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이 왜 빨간색이어야 돈 버는 줄 알아?
오전 9시.
거래가 시작되었다.
[병진물산 ↑ 10% 상승중]
[현재가 12,100원]
아침부터 거래가 활발하더니 10%나 갭상승 출발이다.
[병진물산 ↑ 20% 상승중]
[현재가 13,200원]
VI 발동.
2분 후 다시 상승.
역시 예상대로 분위기가 심상찮다.
[병진물산 ↑ 25% 상승중]
[현재가 13,750원]
나는 늘 그렇듯 매수 버튼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호가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끔 전에 본 낯익은 숫자들이 반복되긴 하지만, 아직까지 내 암호는 뜨지 않고 있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봤을 때 분명 100% 상한가였다.
매수세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28%대에 쌓여있는 12만 주나 되는 매물대.
통과하기에 역부족이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
때마침 기다리던 숫자가 보였다.
13
13
13
13
..
.
[매수가 체결되었습니다.]
내가 누른 10만 주가 효과가 있었다. 매물대가 사라지고 상한가 냄새를 맡은 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병진물산 ↑ 30% 상한가]
[현재가 14,300원]
예상했던 거지만, 놀라웠다.
‘······헐, 대박!’
방금 전은 내가 상한가를 만든 느낌이 들었다.
호가창을 확인했다.
상한가임에도 매수대기 물량이 100만 주나 넘게 쌓여있다.
몇 달간이나 관성처럼 올라왔던 종목이다. 상한가에서 한 번도 상이 풀린 적이 없던 종목. 당연히 뒤늦게라도 사려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았다.
다른 날보다 긴장했던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아파왔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를 한 잔을 들이켰다. 상한가라서 이제 문자가 오지 않을 것이다.
*
바람이나 쐬러 갈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먼 산을 보며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오늘 상한가를 갔으니 보나 마나 내 계좌도 올라가 있겠지?
아까는 호가창 암호를 보느라 내 진짜 계좌는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엄청난 선물을 개봉하듯 뜸을 들이며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계좌에 손가락을 터치하려는 순간, 갑자기 울리는 문자 수신음.
-지이이이잉 지지지지잉
[B101, 10~11, 1313···, 22만 시장]
뭐야, 또······?
시간을 확인했다.
헉! 지금 9시 55분인데, 10시~11시 사이에 다시 거래하라는 메시지라니.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번엔 확인 전화까지 바로 왔다.
“여보세요?”
-B101, 10~11, 1313···, 20만 시장 ···색깔 잘 확인하고!
“예 알겠습니다.”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도대체 뭘 더 거래하라는 걸까?
집에 들어가 켜져있는 HTS를 확인했다.
‘맙소사!’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병진물산 ↓ 20% 하락중]
[현재가 8,800원]
‘씨발, 뭔일이랴!’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이제 10시였다.
문자를 재차 확인했다.
‘······헉 22만 주나?’
22만 주면 이 계좌 안에 있는 전체 물량이다.
그럼 전량 매도?
······대체 왜?
눈앞의 모니터로부터 호가창을 확인했다.
빠르게 수직 낙하하는 파란색 숫자들!
엄청난 매도 물량이 출회 중.
주가는 폭락 중이었다.
이제 하한가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
[병진물산 ↓ 25% 하락중]
[병진물산 ↓ 27% 하락중]
[병진물산 ↓ 29% 하락중]
그런데 왜 아직도 신호가 없을까?
이렇게 떨어지는 데도 기다리는 걸 보면 다시 사라는 거겠지?
그때였다.
호가창에 빠르게 내려가는 약속된 숫자들.
13
13
13
13
..
.
그런데 헉······!
이게 뭐냐, 색깔이······
파란색?
‘시팔 그럼 이걸 팔라는 거?’
왜 아까 색깔을 잘 보라고 했었는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순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 매도가 체결되었습니다.
매도를 누른 뒤 한동안 넋을 잃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병진물산 ↓ 30% 하한가]
[현재가 7,700원]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목표가 2만 원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정신 차리고 계좌를 확인했다.
[병진물산]
[보유주식 수: 0 주]
[총매수금액: 0 원]
[평가손익: - 7천6백만 원]
0이라는 숫자가 크게 보였다.
보유주식도 0, 매수금액도 0.
말 그대로 전량 매도였다.
‘왜 전량 매도를 시켰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평가손익도 마이너스인데······.
그 얘기는 곧 내가 받을 수수료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손해 봤으니 토해내라고 하지도 않겠지? 나는 시키는 대로 매도했을 뿐이니까.
계약서상, 지시한 대로 거래하지 않을 시 손해액의 10배를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지시한 대로 해서 손해를 봤다.
회사는 왜 하한가 근처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전량 매도하라는 싸인을 보냈던 걸까? 손해까지 보면서······.
‘그럴 리 없어, 회사가 손해 볼 리가!’
오히려 회사가 시키는 대로 기다리지 않고 일찍 매도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계좌에서는 손해 보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뭔가 감이 오는 거 같다.
문득 아까 확인하려다 못한 내 개인전용 계좌도 열어보았다.
[전일대비 ↓ 28% 손실 중]
[총매수금액: 1천만 원]
[총평가금액: 720만 원]
[평가손익: - 280만 원]
환장하겠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팔아야 하나?
하지만, 매도 잔량이 너무 많아서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다.
급한 마음에 한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뚜 뚜 뚜 ······
녀석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재택근무하는 2주 동안 가끔 통화했던 녀석이다. 하지만, 그 어떤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
그럼 녀석도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쩔 수 없이 회사로도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
‘씨발 X된 건가?’
***
남대문투자클럽 오후 5시경.
꾼들은 모두 퇴근했는지 트레이딩실은 텅 비어있고, 사무실에는 겁에 질려 낯빛이 새파래진 채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김한결.
그의 주위로 짱구를 비롯한 덩치 셋이 둘러싸고 있다.
- 쾅!
짱구가 각목으로 책상을 크게 내리치며 위협했다.
“이런 씨팔!!”
그러자 김한결이 깜짝 놀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몸에는 이미 맞아서 생긴 상처들도 군데군데 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계좌에서 팔고 나서 팔았어야지. 왜 신호 무시하고 니껄 먼저 파냐고.”
“······죄, 죄송합니다.”
그 옆 창가 쪽에서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희성 대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불투명 창문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그게 거슬렸는지 눈을 찌푸리며 검정 커튼을 탁, 쳐서 창문을 가리는 강 대표.
곧이어 피우던 담배를 구둣발로 문지른 다음 김한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너 이리 와 봐!”
그러자 힘겹게 고개를 들어 강 대표를 바라보는 김한결. 휘청대며 일어나 주섬주섬 강 대표를 향해 다가갔다.
“앉아.”
무릎 높이의 나무로 된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단 몇 초의 침묵으로도 김한결의 심장은 멎을 듯 요동쳤다. 그런 김한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여는 강 대표.
“너 말이야.”
말을 꺼낸 강 대표는 입술을 씹더니 다시 평온을 되찾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전문가 양반, 겁대가리 없이 손꾸락을 잘못 누르면 쓰나.”
“······죄 죄송합니다. 시 실수였습니다.”
“아니, 평소 안 하던 실수를 왜 결정적인 순간에 하냐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 손해는 안 봤습니다.”
순간, 강 대표의 인상이 다시 찌그러졌다.
“아이 씨. 손해는 당신 계좌에서나 안 본 거고···.”
“······.”
“당신이 먼저 파는 바람에 VIP 계좌가 좆될 뻔 했잖아.”
“······.”
“죄송합니다. 주가가 마구 떨어지길래 본능적으로··· 하지만, 일찍 판 덕분에 제가 손실 안 봤으면 회사도 좋은 거 아닌가요? 어차피 내 계좌에 있는 돈도 다 회삿돈이니까.”
“물론 그렇지. 다 우리 돈이니까. 하지만···”
그러더니 강 대표가 김한결 가까이 얼굴을 닿을 듯 가져갔다.
“당신이 과연 회사 손실 나게 생겨서 팔았을까? 아니면 당신 수수료 욕심에 팔았을까?”
“······.”
“당신 계좌에서 수익이 나야 수수료를 받으니까 판 거잖아.”
“······.”
“내가 왜 당신을 스카웃 한 지 알아?”
“······?”
“전문가라서? 하, 내가 언제 당신같은 좃문가들 리포트 보고 투자하는 거 봤어? 다 그 계좌 때문이야. 당신이 증권사에서 훔쳐온 고객 정보랑.”
남대문 투자클럽은 김한결이 다니던 굿모닝 증권사의 막대한 고객 정보를 이용해서 광고와 찌라시 문자도 보내고 있었다.
김한결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저와 한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 퍽!
옆에 있던 짱구가 억센 손으로 김한결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강 대표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약속을 왜 안 지켜. 당신 입사할 때 계약금도 넉넉히 줬고, 계좌야 수익 나면 준다고 했던 거잖아. 내가 언제 수익을 만들어서까지 준댔어?”
“그, 그래도···”
“주식이 왜 빨간색이어야 돈 버는 줄 알아?”
“······?”
“이 세계에선 피를 흘려야 돈이 벌리거든. 그래서 피 같은 돈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너는 가만히 앉아서 그 큰돈이 거저 생길 줄 알은 거니? 이 양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순간, 부하 중 누군가 눈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미국은 파란색일 때 돈 버는 거라던디···.”
강 대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덩치가 눈치를 주며 말했다.
“거기는 피가 파란색인가 보지 새꺄!”
이에 질세라, 짱구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멍청한 새끼들! 그게 아니구, 거기는 파랗게 멍들도록 깨져봐야 돈 번다는 거여. 근디 우리나라 주식은 거기보다 더 힘들게 존나 피 흘려봐야 돈 번다는 말씀이고··· 그쵸 형님?”
말 같지도 않은 부하들 이야기에 얼굴만 더 찌푸린 강 대표.
그러다 다시 자세를 굽혀 김한결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시선을 김한결의 손으로 향했다.
순간 섬뜩한 시선을 느낀 김한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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