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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13 20:41
연재수 :
19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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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0
추천수 :
128
글자수 :
1,479,648

작성
24.01.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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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28화 이름 없는 성녀

DUMMY

128화 <이름 없는 성녀>



물안개도 끼지 않은 새벽.

산을 내려가 리친스로 향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이미 잠에서 깬 캣니스와 일행들은 산장 밖에서 기다렸다.


“아쿠아는 아직인가?”

“게르드 님이 데리러 갔어요. 아침에 깨웠었는데 다시 잠든 모양이에요.”


짐마차는 이미 준비되었다.

사람만 타면 당장이라도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직 준비가 덜 끝났다.


“때마침 저기 나오는군.”


다행히 말하기 무섭게 산장을 나오는 이가 있었다.

아쿠아가 게르드에게 매달린 채로 나왔다.

바깥을 보는 인상이 못나기 그지없다.

며칠 아프다고 하여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으으으. 게르드. 십 분만. 딱 십 분만 더 침대에서 자게 해줘···.”

“아쿠아~ 미인은 잠꾸러기라지만 잠만 자는 미인은 식충이란다?”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었다.

게르드가 칭얼거리는 아쿠아를 어르고 달래서 마차에 태웠다.

짐과 사람을 실었으니 출발할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이틀간 신세를 진 고마운 사람들과 작별 인사했다.


“그대들에게 감사하네. 험한 산속에서 낯선 이를 반겨준 은혜를 잊지 않겠네.”


브레드가 대표하여 부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산장의 여주인은 기꺼워하며 미소 지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눈이 안 보이는 저희를 위해서 훌륭하게 집을 고쳐주었는걸요.”

“그거야 신세 진 이가 할 당연한 일이었네. 언젠가 이곳에 또 들리면 제대로 사례하도록 하지.”

“후후후.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 낡은 집을 이렇게 멋지게 고쳐준 것만 해도 충분하답니다.”


서로가 감사한 마음을 나누었다.

맨 처음 적대했던 일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까울 정도로 서로 많은 정을 느꼈다.


“여보. 당신도 말해야죠. 손님들이 가시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게요?”

“···잘 가. 길이 얼어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당신도 참. 집을 훌륭히 고쳐준 감사하고, 초면에 검을 들이민 일은 사과 안 해요?”


역시 이 집에서 실권을 잡은 여인다웠다.

다그치듯 하는 말에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부인은 한숨을 한 번 쉬며 고개 저었다.

남편에게서 등 돌리고 다시 브레드에게 말했다.


“저래 보여도 고마워하고 있어요. 이렇게 훌륭하게 집을 꾸며주신 점 감사···”

“헛소리하고 있네.”


그때였다.

좋은 대화만 진행되던 중에 못난 말이 끼어들었다.

언제 마차 문을 열었는지. 마차 의자에 엎드린 아쿠아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눈도 안 보이면서 뭐가 훌륭한지 어떻게 알아?”


잠에서 깨어 삐딱해진 걸까.

아쿠아의 독설에 일행들이 경악했다.


“아쿠아 님. 그런 말은 은인분들께 실례···”

“시끄러워. 나이도 어린 게 어른들 말에 끼어들지 마. 그리고 너희는 가까이 와봐. 해코지하는 거 아니니까 그만 노려보고.”


아쿠아답지 않은 신랄한 말에 캣니스는 제자리서 굳었다.

다른 이들도 캣니스의 반응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뭐해? 나 춥다고.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좀 와.”


부인은 가만히 아쿠아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핏발이 선 남편의 손을 조용히 잡아당겼다.

이에 남편은 검을 뽑을 기세를 진정시켰다. 부인과 아쿠아가 원하는 대로 마차 앞까지 움직였다.


“눈이 보이는 성녀님. 저희 맹인 부부를 어떤 일로 불렀을까요?”


온화하고 예의가 가득한 말. 하지만 은근히 비꼬는 속내가 담겨있었다.


“숙여.”

“네?”

“너 말고 네 남편. 내 팔이 안 닿잖아.”


그렇지만 아쿠아는 제 할 말을 했다.


‘팔이 안 닿는 이유는 당신이 엎드려있으니까.’


지켜보는 이들이 같은 생각을 품었지만 삼켜냈다.

아쿠아가 무언가 한다는 점에서 믿음을 가져보았다.

이내 아쿠아는 낑낑거리며 몸을 뒤집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잘 들어 일리나. 신이란 건 제멋대로야. 그들이 미래를 준비해두었다 생각하지 마.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어쩌다 얻은 존재에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은 머저리들이라고.”


한 교단의 성녀가 한다고는 믿기 힘든 말.

그래도 부인과 남편은 끝까지 경청했다.


“그들은 ‘해줘’라는 말을 참 좋아해.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이거 아니야. 저거 아니야.”


거듭되는 신성모독.

같은 성직자 동료인 캣니스의 안색은 새하얘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쿠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네 멋대로 행동해. 이기적으로 살라고. 옛날처럼 얻어걸린 행운을 다시 걷어찼다가는 내가 욕 한 바가지 퍼부을 줄 알아.”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다.

엉거주춤 허리 숙인 남편과 부인의 눈꺼풀 위에 손을 겹쳤다.

따스한 신성력이 일어났다. 신성력은 부부의 눈꺼풀 안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성녀에게 주어진 권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가엾이 밤을 걷는 두 사람. 신실한 사도가 잃어버린 빛을, 다시 찾을 새벽을.”


기도 이후에 더 나눌 말은 없었다.

빛이 사라진 뒤에 부부는 힘없이 쓰러졌다.

게르드와 게이로드가 기절한 부부를 방으로 옮겼다.

그 뒤에는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캣니스. 왜 이쪽에 탔어?”

“아쿠아 님 얼굴 보기가 미워서요.”


그들은 다음 목적지인 리친스를 향했다.

개조한 짐마차에는 산장에 올 때보다 한 사람이 더 탔다.

그렇게 그들은 산장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문득, 짐마차에서 산장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캣니스가 한마디 했다.


“신기하네요.”

“뭐가?”

“설마 이런 장소에서 프로텐시아의 성녀님을 볼 줄 몰랐어요.”


캣니스는 보았다.

부인이 기절했을 때 떨어트린 로자리오.

프로텐시아 교단의 묵주는 고위 성직자만이 착용하는 악세사리였다.


“그러면 걔도 성녀야?”

“아마도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프로텐시아 교단의 유명하신 성녀님이세요.”


여러 정황을 봤을 때 거의 확신했다.

소문으로 들어온 성녀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다.


“라벨라의 효능과 재배법을 만드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는데요. 특히 유명한 건 그분이 성녀가 되기로 선포했을 때, 여신께 선사 받은 눈을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돌려주기로 맹세한 말이 유명해요.”

“다시 자라지도 않는 눈을? 그건 바보 같은 말 같은데.”

“실제로 은퇴하였을 때 그리했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었죠. 정말로 세상을 구할 목적만으로 성녀의 자리에 앉으신 거니까요.”


캣니스는 이미 떠난 산장을 뒤돌아봤다.

험난한 산속 생활이 불편할 텐데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 지내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은퇴했어도 여전히 사람을 위해 힘써주는 성녀와 기사님.

이번 만남이 그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한심하기는.”


일행의 다른 마차에서도 부부를 회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불평이 가득한 손길로 금색 머리카락을 구불구불 말았다.

이내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닫고는. 양팔을 늘어뜨리며 의자에 기댔다.


“그래도 뭐.”


이 정도 했으면 다시 폐가처럼 보이지는 않겠지.

세상을 위한 일과 자신을 위해 일한 보상이 어느 정도 되겠지.

그러니 이렇게 한 일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이번 일에 대한 기억을 마음 모퉁이에 치우는 아쿠아가 있었다.



*****



<후일담- 한 여인의 소망>



산속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영광스러워하는 자리보다 몇 배는 낫다.

이런 나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욕하고 미련하다고 동정하기도 하지만 지금 삶을 잃고 싶지 않다.

항상 후회했던 그날보다 나는 지금이 인생 어느 때 보다 소중하다.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려 할 정도로 말이다.


-이현. 당신 눈에서 피가!

-성녀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지난날, 누구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를 때 주어진 건 가혹한 시련이었다.

나는 그 시련을 견딘 산 증인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의 헛됨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긴다.

신은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헛된 욕망을 품지 못하게 스스로 억제해야 한다.

그건 성녀라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찾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헛된 꿈이라고 여기며 보내줄 용기가 필요하다.


-성녀님. 어째서 앞을 포기하셨습니까.

-본래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이현.


내 그릇에 맞춰서 조금이라도 넘치려 하면 풀어주어야 한다.

과한 것을 끌어안아 봤자 금이 가고 넘쳐흐를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견디기만 하면 언제 행복해지냐고?

행복해진다.

예상치 못한 꿈이,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지만 무엇보다 행복한 꿈이 불현듯 온다.


“언니! 며칠 도시 갔다 왔을 뿐인데. 집이 왜 으리으리하게···”


그래서 나는 지난 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에 감사함을 느낀다.

내 삶에 시련을 안겨주고 모든 것을 앗아간 신에게도, 또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봐준 고마운 성녀에게도, 내 삶을 망친 원수지만 누구보다도 나를 위하는 친구에게 감사한다.


“리나. 어서 와. 생각보다 더 예쁜 얼굴이었구나?”

“언니! 설마?”


한때 나는 착각하였다.

신은 내게 운명을 선물했다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 나를 보여줘야 한다고.

하지만 신도 사람도 진정으로 원하던 모습은, 누구보다 삶에 집착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리나. 돌아오자마자 미안하지만, 며칠 더 우리끼리 있게 해주겠니?”


모두가 어리석고 어리석은 인간을 소망했는데, 너무나 뒤늦게 인간이 되어버린 나라는 멍청이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항상 완벽을 추구하였으니 지켜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언니. 장거리를 식탁 위에 올려뒀어.”

“응. 너도 다음에 올 때는 꼭 멋진 남자 좀 데리고 와.”

“됐어. 나는 평생 언니랑 형부랑 살 거야.”


그래도 이거면 됐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그거면 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누구보다도 많이 부릴 자신이 있게 되었으니 됐다.


“제 삶에서 많은 걸 놓쳤어도. 마지막에 당신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놓을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됐을 겁니다. 부인을 처음 본 순간, 제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었으니까요.”

“그래요? 리나도 내쫓았으니, 정말로 멋진 남편으로 준비되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제 얼굴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저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준비를 단단히 해두세요. 일리나.”


사랑.

사랑이 싹텄답니다.

사랑을 관장하는 여신의 사도가 찾아와 사랑의 축복을 내려주고 갔어요.

저는 이미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고, 이번 일로 더 큰 사랑을 받았기에 감히 소망합니다.


“부디 가엾은 사랑의 사도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기를.”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작가의 TMI: 프로텐시아의 성녀 일리나. 일리나는 성녀의 직책에서 내려올 때, 자신에 대한 평가 한 줄을 제외하고 모든 기록을 지우기를 원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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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159화 전사의 나라 24.05.04 6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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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156화 전사의 나라 24.04.27 9 0 15쪽
188 155화 전사의 나라 24.04.24 6 0 15쪽
187 154화 전사의 나라 24.04.22 6 0 12쪽
186 153화 변하지 않는 24.04.19 6 0 25쪽
185 152화 변하지 않는 24.04.15 5 0 13쪽
184 151화 사막의 나라 24.04.13 6 0 15쪽
183 150화 사막의 나라 24.04.10 6 0 17쪽
182 149화 사막의 나라 24.04.08 6 0 16쪽
181 148화 사막의 나라 24.04.05 6 0 21쪽
180 147화 사막의 나라 24.04.03 8 0 12쪽
179 외전 다섯 번째 용사 終 24.04.01 8 0 31쪽
178 외전 다섯 번째 용사9 24.03.29 6 0 13쪽
177 외전 다섯 번째 용사8 24.03.27 9 0 16쪽
176 외전 다섯 번째 용사7 24.03.25 7 0 28쪽
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7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6 0 20쪽
173 외전 다섯 번째 용사4 24.03.15 10 0 19쪽
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8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7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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