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바둑 두는 노인들
덕주德州 초입에서 북천회 무인들과 한바탕 큰 전투를 벌인 이황야 일행은 덕주를 지나 창주沧州를 향했다.
“놈들이 다시 나타날까요?”
무현대사가 허세학 부맹주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다시 놈들이 나타난다면 전력 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리 쉽게 북경에 이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허세학 부맹주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다시 적들이 나타날 것이고, 놈들이 나타난다면 죽은 영웅들의 복수를 하리라는 다짐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무림맹으로 전서구를 보내 인원 충원을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작당주 번량이 옆에서 의견을 내었다. 지금은 허울뿐인 주작당이었다.
“지금 무림맹에 전력화할 수 있는 무인은 거의 없소. 전력을 충원하려면 다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요청해야 하는데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의견을 또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여전히 지금의 장정長征이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해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을 것이오.”
전前청룡당주 진걸의 대답이다. 진걸은 청성파 출신이었기에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입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더 이상의 인원 충원은 없소. 마교의 천주대와 개방도들도 가세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봅시다.”
허세학 부맹주가 진걸과 번량의 얘기를 듣더니 결론을 내렸다. 그의 생각에 이제는 대규모 전투보다는 기습이나 암습 같은 것이 우려되었다.
허세학 부맹주의 결정이 내려지자 다른 얘기가 나올 리 없었다. 일행은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때 척후병 둘이 급히 돌아와 앞쪽 상황을 보고했다.
“앞에 보이는 고개를 넘으면 창주 못 미쳐 동광현東光縣이란 마을로 진입하게 되는데 그 마을 초입 조그만 언덕에 장원이 한 채 있고 길에 면한 곳에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정자에 두 노인이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데, 근처 소나무에 한 사람이 목을 매단 채 죽어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죽어 있는 자가 얼마 전 부맹주님과 싸우다 도망쳤던 놈이었습니다. 분명 바둑을 두는 노인들은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인데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는지 아무런 꺼리낌 없이 바둑을 두고 있었기에 같이 갔던 척후병 중 하나가 궁금하게 여겨 노인들에게 다가갔는데 노인 중 하나가 가볍게 손을 내밀자 다가간 척후병이 오장 여 거리를 날아가 나무에 쳐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저희들이 보기에 예사로운 노인들이 아닌 것 같아 우선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보고를 마친 척후병은 가뜩이나 가뿐 숨을 참고 있다가 헐떡이며 숨을 쉬었다.
“나와 싸운 자라면 고수검 모개?”
허세학 부맹주가 놀라 되물었다. 고수검 모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아난 것인데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달리 없었다. 분명 바둑을 두는 노인들 짓이리라. 고수검 모개라면 초절정고수였다. 그런 자를 가볍게 죽였다면 바둑을 두고 있는 노인들은 엄청난 고수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심각한 것이다.
“분명히 그자였습니다.”
부맹주의 물음에 척후병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군을 멈춰라. 그리고 사정을 뒤에 따라오는 본대에다 알리도록 하라.”
허세학 부맹주가 전령 역할을 하는 무인에게 지시를 내리자 무인이 뒤쪽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마교 천주대에게도 알리시오. 그리고 우선 우리부터 가보도록 합시다.”
허세학 부맹주가 그렇게 이르곤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자 무현대사, 진걸과 번량 및 몇몇 원로들이 부맹주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아 고개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고개를 넘자 척후병의 말대로 정자가 있었고 근처 나무에 매달린 시체 한 구도 있었다. 시체는 분명 고수검 모개였다.
그리고 길가에 면한 정자에는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노인은 군살 한 점 없는 단단한 몸매의 노인이었고 다른 한 노인은 학사모 차림에 선비 같았다.
번량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조심하게.”
진걸이 번량에게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은 친구라기 보다는, 같은 당주로서 지냈기에 서로 말을 편히 터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네. 말 좀 묻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는가?”
번량이 진걸에게 씩 웃으며 답하더니 말을 몰아 정자로 다가갔고 다른 사람들은 번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장, 저기 나무에 목이 메여 있는 사람을 알고 있소?”
번량이 바둑 두는 노인들에게 물었다.
“모개 말인가?”
선비풍의 노인이 선뜻 대답을 했다. 번량은 속으로 놀랐다. 노인들이 모개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분명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무슨 일로 저자가 나무에 목을 멘 것이오?”
“싸움에서 도망치는 놈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번량의 물음에 선비풍의 노인이 다시 대답했다.
“그럼 노인이 저리 만든 것이란 말이오?”
“그렇다네.”
번량이 노인의 대답을 듣는 동시에 말 등에서 몸을 날려 뒤로 날아가려 했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늦었네.”
선비풍의 노인이 여전히 시선은 바둑판에 두고 있으면서도 손을 뒤로 뻗어 말 등에서 막 도약한 번량의 등을 장풍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번량이 바람처럼 날아가 길 건너 나무에 쳐 박혔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실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면서 무림맹 주작당주의 자리에 영입된 번량은 나름 정도 무림에서 이름있는 고수였다. 물론 무공보다는 적극적으로 본인이 무림맹에 지원한 탓에 자리 안배 차원에서 당주 자리를 얻은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무공이 자리에 비해 한참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정주에서 손호와 같이 고생하였고 큰 부상을 입은 후 이번 여정에 같이 동참했다가 이제 손호의 뒤를 이어 생을 마감한 것이다.
번량의 죽음에 무림맹 지도부는 너무 놀라 한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번량이 그렇게 허무하게 손짓 한번으로 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누구길래 그리 손속이 독하단 말이오?”
무현대사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큰소리로 물었다.
“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으니 이리 와서 얘기하게나.”
두 노인 중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으나 낮으면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내공을 실어 보낸 목소리였다. 그런 노인이 무현대사의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허세학 부맹주는 순간 갈등했다.
대단한 노인들이다. 자신이라도 번량을 손짓 한번으로 제압할 수 없다. 자신과 동수를 이루었던 모개를 목메달아 죽인 노인들이다. 엄청난 고수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번량의 죽음을 보고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무림맹 원로들이 허세학 부맹주를 바라봤다.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다.
“모두 함께 쳐라.”
허세학 부맹주가 큰소리와 함께 말 등에서 몸을 날려 도를 빼들면서 노인들에게 날아갔고 무현대사, 진걸과 나머지 원로급 고수 두 사람 하여 도합 다섯 명이 함께 몸을 날렸다. 물론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서였다.
퍽퍽퍽퍽퍽···.
허세학 부맹주를 비롯한 무림맹의 다섯 고수들이 몸을 날려 공격해 들어가자 이번에는 단단한 체구의 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가벼운 파열음이 몇 차례 울렸다.
크윽, 큭~, 으윽~
가벼운 파열음이 몇 차례 울리는 것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개수의 신음소리가 들렸고, 날아가던 다섯 고수들은 노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다섯 중 그나마 둘은 몸을 허공 중에서 공중제비하면서 땅으로 날아 앉았으나 셋은 공중제비도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어떻게···”
땅으로 공중제비하면서 내려 앉은 두 사람 중 하나는 허세학 부맹주였다. 허세학 부맹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노인들을 바라봤다.
“으윽···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역시 공중제비하여 허세학 부맹주 곁에 내려 앉은 무현대사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허세학 부맹주에게 물었다. 물론 허세학도 알리 없었지만.
진걸을 비롯한 세 사람은 절명한 듯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미동도 없었고 신음도 없는 채로 입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을 한마디씩 내뱉은 두 사람도 곧이어 입으로 피를 게워내기 시작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깊은 내상이었다. 입으로 게워내는 피의 양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서 전하거라. 북천이 여기 있다고. 나를 넘지 않고선 이곳을 지날 수 없다 일러라.”
노인 하나가 말하는 음성이 허세학과 무현대사의 귀에 쟁쟁한 공명을 일으키며 들려왔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입으로 피를 게워냈다. 그 목소리에도 미약한 음공音功이 실려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너무 놀랐다. 목소리에 음공을 실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기파氣波로 사람을 압박할 수는 있다. 살기殺氣란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악기도 아니고 목소리로 상대를 공격한단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두 노인에게 다시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용기로 맞설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인 데 노인들은 한계 저편에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노인들이 일부러 자신들을 살려 보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물러나시죠.”
무현대사가 엉거주춤 기면서 허세학 부맹주에게로 다가왔다. 허세학 부맹주를 부축하여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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