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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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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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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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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4)

DUMMY

136화


“사내놈 둘이서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더냐? 기다리다가 짜증 나서, 그냥 돌아가려다 간신히 참았다.”

“가긴 어딜 가, 이 시간에? 한 층을 통으로 내줬잖아. 졸개들이랑 술이나 처먹고 있지 그랬어? 그리고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안 그래? 정 그렇게 할 일이 많으면, 지금이라도 귀가해.”


아쉬울 게 없는 인간의 말문이 막히는 화법을 오랜만에 접해 본, 폰틸랜드의 백작, 유스터스 로먼트 공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고 수틀려도 난도질이 불가능한, 예의가 아예 없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로먼트 공은 애써 만면에 웃음을 띠어 보였다.

그러고는 최선을 다해 살심을 가라앉혔다.

스스로는 예의가 있다고 자부하는 하지운이 히죽거리며 그의 고행을 성의 있게 지켜봐 주었다.


“북부 촌구석에서 왕 노릇 하다가 오랜만에 사람들 상대하려니 버겁지? 천천히 해.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 줄게.”


순간적으로 오십이 넘은 중년 신사의 고된 노력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하지만 거친 변경에서, 십 년이 넘도록, 우두머리 노릇을 해 온 경력이 장난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금세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은 로먼트 공이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고맙다, 기다려 줘서.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자가, 너 같은 경우 없는, 무뢰배를 상대할 일이 무에 있겠느냐. 확실히 짐승을 상대로 사람다운 대화를 하는 게 쉽지가 않구나.”

“축하해. 요즘 들어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다더니, 입담만 잔뜩 늘었구나.”

“어디까지... 주워들은 게냐?”

“당신 자식새끼 넷 중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었다는 거. 그래서 열세 살 먹은 사내새끼 하나 남았다는 거. 거기에 조카 놈들까지 무려 넷이나 잃었다는 것 정도. 계속할까?”

“후으읍... 물론이다. 계속 읊어 봐라.”

“숲에서 애새끼들과 함께 병력의 구 할을 날려 먹었다는 거. 그래서 차기 왕권에 도전할 여력이 없다는 거. 그리고... 당신 조카딸이 부활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는 거. 여기까지야. 내가 아는 게 고작 이 정도밖에 없네. 뭐, 덧붙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버러지 같은 정보 길드 놈들...”

“성질은 집에 가서 부리고, 본론을 얘기해 봐. 남들 다 갈 때 안 가고 남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먼틸리야, 번개 마법을 익혀 온 잘난 딸 덕에, 자신 있게 차기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라지만. 당신은 지금 그럴 처지도 아니잖아. 나한테 뭘 원하기에 남아 있는 거지?”

“결국... 먼틸리를 밀어주기로 결정한 거냐?”

“어, 솔직히 그놈 말고... 누가 있나? 다들 상황이 이래저래 복잡하던데. 설마 당신, 지금 이 상황에 아직도 욕심을 못 버린 거야? 당신이 뭐라고 징징거리든, 난 당신 못 밀어줘. 성가시게 굴면 그냥 죽여 버릴 거야. 당신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거버스처럼 늦둥이 보는 데나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때잖아. 고작 하나 가지고 되겠어? 애들 다시 키워야 하지 않아?”


이를 꽉 깨문 중년의 검객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한참 이 가는 소리가 진동을 한 후,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애초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당신 자신이잖아. 내 사견이긴 하지만 올 한 해 최악의 선택을 한 최고의 일인은 단연 유스터스 당신이야, 거버스 그 늙은이나 험프리가 아니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헛소리라니! 그렇잖아? 그놈들은 나름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 험프리야 당연히 제 놈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고, 거버스 놈도 뒈지기 전에 후손들을 위한 정리 작업을 하려고 했던 거겠지. 제 놈이 뿌려 놓은 원한도 다 정리하고, 모자란 후손 놈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경쟁 가문들도 죄다 멸문시키고 말이야. 워낙 미움받을 짓을 많이 했잖아, 그 늙은 병신이.”

“그런데... 나는... 그럴듯한 이유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건가?”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가지. 거버스가 슬슬 뒈질 나이가 되었는데, 후계자를 못 만들었잖아. 그러니 북부의 패권이 당신네 집안 아니면 먼틸리에게로 되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예전처럼.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먼틸리를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점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잖아? 여우머리 족장 놈을 잡아 와서, 거버스 같은 마법사라도 만들어 낼 작정이었던 거지?”

“......”

“이유는 그럴듯한데, 당신네 가문의 전력으로 여우머리 족장을 잡는 게 가당키나 했겠어? 그런 당치도 않은 착각을 했다는 게 웃긴다는 거야. 거버스도 막상 걔들을 만나 보고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갈기고는 미친 듯이 도망쳤었거든. 만나 보면 느낌이 전해져 와, 살벌한 놈들이라는 게.”

“......”

“네놈 때문에 그 마귀 같은 것들을 마주해야 했을 네 자식새끼들이... 크흑... 어떡하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날 거 같은데...”

“닥쳐.”


차분한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로먼트의 검이 하지운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노련한 중년의 검객은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현혹되지 않았다.


‘허공을 쑤신 거다! 이놈이 어디로!’


생각을 하다 말고 고개를 좌측으로 돌린 로먼트가, 몸을 왼편으로 틀면서, 양손으로 쥔 검을 우에서 좌로 비스듬하게 올려 베었다.


“적당히 해라, 유스터스. 그러다 죽는다.”


도중에 멈춰 버린 검의 날을 바라보며, 이를 악문 로먼트가 미련 없이 검을 놓아 버렸다.

어느새 뻗쳐 온 하지운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검의 날이 우그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놓기가 무섭게 로먼트는,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의 손잡이를 역수로 잡고 뽑아 들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린, 로먼트의 왼손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거칠게 내려쳐졌다.

그러고서는 일 초도 지나지 않아서, 오른손에 잡혀 있던 단검이 왼 손등을 뚫고 테이블에 박혀 버렸다.


“끄윽!”


성질머리가 보통이 넘는 중년의 백작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하지운을 향해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애초부터 널 차기 왕의 후보로 고려조차 안 했던 거야. 네 참을성과 판단력이 네 검술 실력의 반만 되었어도, 내가 얼마나 피곤했겠냐? 너와 먼틸리를 저울질하느라고.”

“이이익!”

“지금 보니까, 나야말로 큰 착각을 했던 거였네. 올해 최고의 선택을 했던 건 바로 네놈이다. 네놈의 가문이 건재한 상태였다면, 내가 너희를 가만뒀겠냐? 끝까지 왕좌를 포기 못하겠다고 지랄했을 네놈인데, 전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너희 가문을 내가 그대로 두고 떠났겠냐고? 넌 죽여 버리고, 너희 가문도 반쯤 작살냈겠지.”


살기를 살짝 흘리고 있는 하지운을 상대로도 핏발 선 눈을 결코 움직거리지 않는 로먼트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하지운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선 다음,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이보시오, 폰틸랜드 백작. 나한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온 거 아니었소? 처음부터 내 손에 짓뭉개지러 온 거였소? 이 정도 했으면 날 죽여 보겠다는 헛된 망상도 버리고, 왕좌에 대한 야심도 그만 접어야 하지 않겠소?”

“네놈이 먼틸리 놈의 본색을.”

“그만! 이 자식이 날 아주 애 취급을 하네. 내가 왕이란 것들에게 뒤통수를 두 번이나 맞을 놈으로 보이는 거지? 내가 그 새끼 본성을 모를 거 같아? 딸년을 몇 년 더 살려 주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 새끼 눈깔을 안 보고 있었을 거 같냐고?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딸년을, 정국 장악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새끼인 걸 내가 미처 몰랐겠네. 네 말대로라면.”

“네놈...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면서...”

“그러니까 내가 거버스를 가지고 그 지랄을 한 거야. 내 등에 칼 박으면, 정말 재미없을 거라는 걸 왕국 전체에 각인시켜 주려고. 험프리와 그놈의 졸개들도 아주 똥걸레로 만들어 놓을 거야. 개레스 먼틸리든 정보 길드든 감히 나와 원수질 엄두도 안 나게 해 줘야 하니까. 그리고 원래 왕좌에는 먼틸리 같은 놈들이 앉는 게 맞아. 너같이 성급하고... 아니다, 너 또 삐질라. 어쨌든 그거 계속 손에 박고 있을 거 아니지? 안 아파? 빼 줄 테니까 다시는 덤비지 마. 다음번에는 그냥 잘라 버릴 거야.”

“놈은 제이의 험프리가 될 게 뻔한 놈이다! 또다시 교활한 뱀 같은 놈을 왕위에 올리려는 것이냐?”

“하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또 죽이고 다른 놈으로 바꿔 줄게. 됐지? 이제 왕위 얘기는 그만 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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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겨울 여행 (3) 24.01.07 34 1 9쪽
135 겨울 여행 (2) 24.01.04 34 1 9쪽
134 겨울 여행 (1) 24.01.02 38 1 10쪽
133 신념을 가진 미친놈 (16) 24.01.01 32 1 10쪽
132 신념을 가진 미친놈 (15) 23.12.29 34 1 9쪽
131 신념을 가진 미친놈 (14) 23.12.27 32 1 9쪽
130 신념을 가진 미친놈 (13) 23.12.25 35 1 9쪽
129 신념을 가진 미친놈 (12) 23.12.22 39 1 10쪽
128 신념을 가진 미친놈 (11) 23.12.20 35 1 9쪽
127 신념을 가진 미친놈 (10) 23.12.18 41 1 9쪽
126 신념을 가진 미친놈 (9) 23.12.16 37 1 9쪽
125 신념을 가진 미친놈 (8) 23.12.14 39 1 9쪽
124 신념을 가진 미친놈 (7) 23.12.11 36 1 9쪽
123 신념을 가진 미친놈 (6) 23.12.09 39 1 9쪽
122 신념을 가진 미친놈 (5) 23.12.07 38 1 9쪽
121 신념을 가진 미친놈 (4) 23.12.05 40 1 10쪽
120 신념을 가진 미친놈 (3) 23.12.03 42 1 9쪽
119 신념을 가진 미친놈 (2) 23.12.01 37 1 10쪽
118 신념을 가진 미친놈 (1) 23.11.30 47 2 11쪽
117 마왕의 길 (18) 23.11.28 47 1 10쪽
116 마왕의 길 (17) 23.11.25 42 1 10쪽
115 [수정] 마왕의 길 (16) 23.11.23 43 2 10쪽
114 마왕의 길 (15) 23.11.21 40 1 10쪽
113 마왕의 길 (14) 23.11.19 46 2 10쪽
112 마왕의 길 (13) 23.11.16 46 1 10쪽
111 마왕의 길 (12) 23.11.15 51 1 10쪽
110 마왕의 길 (11) 23.11.12 50 2 10쪽
109 마왕의 길 (10) 23.11.10 53 2 10쪽
108 마왕의 길 (9) 23.11.08 55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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