 채 정조장의 옥을 지나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다른 죄수가 옥문을 부여잡으며 역시 애원했다.

“나으리. 모든 일은 저 쪽에 있는 조부태감이란 자가 한 일이오. 나는 잘못이 없소. 제발···”

얼마 전 태감으로 승진한 강부태감이었다. 강부태감은 묵진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애원했다. 묵진휘가 역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강부태감의 옥을 지나쳐 걸어갔다.


묵진휘가 몇 개의 옥을 더 지나친 후 어느 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옥에도 한 명의 죄수가 앉아 있었는데, 정조정이나 강부태감과 달리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뿐 옥문으로 달려 나오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어 묵진휘를 바라볼 뿐이었다.

“묵대협이시구려.”

죄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조부태감이었다.

묵진휘는 별다른 말이 없이 그저 조부태감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저 죄값을 달게 받는 것으로 용서를 빌 뿐이오. 구천에 가서 묵태부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겠소.”

조부태감의 목소리가 떨렸고 이어 온몸도 미세하게 떨리면서 들고 있던 고개가 숙여졌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리라.

사승상과 강태감 등이 잡히면서 당연히 조부태감도 같이 투옥되었다. 과거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사를 받으면서 묵진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저 이황야가 데리고 있던 무인인 줄 알았는데 묵태부의 손자였던 것이다.

반면 그는 자신이 집안의 원수인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별다른 내색없이 천진에서 같이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조부태감은 묵태부의 손자라는 무인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앞에선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뒤이어, 과거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묵진휘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흐느끼는 조부태감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조부태감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스스로 참수당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구천에 가서 조부께 용서를 빌겠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참수당하지 않고 곧 풀려날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묵진휘가 돌아서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조부태감을 완전히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를 추가적으로 응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가, 달리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시간이 좀 더 흘러야 정답에 가까워질 터였다.

묵진휘가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부태감이 움찍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향해 따뜻한 훈풍 한줄기가 부드럽게 불어왔던 것이다. 결코 지하 감옥에서 불어올 수 있는 훈풍이 아니었다. 조부태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미 묵진휘는 뒤돌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나를 용서하는가? 흑흑···’

조부태감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더욱 굵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올 훈풍이 아니라면 사람이 일으킨 것이리라. 그렇다면 묵대협이다. 묵대협이라면 따뜻한 훈풍 정도 일으키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이미 천진에서 묵진휘의 하늘 같은 신위를 본 조부태감의 확신이었다.



묵진휘가 지하감옥에서 나와 골목으로 접어들자 어둠 속에 두 명의 사내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보였다.

묵진휘가 두 사내 앞으로 걸어가도록 두 명의 사내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묵진휘의 발걸음에도 어떤 주저나 변화가 없었다.

묵진휘의 어깨가 두 사내의 어깨를 스쳐 지나갈 정도가 되었을 때 두 명의 사내 중 한 명이 손을 뻗어 묵진휘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술 한잔 더 해야지?”

서홍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한 사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묵진휘의 팔을 쥐더니 어딘가로 이끌었다. 남궁이현이었다.

서홍과 남궁이현은 묵진휘가 이황야의 배려로 지하감옥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묵진휘의 마음이 심란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딜 가는 겐가?”

묵진휘가 팔을 잡아 이끄는 남궁이현에게 물었지만 언제나 말이 적은 남궁이현이었기에 다른 대답은 없었고 대신 서홍이 대답했다.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모두 모여 모여있네.”

모두들 이황야와의 회식이 끝난 후 각자의 시간을 가지다 젊은 사람들만 다시 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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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250. 구속과 자유 +4 18.03.20 1,597 46 10쪽
» 249. 용서와 응징 +5 18.03.13 1,624 41 10쪽
249 248. 형제 +5 18.03.06 1,739 42 9쪽
248 247. 유훈함遺訓函 +5 18.02.28 1,673 42 10쪽
247 246. 확대되는 삼별조 +3 18.02.24 1,703 39 10쪽
246 245. 먹구름 속에 가리고 +4 18.02.19 1,972 53 10쪽
245 244. 아침 +4 18.02.13 1,962 44 8쪽
244 243. 삼천三天의 後裔 +4 18.02.09 1,782 48 12쪽
243 242. 긴 하루 +6 18.02.06 1,749 45 10쪽
242 241. 내리 사랑 +3 18.02.03 1,693 39 10쪽
241 240. 신뢰 +3 18.01.31 1,771 42 9쪽
240 239. 삼천三天 +4 18.01.28 1,776 45 10쪽
239 238. 재격돌 +3 18.01.25 1,659 42 11쪽
238 237. 역부족力不足 +4 18.01.22 1,577 35 11쪽
237 236. 즐기는 북천 +5 18.01.19 1,661 35 10쪽
236 235. 고개를 내려오다 +4 18.01.15 1,661 41 9쪽
235 234. 아버지의 눈물 +4 18.01.12 1,843 39 10쪽
234 233. 손님들 +8 18.01.08 1,849 43 10쪽
233 232. 저력底力 +7 18.01.05 1,870 47 11쪽
232 231. 황새와 뱁새 +3 18.01.01 1,731 39 10쪽
231 230. 벽壁 +3 17.12.27 1,833 44 9쪽
230 229. 혼담婚談 +3 17.12.21 1,932 44 10쪽
229 228. 천외천天外天 +3 17.12.18 1,902 43 11쪽
228 227. 바둑 두는 노인들 +2 17.12.15 1,810 44 10쪽
227 226. 유정검有情劍 +2 17.12.12 1,763 42 11쪽
226 225. 재 진군 再進軍 +2 17.12.10 1,822 40 11쪽
225 224. 목전目前에서… +2 17.12.07 1,895 38 10쪽
224 223. 다섯 개의 싸움 2 +2 17.12.03 1,985 41 11쪽
223 222. 다섯 개의 싸움 1 +2 17.11.28 2,024 4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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