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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쏘울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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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쏘울
작품등록일 :
2023.05.14 20:21
최근연재일 :
2023.09.09 13:34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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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32,534

작성
23.05.1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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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라면이 주식인 놈

DUMMY

“······구천구백구십칠, 구천구백구십팔, 구천구백구십구, 만.”


휴~!


걷는 거보다 숫자 세는 게 더 힘들어서 내뱉은 한숨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호주머니 속에 든 스마트폰을 꺼냈다.

깨진 화면 위로 활성화되어있는 만보기 앱.


- 9886


“뭐야? 씨발, 오차가 200이 넘잖아!”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걸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 군인들이 행군하듯 정확한 자세로 걸었다.

그러니, 분명, 이 오차는 이 앱 서비스 회사의 사기이거나 후진 기술 때문이리라.


정확히 214걸음만큼 손해 봤으니 2.14%의 손해. 그 정도면 은행에 넣어둔 돈에 붙는 1년 치 이자와 맞먹었다. 손해 보고는 못사는 내가 아닌가.


대신에 손해를 만회하는 방법은 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마구 흔들어 댔다. 숫자가 10,000을 넘기자 메시지가 떴다.


- 축하합니다. 오늘도 100포인트를 적립하셨습니다.


그 이상은 적립되지 않았다. 아마 그랬으면 하루종일 흔들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자주 들르는 편의점이 길 건너편에 보였다.

그동안 모은 포인트를 앱 속에 있는 편의점 쿠폰으로 바꾸면서 흐뭇한 미소 한번 지어주고.


진열대에 놓인 컵라면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오늘은 1,500원 하는 1+1 컵라면이 가장 저렴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찰나, 전화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 야, 찌질아! 너 이젠 주식 좀 하고 살아라.


친구 김한결이다. 근데 이 자식이 증권사 직원 아니랄까봐 다짜고짜 또 주식 타령이군.


“뭐 주식? 내 주식은 요즘 라면인데······왜?”

-야, 그러지 말고 오늘 한번 보자. 내가 죽여주는 데 알아놨거든!

“야, 됐고. 얼른 내 돈이나 갚아!”

-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 보는 거다. 내가 문자 보낼게.


헐, 웬일?

고민이 시작됐다. 내일은 회사 면접일이다. 그리고 놈은 만나면 술 마시자고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돈 갚는다는데 안 갈 수도 없고···


김한결.

나와 동갑내기인 이놈은 대학 때 내가 짝사랑하던 여자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놈이다. 아니 최근까지는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놈이 내게 손을 벌리기 전까지는.


“우진아, 사실 급전이 필요해서 그런데 오백만 빌려주면 안 되겠니?”

“내가 돈이 어딨다고 그래. 너도 알잖아. 만년 계약직인 거···”

“그건 아는데, 어떻게 안 되겠냐? 내가 정말 급해서 그래. 우진아, 제발······.


나는 고심 끝에 피 같은 돈 오백만 원을 놈에게 빌려줬다.

증권사 정규직인 놈이 오죽했으면 공사판이나 전전하는 나 같은 놈에게까지 손을 벌릴까 싶었다. 그런데.


후루룩~


놈이 내게 돈을 빌려 간 덕분에 이후부터 내 주식은 라면이 되었다. 엄마는 벼룩의 간을 빼먹은 놈과는 어울리지 말라셨고.


아무튼 뭔가 찝찝하다.


“왜? 그냥 집에서 보지.”

-아니야. 내 말 믿어! 오늘은 내가 화끈하게 쏠게!



***



- 청도동 xxx, xxx-xxx.


“간판이 없을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죽여주는 데서 화끈하게 쏜다는 놈이 무슨 간판도 없는 데를···

어쩔 수 없이 녀석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주변을 둘러보니 화려한 고층 건물과 고급 아파트들이 보였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대조적인 경관이라니···


작년 여름 처음 상경했을 때가 생각났다.

모든 게 화려할 줄만 알았던 서울은 내 고정관념을 바꿔놓았다.


방금 떠나온 시골 읍내에서나 보던 낡고 오래된 건물들. 그중에서도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가야 보이는 가장 낡고 허름한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 때문에 잠시 머물 생각으로 선택한 곳.

하지만, 이직을 밥 먹듯 하면서도 고시원보다 저렴한 월세 때문에 눌러앉게 되었다.


엄마는 아들이 서울에서 일한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궁상맞은 나의 서울 생활은 차마 보여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매달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아들이 외지에서 안 죽고 살아있음을 증명할 뿐.


“우진아!”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김한결 녀석. 늘 그렇듯 깔끔한 정장차림이었다.


“미안, 차가 좀 막혀서.”

“알아. 서울에선 그게 인사더라구.”


보자마자 내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 찌질이, 신경 좀 쓰라니까.”


홈쇼핑으로 산 베이지색 슬랙스 팬츠에 파란색 남방. 그나마 신경을 쓴 거였는데 녀석의 차림새를 보니 비교가 되긴 했다.


기분 나쁜 위화감을 애써 숨기며 쏘아붙였다.


“새끼, 유부남이란 놈이 무슨 여자 꼬시러 가는 것도 아닌데··· 소연이는 잘 있냐?”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앞서 걷는 김한결.

곧이어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중앙에 나란히 서 있던 두 대의 엘리베이터를 그냥 지나 구석에 따로 마련된 회원 전용 엘리베이터 앞.

눈앞에 작은 초인종처럼 생긴 버튼을 보자 김한결이 익숙하게 그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로 내려가더니,

다시 비밀스런 문을 지나자 현실이 아닌 듯 나타나는 멋진 공간.


녀석이 안내한 곳은 럭셔리 와인바였다.

왠지 비밀 가득한 다른 세상에 발을 잘못 내딛은 듯한 느낌.


“어서 오세요!”


훤칠하게 생긴 젊은 남녀 직원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바 테이블에 앞에서는 바텐더가 현란한 손놀림으로 칵테일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종업원이 가고 난 뒤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바라보는 김한결.


“어때? 내 말이 맞지?”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샹들리에의 은은한 조명 아래 고풍스런 진열장.

소품 하나하나에 뭔가 의미가 있는 듯 신경을 쓴 공간들. 중후하고 클래식한 분위기.

기껏해야 포장마차나 드나드는 놈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란 듯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

하나같이 귀족적인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 내가 온 목적은 분명했다. 녀석이 빌려 간 돈 오백만 원만 받으면 된다.

하지만 계좌 이체해도 될 것을 굳이 왜 이런 데로 나를 불렀을까? 단지 폼 한 번 잡아보려고?


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에 발린 인사부터 나왔다.


“그래, 잘 지내냐? 요즘 하는 일은 잘 되고?”

“나야 뭐 덕분에 겁나 잘···. 일단 술부터 한잔할래?”


녀석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더니 손이 고상하게 가슴 높이로 올라갔다.


“여기 코냑 한 병 주세요.”


잠시 후 고급 양주 한 병이 투명한 크리스탈 잔과 함께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걸 들고 온 여종업원에게 시선이 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잡티 하나 없는 피부. 긴 머리는 고급스런 와인 컬러로 물들였고, 눈망울은 방금 내려놓은 크리스탈 잔처럼 맑고 투명했다.


세련되고 산뜻한 스타일의 검은색 슈트 제복 위로 ‘Server’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애널오빠 안녕하세요. 오늘은 친구분하고 같이 오셨나 보죠?”

“응 인사해 내 불알친구.”

“호호, 안녕하세요.”

“아, 네.”

“우진이 이 자식, 쫄기는··· 얘 나이 어려. 이대 경제학과라고 했나?”

“예. 좀 있으면 졸업이에요.”

“우진아. 얘 엄청 똑똑해. 경제 돌아가는 것도 해박하고 주식도 잘하고.”

“뭘요. 좋은 종목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좋은 종목이야 있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원래 주식이란 게 그래. 누구 말 듣고 하면 이미 늦은 거라고. 알어? 진카는 회사 규정이란 게 있어서 곤란해.”


한결이 거드름을 피우자 서버가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마세요. 여긴 비밀 누설 금지구역이니까. 알려줘도 어디다 말 안 할게요.”

“얘 이거 보통 아니네. 여기 우리 대표님도 자주 드나드는 곳인데, 걸리면 어떡하라고.”

“쳇!”


귀엽게 토라지던 서버가 이번엔 시선을 내 쪽으로 향했다.


“오빠도 주식 하세요?”

“네? 아, 아뇨.”

“말도 마라, 얘는 주식의 주짜만 들어도 경끼를 일으키는 놈이야.”

“어머, 요즘은 그런 사람 보기 힘든데···”


그때 멀리서 선임으로 보이는 직원이 눈치를 주자, 서버가 우리에게 인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짜식, 예쁘냐? 연결시켜 줄까?”

“됐어 임마.”


놈이 웃으며 코냑을 따는 사이, 나는 메뉴판을 살폈다.


-와인세트, 위스키세트, 맥주와 칵테일···

-모나리자, 나르시즘, 오리엔탈 후르츠, 논알콜 셜리템플···


이상한 이름들은 죄다 봐도 모르겠고, 단지 그 아래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싼 가격들.


결국 나는 한결이에게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걸 물었다.


“근데, 너 이런 데는 어떻게 안거냐?”


녀석은 술을 따르면서 우쭐대듯 말했다.


“여기? 우리 회사 대표가 여기 사장하고 친해서.”

“그게 누군데?”

“넌 말해도 몰라 임마. 그건 그렇고···.”


녀석이 슈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탁~


테이블 위에 놓은 건 돈 봉투.


“그거냐?”

“그래 임마.”


봉투 안을 살펴보니 수표 두 장이 보였다.


\5,000,000 (금오백만원정)

\1,000,000 (금일백만원정)


“뭐냐 이건?”

“이자. 너도 어렵잖아!”


스스로 뿌듯해하는 놈의 미소가 보였다.


“너 혹시 로또라도 맞았냐?”

“얌 마, 모르겠냐? 나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인 거.”

“······.”


글쎄... 이놈이 잘나갔던가? 전에 친구 성택이가 한 말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이쪽 일과는 거리가 멀어서 자세한 건 들어도 모르지만, 어쨌든 골자는 한결이 놈이 회사에 큰 피해를 입혀서 간당간당하다는 얘기였다.


녀석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어디서 스카웃 제의 좀 받았어.”

“···스카웃 제의? 어디서?”

“그런 데 있어 임마. 넌 이쪽 잘 모르잖아. 거기서 계약금도 선불로 주더라.”

“······.”

“암튼 전엔 고마웠다.”


두 달 전 녀석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내가 돈을 빌려준 건 사실, 녀석을 위해서라기보다 한때 정을 준 소연이가 불쌍해서였다. 근데 이자까지 후하게 쳐줄 줄이야.


“근데 우진아.”

“왜?”

“너 정말 주식 안 할래?”

“그럼 그렇지. 새끼 또...”

“새끼, 알았다. 그럼 계좌만 하나 터줘라.”

“···계좌?”

“그건 괜찮지? 주식은 안 해도 돼 임마. 돈도 안 넣어도 되고.”

“······!”

“그냥 회사 실적 땜에 그래.”


*


“마셔!”


쨍!~

캬아!~


*


이날 술김에 만들어진 내 인생 최초의 주식계좌.

이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될 줄 몰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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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외인부대 23.05.18 247 7 11쪽
7 위 아래 위 위 아래 23.05.17 252 8 11쪽
6 남대문 투자클럽 23.05.17 257 7 10쪽
5 돈 버는 비밀 +1 23.05.16 271 7 11쪽
4 스물 한번째 회사에 들어가다 +2 23.05.15 280 5 11쪽
» 라면이 주식인 놈 +1 23.05.14 302 9 11쪽
2 패가망신 +2 23.05.14 391 10 12쪽
1 Prologue. 주식으로 안 망하는 세 가지 방법 +11 23.05.14 573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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