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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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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5.22 00:53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1,265
추천수 :
499
글자수 :
865,661

작성
23.11.1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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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마왕의 길 (10)

DUMMY

108화


서부 변경 칠주 중 네 개의 주가 콘체스터주 아랫녘에 위치한다.

남쪽부터 탤머스주, 록스버리주, 베릭주 그리고 클리퍼드주가 차례대로 자리 잡고 있다.


각 주마다 한 명씩 존재하는 백작 넷을 포함하여, 네 개 주 전체에 총 스물일곱 명의 상위 영주가 본거지를 두고 변경 영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단지 변경 주 내에 장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변경 영주’로서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변경 영주들이 누리는 특권이 탐이 나서 그들 중 한 명이 되려 한다면,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변경 주 내에 위치한 자신의 장원에,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거주할, ‘거성’을 짓고 그곳에서 죽치고 살면 된다.


그런 후 왕성에 통보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따로 허가를 받는 것이 아닌 통보 행위만 하고 왕성에서 확인했다는 증서만 전달받으면, 그 순간부터 변경 영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방법이 간단한데도 변경 영주의 수가 좀처럼 늘지를 않는다.

세금도 안 내고 괴물들의 피와 가죽으로 벌이도 쏠쏠한데, 변경에 장원이 있어도 이사 오는 놈이 거의 없다.

그저 다른 변경 영주들에게 판매하거나 임대할 생각밖에 없는 자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괴물들 몸뚱어리를 해체해서 큰돈 벌어먹는 삶보다, 평생 괴물 꼬라지 안 보고 살아가는 삶 쪽이 다수에게 더 선호된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변경 지역에서 수백 년을 죽치고 살아온 자들은 타 지역의 인간들과 사고 자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좀 더 억세고 호전적인 기질을 지녔으며, 좀 더 탐욕스럽고 야심만만하다.

노상 대화보다 폭력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곤 한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로저는 난놈이었다.

열세 살에 곰 피를 처먹고 올해 스물세 살에 뒈질 때까지 고작 십 년의 세월이었다. 햇수로 따져도 십일 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저 이 미친 애새끼가, 서부 변경에 적을 둔, 모든 용맹한 이들의 심장에 극복할 수 없는 공포를 심어 주고 간 것이다.

하지운이 생각하기에, 망치 두 자루를 가지고 저지른, 브리갠트 왕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가스라이팅이 아니었나 싶다.


각 주의 주요 성들을 지나가며, 하지운은 로저 드레이시의 화려한 부활을 만방에 과시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성을 지배하는 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탤머스주 인근 황무지에서 이미 한 번 퇴짜 맞은 경험이 있던 그들이지만, “그래, 용서해 주마.” 이 한 문장을 듣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거버스와 대니얼을 홀딱 벗겨 놓고 온갖 고통과 수모를 주는 하지운의 패악질에 딱히 다른 의도가 담겨 있진 않았다.

그저 험프리와 그의 유쾌한 벗들에게 불안과 초조 속의 기다림을 강요하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단순한 목적이 다였다.


그런데 장소를 제공 중인 서부의 영주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이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운이 절대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지금 두 백작이 보여 주고 있는 퍼포먼스가 그들을 돌아 버리게 만드는 중이었다.


지금 하지운이 누구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서 저 지랄을 떨고 있는지를 고민하느라, 그들의 모발이 실시간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무지에서 거버스를 때려잡고 한 달 가까이가 지났다.

탤머스주와 록스버리주 그리고 베릭주를 지나 클리퍼드주에 다다를 동안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삼 주 전 탤머스주 북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영주인 털리 영주 월터 리드브룩의 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털리 성내의 광장 한가운데서 한창 채찍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귀하기 그지없는 두 명의 벌거벗은 백작들이, 소머리 좀비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피범벅이 된 채로 구슬픈 비명을 지르는 인세에 다시 보기 힘든 행위 예술이었다.


인근의 자유민들이 겨울나기 준비도 내팽개치고 떼거리로 몰려와, 광장 전체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광장 한편에 급조된 관람대에서, 리드브룩 가문의 집사가 준비한 돼지 통구이와 와인을 즐기며, 주민들과 함께 채찍 쇼를 관람하던 하지운이 갑자기 고개를 홱 꺾었다.

난데없이 내성 쪽에서 어수선함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웬 때깔 좋은 할멈 하나가 정신 줄 놓은 사람처럼 달려 나왔다.

그 뒤로 딸들과 손주들로 보이는 이들이 미친 듯이 쫓아 나오고 있었다.


광장에 가득 찬 관객 때문에 잠시 길이 막힌 노부인이 하지운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비록 주민들의 함성 소리 때문에 광장이 떠나갈 지경이었다 해도, 쓰잘머리 없을 정도로, 청력이 진화한 하지운이 그녀의 고성을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용은 뭐 별거 없었다.

자식들과 손자들이 드레이시 가문을 지원할지 말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때, 자신이 나서서 출병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왕 온 김에 괘씸한 늙은 년의 목을 치고, 후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가 달라는 뻔한 헛소리였다.


말 같지도 않은 구라였지만, 노인네가 워낙 애절하게 몸부림을 치니, ‘속아 주는 시늉이라도 해 줘야 하나?’ 하는 망설임이 들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인 근처에 있던 주민들이, 영주의 노모를 알아보고, 허겁지겁 길을 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두었다가는, 관람대 위에서, 할멈과 단 둘이 눈물겨운 대화를 나눠야 할 판이었다.


하지운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집사에게 한 마디 했다.


“날 짜증나게 해서 네놈들이 얻는 게 뭐냐? 설마 노인네에게 직접 나와서 빌라고 시켰냐? 그러면 내 마음이 바뀔 것 같았나?”


기겁을 한 집사가 노부인 주변으로 다가온 리드브룩의 피붙이들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팔을 내저었다.

눈치 빠른 손자들이 금세 알아먹고, 조모의 팔다리를 잡고 어깨에 들쳐 올렸다.

그러고는 몸부림치는 조모를 들고는 부리나케 아성 쪽으로 내달렸다.


비슷한 일들이 가는 곳마다 발생했다.

기색들을 보니 연출된 상황도 아니었다.

주로 노인네들이 뛰쳐나와서는 ‘제발 날 죽여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로저 이 악귀 놈이 왕국 서부에서 어떤 이미지를 구축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진짜 로저라면 배신감을 느끼고 개빡쳤을 수도 있다.

그래서 네 개 주의 한다하는 집안들을 전부 도륙 냈을 수도 있다.


사실 서부 변경의 가문들이 대대로 드레이시 가문의 덕을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했다.

로저 놈이나 개차반이었지, 드레이시 가문의 역대 가주들은 호전적이기는 해도 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괜히 서부 변경에서 대장 노릇을 해 왔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가 잘나기도 했지만, 베푸는 것도 잘했으니 다들 숙이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도 찔리는 것이 있어서, 지레 겁먹고 야단법석을 떨어 대고 있는 것이다.

단지 로저 놈의 지랄 같은 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운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짜증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살생부에 이름도 없는, 인정머리 없는, 이웃 영주들은 사실 하지운의 고심 거리도 못 되었다.


하지운 본인도,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겠다고, 자신을 희생할 인간이 절대로 아니다.

이곳에 온 첫날 로저 놈의 잔여 영혼조차도, 제 놈 피붙이들을 버리고, 일단 몸부터 피하자고 지랄을 했었다.


당사자들도 그러는 마당에, 주변 이웃들이 심보 좀 고약하게 썼다고, 찾아가서 행패를 부릴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별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치게 되니, 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심각하게 징징거린다고, 쉽게 웃으며 사과를 받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처음에는 고개를 조아리며 황송해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달 전 황무지에서 하지운이 괜히 영주들에게, 막말을 하면서, 협박질을 한 게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극도로 혼란스러워 하는 영주들의 반응을 보고는 아차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너무 로저답지 않았다.


굳이 하지운 자신이 로저의 역할극에 정성을 다할 필요도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주변 놈들에게 위화감까지 느끼도록 만들 필요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로저 놈이 로저 놈이 아닌 것 같다.’, ‘웬 생소한 놈이 로저 탈을 뒤집어쓰고, 로저 시늉을 하고 있는 것 같다.’와 같은 쓸데없는 괴담이 돌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뭐 솔직히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긴 하다.

어차피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면, 싹 다 죽이고 무마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공연히 귀찮은 돌발 상황을 자초하는 건, 하지운의 관점에서, 세상 병신 같은 짓이긴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로저다운 모습을 줄기차게 보여 준 후, 서부 변경 유람을 마칠 생각이다.

변경의 영주들이 보기 힘들어한다고, 기존의 고문 쇼를 조기 종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로저다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법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예기치 못한 장점을 발견했고 그 장점 때문에 일부 계획도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따로 추구하고 있던 목표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벌써 달성하기까지 했으니, 더욱더 이 패악질을 그만두고 싶지 않은 하지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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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수정] 마왕의 길 (16) 23.11.23 39 2 10쪽
114 마왕의 길 (15) 23.11.21 35 1 10쪽
113 마왕의 길 (14) 23.11.19 41 2 10쪽
112 마왕의 길 (13) 23.11.16 41 1 10쪽
111 마왕의 길 (12) 23.11.15 45 1 10쪽
110 마왕의 길 (11) 23.11.12 45 2 10쪽
» 마왕의 길 (10) 23.11.10 47 2 10쪽
108 마왕의 길 (9) 23.11.08 50 2 11쪽
107 마왕의 길 (8) 23.11.06 47 2 11쪽
106 마왕의 길 (7) 23.11.04 45 2 10쪽
105 마왕의 길 (6) 23.11.01 47 2 9쪽
104 마왕의 길 (5) 23.10.31 49 2 10쪽
103 마왕의 길 (4) 23.10.27 48 2 10쪽
102 마왕의 길 (3) 23.10.25 48 2 9쪽
101 마왕의 길 (2) 23.10.24 54 2 10쪽
100 마왕의 길 (1) 23.10.21 53 3 9쪽
99 정진 (12) 23.10.19 48 2 10쪽
98 정진 (11) 23.10.18 49 2 9쪽
97 정진 (10) 23.10.15 55 3 10쪽
96 정진 (9) 23.10.12 53 3 9쪽
95 정진 (8) 23.10.10 58 3 10쪽
94 정진 (7) +3 23.10.08 62 3 9쪽
93 정진 (6) 23.10.06 57 4 9쪽
92 정진 (5) 23.10.04 57 3 9쪽
91 정진 (4) 23.10.02 57 4 10쪽
90 정진 (3) 23.10.01 62 3 9쪽
89 정진 (2) 23.09.29 62 3 9쪽
88 정진 (1) 23.09.27 70 3 9쪽
87 인연 (14) 23.09.25 69 3 10쪽
86 인연 (13) 23.09.23 73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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