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경인철도 부설권(3)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아...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호러스 뉴턴 알렌. 미국 공사관 부총영사.
지금 이혁 앞에 앉아있는 이 미국인은 고종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의사출신으로 제중원을 설립하고 조선에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파한 공로자이고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
그는 고종과의 친분으로 수많은 조선의 이권을 미국에 가져다줬고 그 공로로 끝도 없이 승진해, 마침내 주한 미국 특명전권대사가 된다.
18년.
그 오랜 시간동안 조선과 인연을 맺었지만 그는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을 도와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선을 배신한 개새끼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혁은 그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은 변하지 않소. 조선 왕실이 지난 7월에 당신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오. 왜냐하면 그 계약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되기 때문입니다.”
“뭐... 뭐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말입니까? 저희 미국은 공정한 계약을 권유했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900만톤의 광석을 생산할 수 있는 금광을 조선이 미국과 공동 경영한다는 조건이 공정하다는 말이오? 내 생각에는 미국이 투자금, 기술만 지원하고 그 대가로 금 생산량의 30퍼센트만 가져가도 남는 장사 같군.”
을미사변 이전인 1895년 7월, 조선 왕실은 공동경영 조건으로 미국인 모스의 운산금광 개발에 동의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마저 빼앗기게 된다.
그러니까 알렌 덕분에 900만톤의 광석을 채굴해 1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금광이 넘어간 것이다.
금광을 캐는 동안 미국이 조선에 매년 2500원씩 지불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손해다.
이혁의 말대로 30퍼센트만 금을 가져가도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확실히 미국의 조건은 불합리했다.
이렇게 계약에서 상대를 속여서는 안 된다는 일반원칙을 신의성실의 원칙이라고 한다.
실제 법 규정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가 당연히 지켜야 하는 원리다.
결국 미국은 운산금광의 채굴 예상량을 현저히 속였으니, 이혁의 논리는 앞뒤가 맞았다.
“그... 그렇지만!”
“아아, 긴말 할 것 없소. 알렌 부총영사. 어차피 그대는 미국 사람 아니요? 아버지는 그대를 믿었지만 나는 믿지 않소. 금광을 가지고 싶다면 더 나은 조건을 가져오시오.”
“이...이익!”
알렌은 욕설을 퍼 붇고 싶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조선의 왕태자였다.
말 한마디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그는 분을 삼키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그가 이때까지 조선의 이권을 미국에 팔아넘겨 얻은 것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되지만... 어디 인간이 그렇던가?
지금 당장 내 이익만 우선이지.
알렌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왔으나, 도리어 운산 금광채굴권 까지 빼앗겨 버렸다.
“괜찮겠습니까? 왕태자 전하.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김홍집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도 기고만장하던 알렌 부총영사의 표정을 보고 신이 났지만 뒤탈도 걱정 되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이혁은 그런 걱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국이 조선의 정치에 개입한다는 망상은 세상물정 모르는 고종이나 할 법하지, 이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미국은 스페인에게 독립한 필리핀을 한입에 꿀꺽 삼킬 예정이다.
이혁이 살아가던 21세기의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소리다.
‘그런 1895년의 미국이 조선을 위해서 일본과 전쟁을 할 리 없지.’
“걱정하지 마시오. 솔직히 당장 조선 땅에서 쫓아내고 싶은 걸 참았으니, 그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누가 되었든지 나는 손해 볼 생각이 없어요. 일단 경인철도 부설권부터 잘 팔아봅시다.”
“알겠습니다. 전하.”
당당한 이혁의 모습을 보며, 김홍집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500년 역사의 조선은 국제무대에서 약소국으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관리, 왕족들은 항상 초라했고 생존을 위해 비참해졌다.
그런데 왕태자 이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당당했고 단호했다.
김홍집은 왕태자 이혁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왕좌지재로 타고났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조선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굳건한 지도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외세의 위협도 이겨낼 수 있는....’
**
일본 공사관 부무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한가하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차 문화가 유행했는데, 특히 귀족들이 즐겨 마셨다.
커피, 홍차, 전통차...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오카모토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성공했다는 충만감이니까.
일개 군인이 이정도로 출세했다는 성취감.
“끄으... 언제 마셔도 좋단 말이야.”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고 온 몸의 근육은 느슨하게 늘어졌다.
사실 을미사변과 나주의 공작으로 그는 조금 지쳐있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약간의 휴식은 필요하다.
“부...부무관님! 부무관님!”
“무슨 일이냐? 멍청한 놈. 내가 티타임에는 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오카모토는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부관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간만에 나주에서 일을 잘 처리하고 와서 쉬고 있는데...
물론 그가 나주의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여유다.
나주에서 일이 틀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 나주에 천마탈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칙쇼! 그게 정말이냐?”
오카모토는 책상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그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유길준 집에서 일어난 그 참사에서 살아나온 후, 그는 오직 천마탈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 했지만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천마탈이 나주에 나타났다니!
오카모토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천마탈의 정체는 무엇인가?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다니...
“예! 지금 한양의 거리가 난리가 났습니다. 누군가 천마탈이 나주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거든요.”
“조선인들이 기가 살았겠구나...빠가야로! 크으...”
오카모토는 빠드득 이를 갈며 분노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야할 조선에 요즘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나주에 홍수가 제대로 난 것 같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천마탈이 구했겠지. 흥! 쳐 먹인 돈 값은 하는군. 그 늙은이.”
“그...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영산강의 제방이 지켜졌고 지류 쪽에서 작은 물난리가...”
“뭐라고?! 이런 빠가야로! 그딴 일도 제대로 못한단 말이냐? 어?!”
오카모토는 책상에 있는 서류를 집어던지며 분풀이를 했지만 부관이 무슨 잘못인가?
그는 안 좋은 소식을 전달한 죄밖에 없었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부무관. 지...진정하시지요.”
“그래. 다른 소식은 없고?”
허탈하게 물으면서도 오카모토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대체 천마탈은 왜 그가 하는 일마다 방해를 하는 것인가? 영산강의 제방은 왜 멀쩡하고?
그런데 제방의 공사에도 천마탈이 개입했다고??
증거는 없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천마탈만 나타나면 일이 꼬이는게...
“그리고 본국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뭣이? 어서 가져와라. 누가 보냈다는 말이냐?”
“아마 류몬샤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뭐?! 어서 내게 그 서신을 보여라.”
류몬샤의 이름이 나오자 오카모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을미사변 때 활약한 낭인단체 겐요샤와 다르게 류몬샤는 경제인 연합회였다.
일본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경제단체.
거기서 연락이 왔다면 뭔가 대단한 일본 제국의 이득이 엮여있을 것이다.
부스럭-
오카모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서신을 열었다.
평범한 종이로 만들어진 서신에는 여러 말이 적혀 있지 않았다.
오카모토는 부관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한 후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서신을 읽어나갔다.
“조선의 경인철도 부설권을 매입하라. 지금부터 너를 일본 공사관 공사 대리로 임명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