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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진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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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임규진
작품등록일 :
2016.12.06 09:35
최근연재일 :
2018.03.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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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7.12.1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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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226. 유정검有情劍

DUMMY

“어···어떻게···손···손으로···크윽”

도수가 심장에 박힌 검의 검집을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검을 뽑지 못한 채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있기 힘에 부친 것이다. 하지만 검이 심장을 관통했음에도 절명絶命하지 않고 아직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궁금해서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처럼.

화호법이 급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도수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도수는 고개를 힘겹게 가로 저었다. 가만히 놔두라는 뜻이었다.

“목전目前에··· 꿈이 목전에 있었는데··· 크흐흑···”

도수가 흐느낌인 듯 웃음인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끝으로 땅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목전에 그의 꿈이 손에 잡힐 듯 했는데 움켜쥐지 못한 채 생을 달리한 것이다.

몇 사람이나 과연 손에 꿈을 쥔 채 생의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애초부터 꿈을 손에 쥔다는 생각 자체가 허망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북천의 이공자는 스승도 부모도 없는 곳에서 아쉽게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명命과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황궁으로 들어온 지 십여 해만이었다.

도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야망도 컸다. 그래서 아버지 태상호법 도욱찬의 기대는 한껏 부풀 수 있었다. 하지만 도욱찬의 아버지, 도수의 할아버지가 역적의 누명아래 집안의 앞길을 막아버렸고 부자父子는 좌절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 말이 있듯 정말로 솟아날 구멍을 만날 수 있었다. 북천이었다.

도욱찬이 보기에 북천의 무공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세상을 자신에게 안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부자가 북천에게 의탁했다. 영민한 아들 도수는 이십 세를 조금 넘기면서 북천의 절기를 대부분 이어받았다. 하지만 끝내 북천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도욱찬은 도수를 황실로 밀어 넣었다.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사승상을 통해서였다.

황실로 들어간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도수는 발톱을 숨긴 채 사승상의 심복이 되어 하나하나 황궁내 세력을 키워갔고 태자까지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사승상쯤이야 언제라도 없애버리고 황실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만 목전에서 다잡은 권력을 앞두고 낙마落馬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써 북천의 세 제자가 모두 죽어버렸다. 첫 번째 제자인 차시천의 주은백의 손에, 두 번째 제자인 도수는 묵진휘의 손에, 세 번째 제자였던 삼공자는 무한에 있는 공녀의 장원에서 냉보모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북천의 대代는 끊어져 버린 것이다. 세 공자의 운명이 그러했던 것인지 북천이란 스승의 운명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북천의 야망이 세 제자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음은 또한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으리라.


화호법이 도수의 주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묵진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화호법의 눈에 열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이 죽었기에 상대에 대한 증오가 끓어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그 열기는 약간 다른 바가 있었다. 증오와 함께 허무도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묵진휘는 그 눈빛을 보며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지하동굴에서 탈출한 이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감정의 변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한 톨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묵진휘는 화호법의 눈빛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증오는 이해할 수 있으나 허무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두려움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분명 두려움은 아니었다.

화호법이 생각을 마무리한 듯 허리춤에 감고 있던 것을 천천히 풀었다. 채찍이었다. 화호법의 무기인 형향편馨香鞭이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아름다운 향기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쩔 수가 없군요.”

화호법이 채찍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묵진휘에게로 한걸음 걸어왔다. 화호법의 말에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묵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적의敵意는 없지만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묵진휘가 손을 조금 흔들자 도수의 심장에 박혀있던 묵진휘의 검이 마치 줄에 묶여 있었던 듯 날아와 묵진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상승의 허공섭물이었다.

‘대단한 고수다. 회주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화호법이 묵진휘의 허공섭물에 다시 한번 속으로 놀랐으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볼 뿐이었다. 화호법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금의 하늘이 현생現生에서 보는 마지막 하늘임을. 눈이 시리도록 푸른 봄날의 하늘이었다. 하늘이 이리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동안 너무 삭막하게 살아왔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인생이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조그만 웃음 한번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휘리리릭~

채찍이 특유의 파공성을 내며 묵진휘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체의 속임수 없이 눈에 보이는 방향 그대로 묵진휘의 심장을 향해 채찍이 날아들고 있었다. 묵진휘의 몸이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발을 움직여 몸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여 발을 데려가는 모양새였다. 역시 상승의 절기였다.

그러자 화호법이 다시 몇 걸음 앞으로 달려 나오며 형향편을 날리려 할 때 허공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리곤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화호법과 묵진휘 중간 즈음에 섰다.

“그만하시오.”

떨어져 내린 사내가 화호법에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떨어져 내린 사내는 중년이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경이 모두 배어 있었고 목소리에도 복잡한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당신은?...”

“그렇소. 나요. 이제 그만합시다.”

화호법과 사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고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떨어져 내린 사내는 묵진휘에게도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묵진휘는 그의 기도氣道를 언젠가 한번 접한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누군지 짐작이 되었다. 몇 해전 무한의 공녀 장원에서 사절과 싸울 당시 만났던 사람이었다.


유정검有情劍··· 무정도의 친구.


사절四絶과의 싸움이 끝났을 때, 언젠가 찾아 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던 사내였다. 그런 그가 지금 나타난 것이다.

묵진휘는 화호법이 처음 채찍을 날리는 순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적敵인 줄로 여겼는데 그의 기도에서 적의敵意나 살의殺意가 없는 것을 알곤 화호법의 채찍에 맞서지 않고 그냥 물러섰던 것이다.


“혹시 나를 기억하시오?”

유정검이 묵진휘에게 물었고 묵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언젠가 찾아오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도 기억하시오?”

이번에도 묵진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한에서 떠날 때, 당신에게 검으로 찾아 오리라 말했지만 이제 나는 검을 버리려 하오.”

유정검의 말에 화호법이 오히려 놀란 듯 유정검을 바라본다.

“이 여인과의 대결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겠소?”

유정검의 말에 묵진휘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소.”

유정검이 묵진휘에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화호법을 바라본다.

“이제 당신도 그 채찍을 내려놓았으면 하오. 북천회는 허상虛像이오. 회주와 태상호법의 야망만이 있을 뿐이오. 사실 그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이제 나와 함께 떠납시다. 우리 검도 없고 채찍도 없는 곳에서 밭이나 일구며 웃으며 살아갑시다.”

유정검이 화호법을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화호법의 얼굴에는 긍정이나 부정 같은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허무만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무정도를 기억하시리라 믿소.”

“물론 기억하오. 그는 진정한 무인武人이었소.”

유정검이 다시 묵진휘를 바라보며 물었고 이번에는 묵진휘가 말로 대답했다.

“그를 그리 기억해주다니 고맙소. 나와 무정도는 죽마고우요. 함께 강호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소. 하지만 우리는 북천회의 삼공자 부친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바, 그의 아들을 지켜달란 부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북천회에 몸담았소. 그런데 나는 결국 삼공자도 지키지 못하고 친구도 잃었소. 그땐 분개했소.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조사하다가 북천회 회주와 태상호법의 야망으로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알게 되었소.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는 방향을 잃고 번민했소. 비록 회주와 태상호법의 덧없는 야망으로 친구를 잃고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칼을 들이밀 수는 없었소. 한때 한솥밥을 먹었다는 인연 때문이었지. 나의 선택이었기도 했고. 그렇다고 당신에게 칼을 들이밀 수도 없었소.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까. 당신은 오히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하고 있으니까. 이래 저래 번뇌하던 나는 길에서 우연히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소. 그 스님이 모든 것을 내려 놓으면 편안해진다 말씀하셨소. 그 한마디가 내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소. 그래서 검을 버리기로 한 거요.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을 찾아 다녔고 오늘 그녀를 만났소. 내가 그녀를 데려가도 되겠소?”

유정검이 그 성격처럼 장황하게 지난 일들을 이리저리 설명했고 자신이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까지 밝혔다. 만일 무정도라면 유정검의 긴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 말만 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데려가도 되겠소?’···

유정검의 물음에 묵진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정검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얘기라기 보다는 여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었소. 이제 당신과 함께 떠나 조용한 데서 살고 싶소. 나의 청혼請婚을 받아주시오.”

다정다감한 유정검다운 청혼이었다.

유정검의 청혼에 화호법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 길지 않는 시간이지만 모두는 약간의 긴장으로 화호법의 대답을 기다렸고 유정검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한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털썩~

무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호법이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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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 유정검有情劍 +2 17.12.12 1,763 42 11쪽
226 225. 재 진군 再進軍 +2 17.12.10 1,822 40 11쪽
225 224. 목전目前에서… +2 17.12.07 1,895 38 10쪽
224 223. 다섯 개의 싸움 2 +2 17.12.03 1,984 4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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