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정착민
드워프를 따라간 곳은 오크들의 집보다 넓은 공간.
심지어 한쪽은 벽을 터버려서 지나가는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오크들이 만들어 주더군. 장비들이야 내가 항상 챙겨다니던 것들이다.”
“저 무거운 것들을?”
그곳엔 꽤나 큰 화로에 풀무와 모루까지.
간이 대장간이 완성되어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깟 솥보다 훨씬 멋진 것을 보여주지.”
드워프는 쇠를 달구기 시작했다.
“근데 너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와츠다. 인간 너의 이름은 뭔가?”
“난 준우야. 지준우.”
“지준우.. 그렇군. 네가 이곳의 음식을 만드는 조리장인가?”
“뭐 지금은 그런 셈이지?”
대장장이 와츠가 솥 만드는 것을 구경하며 쓸데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우! 야그나르가 부르네.”
“무슨 일 있어?”
막내 오크가 뛰어왔다.
“석빙고가 완성됐네.”
벌써 때가 왔다.
급히 석빙고를 향해 움직였다.
마을 속 이질적인 모습.
판타지 세상 같던 이곳에 마치 경주에 온 듯한 비쥬얼의 거대한 석빙고가 완성됐다.
“어떤가 준우.”
“완벽해.”
원하던 형태 그대로다.
“이 곳이 고기를 오래 먹을 수 있게 해준 다는거지?”
“응, 창고에 보관 중인 것들 이쪽 방으로 옮겨줘.”
요구대로 석빙고에는 여러가지 방이 있다.
방마다 조금씩 온도차이가 났지만 가장 바깥 쪽의 넓은 방이 고기를 보관하기에 적합했다.
“나머지 공간은 어떻게 쓸 생각이지?”
“저기 가장 좁은 곳은 채소들 보관할거야.”
“그래도 남지 않나.”
“조만간 알려줄게. 고기부터 옮기자.”
틀만 만든다면 안쪽 방에서는 얼음을 만들 수 있다.
차가운 음식도 먹일 수 있단거지.
최신 냉장고도 아니지만, 가슴 설렌다.
“앗! 차거.”
뜨거운 뙤약볕 아래 있다가 석빙고 안 돌을 만지니 너무 차갑다.
“한국인이라면 찬물이지.”
드레이니의 식수는 우물에서 얻음에도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이 뜨거운 날씨에 항상 찬물이 그리웠다.
집으로 달려가 작은 스테인리스 통에 ‘오크의 샘물’을 가득 채워 석빙고에 넣었다.
그동안 맨날 미지근한 물을 마시느라 곤욕이었는데..
“드디어 찬 음료 마셔보나.”
물 뿐만이 아니다.
슬슬 발효가 되었을 테니까.
“후발효가 필요하긴 하지만..”
마을 안 커다란 돌틈 사이.
임시로 보관해두었던 것을 꺼냈다.
“나쁘지 않네.”
온습도계가 없어 불안했지만, 맥주의 발효상태는 괜찮았다.
그 중 일부만 걷어내 후처리 해 석빙고 찬물 옆에 두었다.
오크들이 석빙고에 식재료 옮긴 것을 확인하고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탕-! 탕-!
타앙-!
대장장이 와츠가 모루 위에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다.
얼핏봐도 솥의 형태는 아닌..
“뭐야? 너 솥 만들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랬었지.”
“포기했나봐?”
“무슨 소리지? 저기 안보이나?”
와츠가 가리킨 곳에는 이미 커다란 솥 하나가 놓여있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솥의 형태는 아니지만, 내 화구에 맞을만 한 크기의.
“어떠한가,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건이지?”
“흠..”
그 짧은 시간에 솥을 만들었다니..
자세히 보니 정말이지 잘 만든 솥이다.
‘탐나네..’
과연 이걸 달라고 하면 줄까 싶었다.
지금의 태도를 보면 절대 아니다.
칭찬을 해줘야 줄 것인가···
아니면 별로라고 해서 사용을 해볼 수 있게 해야하나..
짧은 시간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 정도 솥이면 무거워서 설거지도 힘들겠는데?”
“들어보고나 이야기해라.”
“딱 봐도 철 같은데 내 냄비들보다 훨씬···”
무거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보니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우면 강도가 약한 거 아니야?”
“오크도 구겨지지 못할 정도로 만들었다. 자.”
와츠는 내 손에 작은 망치 하나를 쥐어줬다.
“이건 왜..?”
“두드려봐라.”
철이라지만 망치로 두드린다면.. 망가질게 뻔하다.
하물며 ‘오크의 샘물’ 덕에 힘도 강해졌으니.
“두드려보래도.”
“흐음..”
애써 만든 솥을 망가뜨리는게 아쉽지만 와츠 앞에서 티 낼 수 없다.
깡.
망치로 내려친 충격에 손이 아플 정도의 진동이 전해졌다.
“그렇게 약하게 두드려서 찌그러지겠나?”
“야야!!”
와츠가 직접 자신의 망치로 솥을 두드렸다.
쾅!!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여전히 드워프나 오크의 힘을 따라갈 순 없는 수준.
“이것봐라.”
“네 망치로 만든 솥인데도 안 찌그러진다고?”
“이미 다 식었으니까. 달궈진 솥이었다면 변했겠지만 내가 만든 것의 강도는 나조차도 쉽지 않다. 이게 장인의 솜씨란거지.”
이 정도 물건은 한국.
아니 독일이나 일본의 장인을 만나서도 본 적이 없다.
“이거 나 줘.”
“그럴 순 없다.”
“왜! 그럼 솥을 어디다 쓰려고, 여기서 요리하는 건 나 뿐이잖아.”
“다시 녹여서 오크들의 무기로 만들거다.”
“굳이..?”
이미 잘 만든 제품을 다시 녹인다니.
“오크놈들과는 약속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난 네놈에게 신뢰가 없다.”
“난 거짓말 한 적도 없는데?”
“이 근방에 본 적도 없는 인간이란 종이 홀로 돌아다니는데, 누가 오크와 한패라 생각하겠나? 그런 놈을 구해주려 했다는게..”
“네가 오해한 거잖아.”
신뢰는 무슨.
그냥 딱 봐도 삐진거다.
“저 솥 주면 내가 맛있는거 해줄게.”
“필요없다.”
그럴리가 없다.
드워프들은 오크들처럼 먹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요 며칠 나는 녀석에게 음식을 제공한 적이 없다.
“너 오크들이 밥은 챙겨줘?”
“곰고기를 주더군.”
“생으로 먹는다고?”
“이곳에서 나 혼자 구워먹고 있다.”
지저분한 대장간 화로에서 대충 구워먹는 모양.
“원래도 그렇게만 먹어?”
“그럴리가 대장장이들은 솜씨가 좋아서 더 잘 해먹..”
와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맛있는 거 먹고싶으면 얘기해. 대신 그 솥은 꼭 들고오고.”
“···”
대답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민스럽겠지.
어떻게든 솥은 얻어내야한다.
퀘스트가 떠버렸으니 더욱 더.
[ 와츠가 만든 ‘솥’으로 요리 하세요. ]
대장간을 나오자 우리집 쪽에 오크들이 모여있었다.
“잠깐 기다려요, 곧 나눠줄테니까.”
오크들은 삼계탕과 곰고기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전부 그릇까지 들고왔다.
‘고블린 고기는 초벌만 해서 넣어두길 잘했지..’
얼마되지도 않는 고기를 족장이나 야그나르에게만 준다면 먹지 못한 오크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겠지.
“자 줄 서세요.”
뚜껑을 열자 엄청난 김과 함께 약간의 산삼 향이 올라왔다.
‘냄새가 짙은가보네.’
내 코에 날 정도라면 오크들은..이미.
“으읔!!”
다들 코를 틀어막았다.
“왜들 그래요? 냄새가 그렇게 별로예요?”
“그게.. 분명 맛있는 고기냄새가 나는데.. 중간에 이상한 풀냄새가 섞여있군.”
“그래 숲에서 맡던 그 향이야.”
걱정하는 오크들을 뒤로하고 먼저 내 그릇에 삼계탕을 담았다.
‘닭곰탕처럼 되어버렸네.’
오크들 몫은 부위별로 조각을 냈더니 삼계탕보단 닭곰탕 같았다.
푹 익은 산삼도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조각냈다.
“닭은 네 조각씩 가져가시고, 곰고기는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됩니다.”
취사병 생활 할 때가 떠올랐다.
자율배식을 했다가는 삼계탕을 못 먹는 인원이 생기기 마련.
“내가 닭을 더 잡아오면 더 먹어도 되나?”
“어떤 고기든 잡아다 손질해서 석빙고에 넣어두시면 더 많이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오크들이 재료를 구해다주면 나야 땡큐다.
“먹고싶은 건 뭐든 가져오세요.”
새로운 식재료라도 좋다.
“으.. 근데 이거 냄새가 좀..”
“그냥 먹어봐요, 또 잘 먹을거면서 괜히 그런다.”
“네에..”
***
준우의 음식이라면 언제나 먼저 나서서 먹었지만..
이 향은 너무 어렵다.
“킁킁!”
잠시 망설이던 사이.
다른 녀석들이 먼저 닭고기를 건져 입에 가져다댔고.
“후루룩! 후룹! 쫍!”
“쫍쫍!”
나도 그들 사이에 앉아 닭다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랜시간 푹 고아둔 덕에 그 질기던 야생 닭고기가 으스러지듯 입에 빨려들어왔다.
“후우후우-”
뜨거운 고기를 입 안에서 굴려가며 먹는 맛이 일품이다.
“야그나르, 맛이 어때?”
배식을 마친 준우가 그릇을 들고 옆에 앉았다.
“허어- 뜨겁지만 너무 부드럽고 고소하..허어!! 뜨거!”
“천천히 먹어. 국물도 마시고.”
“고맙네.”
입 안의 뜨거움이 진정이 되어갈 때 쯤.
옆에선 준우가 뽀얀 닭 국물을 들이켰다.
“크~ 국물이 끝내주네.”
“킁킁.”
“냄새만 맡지말고 마셔보래두. 전신에 기운이 넘치는 것 같다고.”
익숙치 않은 향은 고기보단 국물에 진하게 배어있다.
하지만···
“너 안 먹으면 후회할걸?”
준우의 말에 흔들렸지만.. 여전히 이 냄새는 너무 강하다.
“뭘 넣었기에 이런 냄새가 나는거지?”
“여기 이거 보이지? 이게 몸에 엄청 좋은거야.”
작고 동그란 나무조각 같은 것이 이 냄새의 원인이라니.
그것들만 하나 둘 골라냈다.
“야 뭐해! 그걸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라고.”
“하지만..”
“아오!! 아깝게! 자 먹어!”
“헙!!”
골라낸 나무조각을 집은 준우가 내 입에 넣어버렸다.
“컥!!커헉!”
“왜 왜그래 야그나르.”
“으윽.. 너무 쓰다.”
“계속 씹따보면 은근한 단맛도 느껴질거야.”
당장에라도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준우가 다시 요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후릅 후르릅.”
쓴 맛을 잊으려 국물을 들이켰다.
뜨끈한 국물이 혀 위로 쏟아지고 목구멍으로 들어가자.
그 고소하고 녹진한 국물이 입 안을 향긋하게 만들었다.
나무조각의 향이 맴돌긴 했지만, 온 몸에 피가 돌고 기운이 나는 맛이다.
“크흑!! 석빙고 짓던 피로가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구만.”
닭고기와 국물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아쉬움이 남았다.
‘더 먹고 싶구만..’
준우가 구워준 곰고기도 맛있었지만..
조금 전의 국물을 마셨을 때 기분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의 쾌감..
아니 그 이상이다.
“준우.. 넌 정말 세상 최고의 요리사일거다.”
“그랬으면 좋겠네. 자, 한잔 해.”
“물이라면 괜찮네. 아까 그 국물이라면 모를까.”
“덥잖아, 시원하게 한잔 해.”
건넨 성의를 봐서 한모금이라도 마셔야겠군.
“꿀꺽.꿀꺽. 으..으으윽!!”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이 느낌은..!
“왜 그러나 야그나르!”
“야그나르 괜찮아?”
너무나 차갑다.
이 물은 뭐지?
며칠간의 전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숲에서 만난 계곡.
그 곳에서 수 일만에 마신 첫모금.
그 이상으로 차가웠다.
“준우.. 대체 이 물은 어디서 떠 온 거지?”
“집 뒤쪽 우물에서.”
“그럴리가 없다. 우물 물은 이렇게 차갑지 않아. 또 홀로 밖에 나갔다 온 게로군!”
“아냐, 진짜야.”
[ 오크들이 ‘산삼 조각’을 섭취했습니다. ]
[ 오크들의 면역력이 강화 됩니다. ]
“잉..? 면역력?”
큰 질병은 커녕 감기도 안 걸릴 것 같은 오크들의 면역력이 강화됐다.
차라리 전투력이 올랐으면 더 좋아했을텐데..
“준우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나고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단 말이지.”
“나도 발가락 사이 하얗고 가렵던 것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제야 생각났다.
‘아.. 무좀도 있는 애들이었지..’
[ 지준우의 면역력이 강화됩니다. ]
“나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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