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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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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2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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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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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1)

DUMMY

188 화


야외 노출 마니아들의 구렁텅이를 평정한 새 역사 창조의 건아가 숲속에서의 마지막 조식을 즐기는 중이다.


테이블 위에는, 황금빛 열매 세 개가 담긴, 은접시 한 장과 물 한 잔만이 놓여 있는 상태다.

아침 댓바람부터 새끼 돼지나 거위를 한 마리씩 통으로 뜯어 대던 그동안의 식습관을 고려해 봤을 때, 몹시 생소해 보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정보 길드 놈들을 만난 후 육류 섭취량이 지나칠 정도로 증가해, 승아의 한숨이 나날이 깊어져 갈 무렵 공교롭게도 비건 끝판왕들을 만나 버린 하지운이다.


‘그 애는 날 위해서 시말서도 마다치 않았는데... 나란 놈은 고작 고기 쪼가리를 못 끊어서, 기어코 그 애를 울게 만들다니... 내가 오늘부터는,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디톡스를 하고야 만다!’


생명의 나무 열매는 엘프들이 성장기에 먹는 일종의 성장 촉진제다.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숲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엘프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종파로 몰려가 대장로에게 인사를 올린다.

그 자리에서 대장로는 미성년 엘프들에게, 종파에서 소중하게 보관 중이던, 열매를 한 알씩 꺼내 먹이며 그들의 성장을 기원하는 의식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어 왔다.

그렇게 생명의 나무 열매를 해마다 한 알씩 먹고 성장한 엘프들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한서불침의 능력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개 뭣 같은 자신의 식습관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던 하지운은 헌신적인 여친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런 그의 밥상에는, 원주인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셔 두고 일 년에 단 한 알만 먹는, 기적의 열매가 무려 세 개나 놓여 있던 것이었다.


물론 하지운이 미친 식탐의 대식가라서 이러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엘프들이 약사도 아닌데, “공복에 한 알만 드세요.”와 같은 복약 지도를 해 줬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디톡스 겸 식습관 개선을 하겠다고 이러고 앉아 있는 중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열매 하나를 한 입에 삼켜 버린 하지운이, 눈을 번쩍 뜨고는, 미친 듯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우렁찬 신음 소리와 함께 장엄한 음악이라도 흘러나올 듯한 광경이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쩝쩝거리던 하지운이 남은 열매 두 개를 내려다보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어 댔다.


“대, 대박... 뭐지, 이 기적의 다이어트 보조제는? 이런 아름다운 맛에 이런 포만감이라니... 만 이천 개 넘게 뺏어 왔는데... 삼시 세끼 이것만 먹어도, 십일 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겠는걸. 어쩐지 반의반만이라도 남겨 달라고 애걸복걸하더라니. 귀한 물건이 맞았어. 설마... 이런 좋은 걸 먹고 커서, 한겨울에도 팬티 바람으로 버틸 수 있는 건가? 반은 남겨 뒀다가 나중에 우리 승아 먹여야겠다. 그러면 몸에 열이 많아져서, 옷 입는 걸 싫어하게 되겠지.”


약혼녀를, 관음증 환자로도 부족해서, 노출증 환자로 만들 결심을 한 개변태 놈이 히죽거리다 말고 느닷없이 눈살을 찌푸려 댔다.


“협정을 맺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아침 식사도 다 안 끝났는데 벌써 습격질이야? 엄마, 아빠한테 가정 교육을 약식으로 받고 컸어? 예의는 얻다가 팔아먹은 거지?”


하지운의 면박이 다 끝나기도 전에, 키가 다소 큰 편인 늘씬한 엘프녀 하나가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하지운의 간이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시에 짜증을 내려던 하지운도, 이채가 도는 눈으로, 넋이 나간 엘프녀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잠깐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려다 동시에 말을 멈추었다.


“늙은 네가 먼저 하세요.”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하지운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발언 순서를 양보했다.


“고맙구나, 인간의 아이야. 한데 누구냐, 네놈은?”


잠시 짧은 사색의 시간을 가진 하지운이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말해 주면, 네가 알아?”

“... 그렇기는 하구나. 다시 물어보마. 네 아침 식사에 그게 왜? 그것도 무려 두 개씩이나 올라와 있는 것이냐?”

“아, 이거? 배상금 대신 받아 온 거야.”

“배상금... 협정도 그렇고 배상금도 그렇고, 대체 무슨 소린지 짐작이 잘 안 가는구나. 설명 좀 해 줄 수 있겠느냐?”

“아, 싸웠어. 네 피붙이들로 추정되는 애들하고 한 일주일 정도. 참고로, 미리 말해 주는 건데, 시비는 네 동족들이 먼저 걸었어. 어쨌든 나한테 시원하게 처맞더니, 사죄의 뜻으로 이런 것들을 몇 개 바치더라고. 그래서 서로 좋게 좋게 마무리하기로 했어.”

“몇 개? 그걸? 그 몇 개가 대체 몇 개를 말하는 것이냐?”

“한 만 이천 개 정도.

“......”


선선하던 가을 아침의 숲속 공기가 서서히 살을 에는 듯한 살벌한 냉기로 채워져 갔다.


“시원하게 때렸다고 했지? 우리 쪽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얼마나 했다는 얘기냐?”

“잠깐만! 나 좀 씻고 대답해도 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찝찝한 건 도저히 못 참겠거든.”

“그러려무나.”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하지운이, 수납장에 짐들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는, 양치질만 간단하게 하고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엘프녀가 풍겨 대는 기운을 고려했을 때, 도저히 오래 참아 줄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전투가 가능한 젊은 놈들만 만 칠천 정도 죽였어.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줘?”

“... 그럴 필요 없다. 하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네놈이 달라는 대로 다 줬겠지. 솔직히 대답해 줘서 고맙다. 이제 곧 죽을 텐데,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느냐?”

“야, 진짜 경우 없네. 가정 교육을 잘못 받아도, 한참 잘못 받았어.”


만면에 경멸스러운 조소를 가득 머금은 하지운의 비아냥거림에, 눈살을 살짝 찌푸린, 엘프녀가 궁금함을 못 견디고 기어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뭐가 불만이냐? 아직도 죽을 준비를 다 마치지 못한 것이냐?”

“네 입만 입이냐? 너만 질문하고 답변 들으면 다 끝난 거야? 나는? 나는 질문 시간 없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는데, 나한테도 궁금한 거 없냐고 물어보는 게 기본적인 예의 아냐? 너희 종족은 어릴 때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냐? 하긴... 그걸 옷이라고 걸치고 다니는 미개한 것들이. 야, 그럴 거면 그냥 홀딱 벗고 다녀. 그 신혼여행 필수템 같은 넝쿨은 뭐 하러 처감고 있냐? 섹시해 보이는 거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데.”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엘프녀의 낯짝에 미세하게나마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였다.

서서히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표현이 다소 천박하기는 하지만, 딱히 사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잘못하였구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서 물어보거라.”

“너, 진짜 엘프 맞아? 왜, 다른 엘프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숲의 끄트머리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싸돌아다니고 지랄이야?”

“네가 먼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으니, 나도 거짓 없이 다 대답해 주마. 어차피 곧 죽일 놈인데, 거리낄 것이 무에 있겠느냐. 일단 내가 엘프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실전된 우리 일족의 비술을 복원하기 위해, 아이들과 일부러 거리를 둔 채로 이곳에서 홀로 연구 중이지.”

“왜? 그냥 집에서 하지.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변두리까지 나와서, 사서 고생을 하고 지랄이야? 그리고 네가 집에 있었으면, 내가 그렇게 활개를 치면서 너희 애새끼들을 죽이고 다니지도 못했을 텐데.”

“그건 그렇구나... 하지만 금단의 비술을 소중한 아이들 곁에서 연구하는 얼빠진 종자가 하늘 아래 그 어디에 있겠느냐? 세상 모든 일은 다 득과 실이 함께 따라오는 법이지...”

“잠깐! 그 비술이 금단의 비술이야?”

“그렇다. 비술 앞에 금단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뭐 이상할 게 있느냐? 으레 붙지 않느냐?”

“하아... 어쩐지. 처맞는 이유가 다 있었네. 고맙다. 너 안 만났으면 계속 궁금한 채로 살 뻔했다.”

“... 궁금한 건 다 해소되었느냐?”

“아니, 너 몇 살이야?”

“모른다.”

“양아치냐?”

“양아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구하느라 바빠서 사백오십 살 이후로는 세지 않았다. 뭐... 대충 백 년 정도는 지난 것 같구나.”

“미안해. 내가 말이 심했어. 그럴 만한 나이네. 그런데 그렇게 바쁘다면서, 낯짝 관리는 열심히 했나 봐? 어려 보이고 엄청 예쁜데?”

“아... 인간의 아이야,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이 나이에도 외모를 칭찬받으니 마냥 싫지가 않구나. 연구 중에 갑자기 젊어져서,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뒤에 있는 두 놈은 할머니 졸개들이야? 그러니까 경호원 아니... 호위병 같은 거냐고? 대뜸 죽였는데, 알고 보니, 그냥 구경 나온 이 동네 주민들이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잖아.”

“내 가족이다.”

“염병할... 또 그놈의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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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4) 24.04.30 17 1 10쪽
191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3) 24.04.28 28 1 10쪽
190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2) 24.04.25 20 2 9쪽
»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1) 24.04.23 21 1 10쪽
188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1) 24.04.21 19 1 9쪽
187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0) 24.04.19 21 1 10쪽
186 새 역사 창조의 건아 (9) 24.04.17 22 1 9쪽
185 새 역사 창조의 건아 (8) 24.04.16 29 1 10쪽
184 새 역사 창조의 건아 (7) 24.04.13 27 1 10쪽
183 새 역사 창조의 건아 (6) 24.04.11 24 1 9쪽
182 새 역사 창조의 건아 (5) 24.04.09 22 1 9쪽
181 새 역사 창조의 건아 (4) 24.04.07 31 1 9쪽
180 새 역사 창조의 건아 (3) 24.04.05 26 1 10쪽
179 새 역사 창조의 건아 (2) 24.04.03 26 1 10쪽
178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 24.04.02 27 1 11쪽
177 웬도버의 봄 (15) 24.03.28 30 1 12쪽
176 웬도버의 봄 (14) 24.03.26 30 1 10쪽
175 웬도버의 봄 (13) 24.03.25 30 2 10쪽
174 웬도버의 봄 (12) 24.03.22 28 1 10쪽
173 웬도버의 봄 (11) 24.03.21 28 1 10쪽
172 웬도버의 봄 (10) 24.03.18 31 1 10쪽
171 웬도버의 봄 (9) 24.03.17 37 1 10쪽
170 웬도버의 봄 (8) 24.03.15 29 1 9쪽
169 웬도버의 봄 (7) 24.03.13 34 1 9쪽
168 웬도버의 봄 (6) 24.03.10 29 1 9쪽
167 웬도버의 봄 (5) 24.03.08 30 1 10쪽
166 웬도버의 봄 (4) +2 24.03.06 33 2 10쪽
165 웬도버의 봄 (3) 24.03.04 31 1 9쪽
164 웬도버의 봄 (2) 24.03.02 3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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