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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플로 님의 서재입니다.

아론 관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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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플로
작품등록일 :
2020.09.09 19:29
최근연재일 :
2020.09.27 21:3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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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8,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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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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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화

DUMMY

날이 밝고 아침이 되어도 아론 씨는 아직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노크를 해도 묵묵부답이자 나는 바로 옆 복도 방의 제임스 씨에게 갔다. 제임스 씨 역시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눈에 눈곱이 묻어있었다.


“모리건 씨,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오전 6시입니다, 6시. 저도 아론 주인님도 지금 자고 있을 시간이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서요. 이 집을 조금 조사해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사립탐정의 일은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거든요.”

“저야 의견은 없습니다만, 바깥의 센트리건만은 조심해주십시오. 본래는 도둑들을 쫓으려고 아론 씨가 장만했는데 허가증이 없는 사람에게는 한 번의 경고 후 바로 발포한답니다. 제가 그 허가증을 드리겠습니다.”


제임스 씨는 내게 팔찌 형태의 회색 밴드를 주었다. 자주 쓰는 오른팔에 끼우자 삑 소리가 났다. 이 저택의 보안조치는 정말 삼엄하군.


“왜 이런 삼엄한 보안조치가 필요한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안전한 상류층 구역 저택의 보안 치고는 너무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만...”

“...그게, 주인님께선 한 번 살해당하신 다음, 경찰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신 겁니다. 솔직히 저도 과도하다고는 생각하지만요. 그래도 주인님께서는 고집불통이십니다. 한 번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되도록이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고 싶군요.”

“하하하, 동감입니다. 그럼 주인님께서 방해받지 않도록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주십시오.”


잠자는 고객의 코털을 간지럽힐 무모한 행동은 안 하는 게 좋겠지. 나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저택의 구석구석을 점검했다. 이 저택은 총 2층으로 메인 홀이 중앙에 있고 양 옆으로 날개동이 있었다. 내 방은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복도에 있었고, 제임스 씨의 방은 왼쪽 복도, 아론 씨의 침실은 2층 메인 홀의 중앙에 있었다.


1층은 응접실, 주방, 서재, 주류 저장고 등이 있었다. 시원하도록 반지하식으로 지어진 주류 저장고에는 온갖 종류의 고풍스러운 병들이 선반에 나열되어 있었다. 반짝반짝하는 글라스들을 보니 아론 씨의 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히 전의 모건 가보다도 훨씬 부자였다.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세안을 하고 나왔는지 말끔해진 제임스 씨가 미심쩍은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격적인 집사처럼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제임스 씨는 주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 주류들은 진짜 알코올입니다. 아론 씨가 10년에 걸쳐 수집한 것들이지요. 되도록 눈으로만 보아주십시오. 깨지면 변상비가 장난 아니니까요.”

“아론 씨와 오래 일하셨나 봅니다.”

“네, 저를 거둬주신 분이 아론 씨이니까요. 그분 덕분에 저는 지금 이렇게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애주가여서 오랫동안 이 술 콜렉션을 모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술을 도통 입에 대지를 않으십니다.”

“죽고 살아난 것의 트라우마일까요?”

“저야 모릅니다만, 주인님께서 어서 정상으로 돌아오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아마 주인님께서 당신을 초청하신 것도, 마음속 응어리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임스 씨는 할 말은 다 했다는듯 주류 저장소에 나가려고 했으나 내가 그를 붙잡자 멈춰서 돌아보았다.


“뭡니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론 씨의 애인, 소피아라고 했나요? 그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럴 말을 할 입장이 안 됩니다. 모리건 씨가 탐정으로의 입장이 있듯, 저는 집사로써의 입장이 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아론 씨의 입장을 생각해보시죠. 아론 씨는 당신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길 바랄 겁니다. 주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게 집사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내 간곡한 부탁에 제임스 씨는 마음이 움직였는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소피아 아가씨는 이상한 여성이셨습니다. 어떨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환하게 웃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폭풍처럼 거칠게 화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론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두 분 다 외도도 하지 않으셨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두 분 사이는 특별했습니다.”

“...그렇다면 소피아 씨가 아론 씨를 살해할 이유는 없다는 거군요. 한 번 그분을 만나보고 싶은데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십니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쌍한 분... 모진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인님께서 면회도 자주 갔지만, 어느 날 몰래 챙겨온 나이프로 손목을 긋고 그만... 감옥 의료진이 갔을 때는 이미 과다출혈로 사망해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어제만 해도 아론 씨께서는 애인인 소피아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투로 대답했다, 재판도 이틀 뒤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론 씨께서는 제게 그분이 아직 살아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어딘가 잘못된 겁니까?”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죽음에서 돌아오신 직후, 가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피아 씨께서는 5일 전 감옥에서 틀림없이 자살하셨습니다. 제가 확인했으니 틀림없습니다.”


뭐가 뭔지 혼란스럽다. 아론 씨가 살해당한 게 5일 전이고, 그 살해혐의로 수감된 소피아 씨가 감옥에서 죽은 것도 5일 전이다. 어딘가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감옥에서의 자살이라, 이렇게 된다면 면회 가서 사정청취를 한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그 뒤로 나는 제임스 씨에게 소피아 씨에게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제임스 씨는 소피아 씨의 사생활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도움이 별로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 집의 집사 된 입장에서 저는 주인님과 소피아 씨의 교제를 반대해 왔었습니다. 주인님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요.”


내가 그 ‘안 좋은 영향’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저택의 초인종이 거세게 울렸다. 표정이 싹 굳은 제임스 씨는 곧바로 저택 정문을 향해 달려갔고, 어안이 벙벙한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제임스 씨가 하도 빨리 달려서 나는 제임스 씨가 정문이 도착하고 10초 뒤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은 제임스 씨가 열었는지 이미 활짝 열려 시원한 바깥 공기를 들여보냈다. 그러나 정문이 들여보낸 것은 시원한 바깥 공기만은 아니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제임스 씨를 지나치며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하나같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만면의 웃음이 가득한 상태로. 아론 씨도 초인종을 들었는지 2층 계단을 타고 헐레벌떡 내려왔다.


그런 아론 씨를 보고 새로 온 3명 중 제일 늙어 보이는 남자가 외쳤다. 아무리 봐줘도 20대 후반이다.


“아버지! 유언대로 유산을 나누러 왔는데 어째서 늦으십니까! 저번에 저랑 혼자서 이야기했을 때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생각 마시죠. 저랑 아버지의 둘째 딸 로자랑 막내아들 루돌프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선두의 남자가 외쳤다. 그 뒤의 더 젊은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 큰형님이 하시는 말 신경쓰지 마세요. 큰형님 성격 아시잖아요. 저번에 큰형님과의 만남이 안좋게 끝났다고 들었어요. 저희는 그저 유산상속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고 싶을 뿐이에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 광경이 더욱 아론 씨의 신경을 자극했는지, 2층 계단참에 선 아론 씨는 난간을 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에게 줄 돈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으면 제임스를 시켜 내쫓을 거다! 아니면 바깥 창고에라도 처박을 테다. 그러니 썩 돌아가!”


그런 아론의 욕지거리에도 아론의 장남으로 보이는 선두의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기만 했다.


“아버지도 참, 저희가 무슨 날강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요. 저희는 그저 법으로 정해진 정당한 대가를 받으러 왔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선 기술적으로 사망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 계시지만 한 번 돌아가신 건 변함없죠. 글리치 시티 법에 따르면 원래 살았던 아버지와 당신은 동일인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저희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런 유산상속 문제에 얽힐 생각은 내게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몰래 빠져나가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제임스 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제임스 씨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주인님과 소피아 씨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소피아 씨를 맞이하기 전에도 부인이 있으셨어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어 슬픔에 빠져 사시다 어쩌다 소피아 씨를 만나게 되어 행복을 얻으신 거죠.”

“보통 그런 경우라면 원래 있던 자식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죠. 그래서 별거하다가 아론 씨가 살해당하자 그 유산을 상속받으려 돌아온 셈이군요. 이런 상황에 대해 글리치 시티 법은 아론 씨가 아닌 자식들 편을 들어주겠죠.”


사후에 의식을 보존한다는 개념은 아직 새롭다. 부자는 이론적으로 불로장생이 가능하고 빈자는 원 코인인 세상에서, 법마저도 부자 편을 들어준다면 정말이지 구제불능의 세상이리라.


이 상황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면 강 건너 불구경이었겠지만 사건이 연관되어 있는 시점에서 유산상속 문제로 살인사건이 흐지부지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여러분? 죄송하지만 조금 조용히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론 씨께서 곤란해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부외자가 낄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저희 아버지와 저희들만이 문제입니다.”

“물론 이 일은 그렇겠죠. 하지만 살인사건은 어떨까요?”


살인사건이라는 말에 3명의 자식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맏이는 헛기침을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군.


“물론 저희는 수사에 방해가 될 요량은 없습니다. 저희도 아버지의 살인마를 잡고 싶은 건 매한가지니까요.”

“그럼 지금 2층 계단참에 난간을 집고 서 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아버지였던 남자의 껍데기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1층으로 내려오셔서 저희와 말하지 않겠다면 저희들도 멋대로 여기 있겠습니다. 옷가지와 생필품도 가져왔으니 제임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 일러두십시오.”


과연, 그래서 다들 캐리어 가방을 끌고 있는 건가. 아론 씨가 유산배분 협상을 거절할 것을 알고 시위할 셈으로 준비해둔 것이다. 혈연이 있으므로 주거침입죄로 쫓아낼 수도 없다. 마당의 센트리건도 이들에게는 조용했었다.


아론 씨가 2층의 자기 방으로 후퇴한 후에도, 아론 씨의 자식들은 웃고 떠들며 1층에 자기 살림살이를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1층이 내려다보이는 2층 발코니에서 그들이 1층을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바꾸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론 씨는 크게 한 방 먹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이 수사에도 영향을 줄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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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아론 씨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질 않았다. 불쌍한 제임스 씨는 아론 씨의 수발을 드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다. 한 번 그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만 넘기면 됩니다. 저 배은망덕한 자식들도 1층을 점거하는 게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내일까지 저 난봉꾼들을 모조리 쫓아 보이겠습니다.”


그래, 오늘 밤만 넘기면 1층의 방해꾼들도 돌아가고 정상적인 수사가 가능해지리라. 난 이때만 해도 무척 낙관적이었다.


점심과 저녁식사는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저택 밖으로 나가서 인스턴트 음식이라도 살까 했지만 센트리건이 위협적으로 나를 가리키는 바람에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씨가 준 팔찌가 있으니 쏘지는 않겠지만, 어쩐지 무서워서 그냥 포기하고 돌아왔다.


나는 이 저택에 실질적으로 감금된 셈이었다.


제임스 씨나 1층의 패거리와 이야기해 밖으로 동행하도록 할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제임스 씨는 바쁜데다 1층의 패거리는 믿고 싶지 않다. 자칫하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유산 상속 문제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끙끙대는 나를 먼저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은, 아론 씨의 자식들 중 장남이었다. 그는 2층 계단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탐정나리 아니십니까? 수고하십니다. 저녁때가 다 되 가는데 저희의 조촐한 디너파티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진미들을 싸 가지고 왔는데 저희끼리만 먹으면 소홀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여기에 며칠 동안 묵으실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비울 가정이 걱정되시지는 않으십니까?”

“살아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는데 가정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저희는 그런 손해까지 감수하고 있는 겁니다. 탐정나리께서 저희들을 나쁘게 보고 계신 건 압니다. 하지만 탐정나리께서는 저희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론 씨는 제게 의뢰인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에 대한 범죄를 수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해 잘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임스는 아버지의 수족입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줄 리 없어요.”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집사인 제임스 씨도 아론 씨가 어딘가 변했다고 말했고, 거기다 아론 씨는 자살한 소피아가 아직 살아있다고 내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내게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뜻밖의 환대와 마주쳤다. 식사는 고급스러웠고 담소는 즐거웠다. 서로서로 소개하며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장남의 이름은 크라우스, 차녀의 이름은 로자, 막내아들의 이름은 루돌프였다. 일견 고풍스러운 이 이름들은 아론이 직접 지었다고 했다. 구닥다리 이름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이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론 씨, 의체를 쓰고 있으시던데 의체에 대해 아는 것 있으십니까?”


최근에 부흥하기 시작한 의체산업은 아직 부자들의 취향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 질문에 크라우스 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의체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더 잘 아시겠죠.”

“아는 것만이라도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사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크라우스 씨에게 잠깐동안 적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적의가 가시고 크라우스 씨는 아까처럼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인상을 찡그릴 필요 없습니다. 저야 물론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는 협력하죠. 의체는 슈퍼컴퓨터와 비슷합니다. 인간의 두뇌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고 하죠. 그러니 의체의 인공두뇌도 그만큼 복잡해야 합니다.”

“기계공보다는 프로그래머가 걸맞다는 말이군요.”

“그것도 아주 고급 프로그래머가 말이죠. 의체를 정비하는 일이라면 기계공만이라도 족하지만 인간의 신체운동을 무리없이 흉내내는 의체라면 분명히 고급인력입니다. 지금 아버지의 의체는 덩치는 크지만 무척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번 살해당하고 나서 트라우마를 키우기라도 한 걸까요.”


확실히, 저기 위층의 2미터 10센티 키의 육체는 아론 씨 본인의 모습을 본따 만든 육체가 아닐 것이다. 한번 살해당하고 나서, 그 보호기제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무적의 육체를 원한 게 아닐까.


“아버지는 그저 충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사랑하던 애인에게 살해당하다니. 배신감과 충격이 이모저모가 아니겠지요. 저기 마당의 센트리건 보이시죠? 죽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은 저 센트리건은 적어도 이틀 전에 설치된 물건이라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저희를 무슨 아버지 시체에 잔치하려는 도둑처럼 본 모양인데, 당연히 탈탈 털어가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의 정당한 몫을 주장하고 싶다는 거죠.”


정당한 몫이라, 말은 참 잘하는군. 나는 그러면서 사건이 일어난 타임라인을 정리했다.


아론이 5일 전에 죽었고, 유니넷 지사에 준비된 새로운 몸으로 당일 갈아 끼우고 왔다고 하면 시간순에 맞는다. 사랑했던 사이에게 배신당했던 충격으로 보안에 광적으로 신경쓰고 있다면 이치에도 맞는다.


나는 이제는 아론이라고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하지만 시체들 뜯어먹기 위해 들개들이 덤벼든다. 아론 씨의 친자들은 그 들개들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괜히 불쾌해져 양해를 구하고 일어서서 나가려 했다. 잠자코 있던 차녀 로자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만?”

“저기, 2층을 꿰차고 있는 작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몸을 차지한 다른 사람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예요.”


장남인 크라우스 씨가 그 이상으로 말하려던 로자 씨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여동생을 대신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 여동생이 원래부터 심약해서요. 미신이니 뭐니하며 곧잘 믿는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닙니다. 더 듣고 싶군요. 로자 씨라고 했나요? 더 들려주십시오. 청해도 탐정의 소양이라서 말입니다.”


나는 손짓으로 크라우스 씨를 물리고 로자 씨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얼굴을 보니 최근들어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변했어요. 여기 오고 나서 2층을 제외하고 집 구석구석을 둘러봤어요. 아버지께서 질색할 물건들이 있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물건들은 치워져 있었어요.”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죽음에서 돌아오신 직후, 가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알코올 저장고에서 제임스 씨가 했던 말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제임스 씨는 주인님이 최근 들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론을 가장할 뿐인 누군가가 들통 나지 않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것뿐이라면?


나는 대체 누구에게 고용된 거야?


“그러니까 사람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다는 말이시군요.”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어떤 계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뒤바뀌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 계기가 그 자신의 죽음이라니. 뭔가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차녀 로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더 무서운 점은 뭔지 알아요? 그 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냥 우리가 멋대로 판단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어요.

“그럼 로자 씨께서는 지금의 아론 씨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악령인지도 모르죠. 죽은 우리 아버지의 몸을 빼앗은 건.”


로자의 오컬트틱한 발언에 장남 크라우스는 벌컥 화를 냈다. 말하는 투를 보니 로자는 원래부터 초자연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았었던 모양이다.


“로자! 그런 소리 하면 못써! 루돌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누나, 그만해. 형도 그렇게 말하잖아. 누나는 너무 미신적인 게 흠이라고.”

“뭐라고? 넌 항상 형편만 들고.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럼 아버지가 갑자기 바뀐 건 어떻게 설명할 거니!”


화기애애했던 저녁파티가 순식간에 형제자매들끼리의 설전으로 번졌다. 나는 조용히 빠져나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로자 씨가 했던 말을 하염없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기 2층을 꿰차고 있는 작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


나는 2층의 아론 씨의 방문 앞에 멈췄다. 안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어둠 속에서 되물었다.


‘아론 씨, 당신 대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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