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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J뮤엘 님의 서재입니다.

수십년만의 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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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SDJ뮤엘
작품등록일 :
2020.08.11 19:54
최근연재일 :
2021.02.05 18:08
연재수 :
9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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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5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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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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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3-8 -사명(8)

DUMMY

“이게 당신 계획입니까?”

“그래. 훌륭하지?”


처음으로 타모의 탈출계획을 상세히 들은 그의 첫 반응은 미묘했다.

그는 발광한 채로 줄에 이끌려오느라 젖어서 엉겨 붙은 머리칼을 쓸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젖어있었는데, 타모에게 설명 중에 자신이 멍한 얼굴을 보이면 물을 뿌려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타모는 그 부탁을 열심히 들어줬다. 바로 전에 물을 끼얹었음에도 타모가 소환한 물컵엔 여전히 물이 가득했다.


“어렵군요.”

“어렵기는 그냥 페어리가 은광에서 주머니를 파팟! 하고 훔쳐 오고 난 거기서 스크롤을 빠밤 하고 꺼낸 뒤에 5호에게-”

“잭웰입니다.”

“알았어, 알았다구. 잭웰에게 죽어서 부활의 샘에 있을 널 찾아가서 네 목걸이에 마법 부여를 해주면······ 빰바빰! 작전 성공!”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입니다만.”

“뭐든 직접 부딪혀 보면 다 이해하게 돼있어. 중요한 건 네가 언제 결심하느냐야.”


그 말에 디폴트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자신이 잭웰을 상대로 30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버틸 수 있다 쳐도 그리 오래 버티도록 주위에 있는 검은 로브와 하얀 가운들이 가만히 기다려 줄까?

하지만 이대로 계속 죽음을 반복한다면 탈출시도조차 못할 정도로 미쳐버릴······ 푸왘!


“뭣- 뭐하는 겁니까?”


머릿속을 배회하던 고민거리들이 갑작스레 뿌려진 물세례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물에 젖은 강아지꼴이 된 디폴트를 보며 타모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또 멍하게 있길래.”

“생각에 잠긴 겁니다.”

“자, 어떡할래? 카드는 전부 세팅됐고 판돈은 전부 테이블 위에 있지. 더 미룰래 아니면 네 판돈을 얹어볼래? 결정은 네 몫이야.”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디폴트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타모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잭웰이 널 죽인 횟수랑······ 네가 잭웰에게 데미지 입힌 횟수가······ 푸왑!”

“미안합니다, 멍하게 있어 보이길래 도와드렸습니다.”


어느새 그는 타모가 다시 채워둔 물컵을 써먹었다. 타모가 ‘이것 봐라?’하는 식으로 반쯤 미소를 담으며 입가를 찡그렸다.

타모는 최대한 음산한 투로 대답했다.


“3%. 잘 쳐줘봐야 3%야.”

“거기에 걸겠습니다.”

“오호? 의외로 강단이 있네? 아니면 네 운명이 내 생각보다 값싼 것이던가.”

“1%든 3%든 확률은 판돈을 거는 이만 돕습니다. 미룬 계획이 성공할 확률은 언제나 0%나 다름없습니다.”

“꼭 인생의 교훈이란 듯이 말하네? 기억도 없으면서?”

“도박사는 애매한 기억이 아니라 날카로운 감에 건다고 알고있습니다만.”


그 말에 타모가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내일, 아니 넌 날짜는 모르지. 다음 작업 3번째 때에 잭웰이 네 상대로 나올 거야. 아, 그리고 잊지 말고 다시 받아. *@#%#설치*@#@#주입.”


타모의 손에서 다시 검은 사각형들로 뭉쳐 만들어진 뱀이 튀어나왔다. 화살처럼 디폴트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갔던 전과 달리 녀석은 그의 팔에 올라타곤 가만히 기다렸다. 그건 머리를 흔들며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드나봐. 부러워라, 우리가 실험할 땐 항상 지지직거리면서 반항하는데.”


타모의 말에 아랑곳 않고 그는 계속 그 뭔지 모를 오류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갤 끄덕이자 녀석은 천천히 주사바늘처럼 팔에 비집고 들어갔다.


“이게 왜 보험이란 겁니까?”


그 질문에 타모는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환히 미소지었다. 딱 그 질문을 원했다는 듯이.


“계획대로 내가 네 목걸이에 마법부여를 해주면 좋겠지만 계획은 항상 원하는 대로 흘러가질 않잖아? 스크롤이 만약 네 손에 직접 들어가면 알지?”

“이해했습니다.”

“좋아. 자, 그럼 몇 안 남은 죽음을 즐기러 가자. 뭐, 실패하면 질리도록 맛보겠지만. 아! 우리끼리 한 번 내기해볼래?”

“뭘 말입니까?”

“뭐, 거저 주는 셈의 내기지만······ 네가 여기서 나가는데 성공하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을 줄게. 실패하면 어차피 넌 여기서 천년만년 썩을 테니 굳이 실패는 들먹이지 않아도 되겠지?”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당신과 볼일 없습니다.”

“과연, 과아~ 연 그럴까? 인연이란 건 모르는 거란다.”


타모의 말과 함께 그는 뱀처럼 다리와 팔을 타고 올라오는 사슬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은 평소처럼 다시 붕괴작업을 위해 나아갔다.

정확히는 묶인 디폴트를 타모가 끌고가는 형태였다.


*


다음 작업 날, 타모의 말대로 2번의 죽음을 겪은 뒤에 잭웰이 그에게 세 번째 죽음을 안겨다 주기 위해 레이피어를 뽑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단 한 가지, 정반대로 바뀐 목적만 빼곤.


“자, 284번 작업을 시작하겠소. 이번 대결 실험체는 5호요. 작업에 요구사항이 있는 이가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엄중한 목소리의 요구에 검은 로브 하나가 일어났다.


“이번에도 정석적인 결투를 요구하는 바요. 이미 실험체 정신에 붕괴 조짐이 보인다고 하니 이참에 좀 더 이세계인의 전투 데이터를 뽑아내고 싶소.”


그 말에 브니엘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엄중한 목소리가 그의 의견을 대변했다.


“좋소. 이번 작업은 그리 진행하겠소. 다른 의견이 없다면 시작하겠소. 5호!”


5호 또는 잭웰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천천히 상대하도록!”


명령에 따라 5호는 레이피어를 잡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디폴트에게 나아가 그의 공격을 유도했다.


“장착.”


거기에 맞춰 디폴트도 주머니에서 흉내쟁이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둘은 천천히 돌 듯이 걸으면서 발걸음으로 박자를 맞췄다.

평소 무기력하게 당하던 것과 달리 처음 전혀 기를 죽이지 않던 모습을 내보였다. 그 모습에 몇이 ‘혹시나?’하는 식으로 쑥덕거렸다.


곧, 디폴트의 푸른 검이 먼저 레이피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


“이번엔 빨리 가는군. 웬일이지?”


성기사 간수가 의외라는 듯이 말하며 격리방 문을 열어줬다.


“슬슬 담당간수 일이 끝나가니 다른 일도 생기고 있거든.”

“하긴, 들었는데 녀석 결국 마음이 꺾여서 이젠 도망 다닌다고 하던데, 맞나?”

“물론이지, 그런 주제에 지랄발광은 하도 지랄 맞아서 부활하자마자 얼마나 발광해대는지 알아? 개구리가 물에 빠진 것 같다니깐! 하루 웃을 거 그걸로 다 웃고 있어.”

그 말에 성기사 간수가 낄낄댔다.

“아쉽구만! 담당간수만 부활방에 머물 수 있으니 참. 이 격리방은 의외로 심심하단 말이지. 페어리들은 항상 떠든다고 들었는데 녀석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확실히 페어리는 타모의 충고대로 조용히 입 닫고 있느라 날개가 쪼그라들 정도로 고생해야 했다. 그리고 그 충고는 여전히 유효했다.


현재 페어리는 타모의 후드 안에서 입을 막고 콩벌레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후드를 가득 채운 밤색 머릿결에 온몸이 가렵고 재채기가 나오려 했다.


“지금은 보지 않는 게 좋을 걸? 기분이 정말 안 좋아 보이더라고. 혹시 알아? 이런 상황에 네가 함부로 보려고 들면 그동안 참고 있던 말을 네 귀에다 쏟아줄지? 아니면-”


에헤취이! 정말이지 낭랑한 재채기 소리였다. 곧바로 두 번째 재채기가 타모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에취히!”

“음? 바람 마법사가 감기에 걸리나?”

“내, 내가 말했잖아. 녀석이 물속에서 지랄발광한다고. 그런 놈을 차가운 물에서 꺼내려면 얼마나 젖는지 알아?”

“어차피 너넨 바람 마법으로 사슬을 날리잖나?”

“그, 그, 묶인 상태로도 발광을 해대서 그래! 완전 젖은 개처럼 물방울을 튀긴다고! 그런 걸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한다 해봐! 거기다 여긴 지하잖아, 춥다고!”

“아, 그건 그렇지.”


성기사 간수는 미묘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동의해줬다.


“그럼 난 가서 감기 치료 물약이나 조제 해야겠어. 나 간다. 수고해.”

“어, 뭐, 알겠네. 수고하게.”


타모는 급히 격리방이 있는 층을 벗어났다. 층이 바뀌고, 간수들이 보이지 않자 타모는 급히 후드 속에 있던 페어리를 꺼낸 채로 얼굴을 맞댔다.


“위험해잖니. 파트너?”

“머리카락이 너무 간지럽단 말야.”

“왜, 후드가 아니라 로브 속에 넣어줄 걸 그랬어? 요 앙큼한 것.”

“그건 더 싫어. 너 뚱뚱하잖아.”

“뚱뚱하다니? 내가 어딜 봐서?”


타모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묻자 페어리가 타모의 가슴 쪽을 가리키며 따졌다.


“얼마나 뚱뚱하면 가슴에 똥배가 두 개나 달려있는 거야? 디폴트랑 빨간 머리는 늘씬하던데. 살좀 빼.”

“너······.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그 말은 하지 말렴. 절대로.”

“왜?”

“맞아 죽을걸? 나니까 봐주는 거야.”

“어차피 난 안 죽는걸. 근데 왜? 이게 실례되는 말이야?”

“엄청. 여하튼 가자, 바쁘다 바빠.”

“디폴트는?”

“개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거야. 그러니 더 빨리 가야겠지?”

“디폴트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지게 해주려고 이러는 거 아니었어? 우리가 빨리 일을 마칠수록 디폴트가 더 안전해질 거야. 자, 이제부턴 당황은 적게. 행동은 빨리. 상황판단은 재치있게. 알았지?”


배움이 빠른 페어리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또각또각. 5분 정도 타모의 걸음소리를 듣고서야 페어리는 다시 그녀의 후드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밤색의 머릿결에서 벗어나 페어리가 보게 된 곳은 은광 입구였다.


“푸와! 숨 막혀. 여기가 은광 입구야?”

“그래, 설명으로 듣다가 처음 보니 어때?”


얼마나 어두운지 페어리는 자신이 정말 후드에서 나온 건지 착각할 정도였다. 여기에 빛이라곤 듬성듬성 설치돼있는 횃불의 출렁이는 붉은빛뿐이었다.

페어리는 절로 뒷걸음질 쳤다.


그 어두움보다는 그 어두움이 품고 있는 그 아찔한 높이 때문이었다.


얼마나 높은지 페어리는 순간 자신이 날아다니는 존재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거짓말인줄 알았어. 근데 어느 세월에 네가 말한 곳까지 가란 거야.”

“그 말할 줄 알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여기가 우리 마법부여 담당 마법사들만 아는 지름길이거든.”

“어딜 봐서? 여길 날아서 내려가도 꼬박 하루는 걸리겠는데?”

“다 방법이 있지.”


그녀의 손가락 까딱임에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과 함께 둔중한 쇳소리가 울렸다.

끼익 끼익 끼기기기기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죽은 회색의 거대한 금속 상자였다.

상자 밑엔 이제껏 보이지 않던 철도와 함께 앙증맞은 네 개의 바퀴가 있었다.


“이게 뭐야?”

“광차. 이게 지름길 역할을 해주는 거야.”

“하지만 이리 시끄러운 걸 타고 갔다간 들어가기도 전에 들키지 않아?”


정확한 지적이라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광차에 룬문자가 떠올랐다.

룬문자가 붉은색으로 은은히 빛내자 움직일 때마다 수시로 끼기긱 대던 광차가 버터 위의 스테이크처럼 부드럽고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자연스레 회색상자에 몸을 맡겼다. 페어리는 못미더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여전히 날개를 접지 않은 채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가 주문을 읊었다.


“바람이여 한 곳으로 모여 실체를 이루어라, 정령왕 바탈리아의 손.”


그러자 뒤에서 살랑거리던 바람이 모여 거대한 손모양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거 때문에 마법사가 한 명은 동승해야 움직일 수 있어. 없으면 네 말대로 날 다 새는 거지. 어차피 지하라 하늘을 못 보지만! 아, 그건 그렇고 꽉 잡아.”

“대체 왜-”


페어리의 질문이 닿기도 전에 타모가 허공에 손가락 딱밤을 날렸다. 문제는 그 거대한 손이 그 행동을 따라 했다는 점이었다.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얻은 광차는 눈이 시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페어리는 비명 지를 새 없이 그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광차는 그 거대한 굴뚝 같은 입구를 수십 번이나 돌고 돌며 떨어졌다. 분명 디폴트라면 중간도 못가 비유하기도 역겨운 액체를 입에서 쏟아 내리며 갔을 게 분명했다.


구르르르르 툭.

고무공이 블록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광차가 멈췄다. 껌딱지처럼 손잡이에 달라붙어있던 페어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들은 은광 심층부에 도달해있었다. 페어리는 이 불쾌한 위기감이 곧 묘한 짜릿함으로 변한 걸 느꼈다.


“왜? 왜 이게······ 재밌지?”

“맛 들이진 마. 내 동료 중에 이거에 중독된 녀석이 있어서 은광 주위에 이런 광차랑 레일을 마구 깔아뒀거든. 발견해도 지지니까 건들지 말렴. 무슨 마법이 걸려있을진 나도 모르니까. 자, 난 여기까지.”

“넌 여기서 기다릴 거야?”

“아쉽게도 난 네 말처럼 뚱뚱해서 숨기 힘들거든? 거기다 녀석들은 수용소의 제일가는 마법사들이라고. 성기사 푸르르르······. 그 바보들처럼 직접 발로 뛰면서 감시하지 않지. 룬문자로 깔아놓은 함정만 수백인 데다 갖은 함정으로 주위를 감시하고 있으니까. 나라고 해도 녀석들이 깔아놓은 걸 깔끔히 돌파할 순 없어. 하지만 넌 달라. 작고 웬만한 마법은 통하지 않지. 오직 너만 가능한 일이야. 내가 일러둔 거 다 기억하지? 자, 받아.”


타모가 페어리의 몸에 맞게 작게 만든 이쑤시개만한 막대 두 개를 선물했다. 두 막대엔 확성마법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 목소리만 키우는 확성마법과 달리 바람 마법을 가미해 멀리서 소통할 수 있는 특이한 확성 마법이었다.


그녀가 다른 동료 모르게 은밀히 마법사 실험체들을 연구해 개발한 발명 마법이었다.


예전 유저가 세상을 주무를 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세상이 그들의 것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페어리는 그녀에게 배운 대로 막대기 하나는 입 근처에 다른 하나는 귀에 댔다. 거기엔 그녀의 소곤소곤 대는 목소리가 페어리 귀에 흘러 들어갔다.


“자, 자, 들리지?”

“응.”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페어리에게 그 확성 마법으로 말을 전달했다. 껌 씹듯 우물거리는 그녀의 입에서 바람이 나와 페어리의 귀로 스며들 듯 흘러들어왔다.


“녀석들 맨날 스크롤이랑 마법서만 읽다 보니 육안은 형편없어. 어둠 속을 벗어나지 않고 마법 함정만 조심하는 이상 네가 들킬 일은 없을 거야. 자, 가서 잘 해봐, 귀여운 도둑 씨. 기억해. 디폴트의 운명이 네게 달렸어.”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 소리만 냈다. 페어리도 똑같이 대답한 뒤에 침을 한 모금 삼키고 은광 속을 들어갔다.


어두운 은광 심층부의 입구는 자기에게 걸어오는 페어리를 한입에 삼켰다. 그러고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


촹! 콰칵!

‘왼쪽. 오른쪽. 오른쪽. 클로! 방어자세. 왼쪽. 왼쪽에서 돌다 오른쪽 페이크.’


디폴트의 검과 5호의 레이피어는 자석인양 서로 만나야 될 것만 같은 곳에서 만나 충돌했다.

계속 무기력하게 당했던 전과 달리 처음 우려하던 때와 같던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은 조금씩 불안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특별관람석에 앉아있는 누군가는 달랐다.


“이런 식으로 머릴 쓰는 죄수는 간만이군.”

브니엘이 감탄 반 흥미 반을 섞어 말했다.


“감히 우릴 우롱한 겁니다. 저런 어설픈 연기 따위로.”

옆에 있던 성기사 간수장이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우리가 당한 것이지. 너무 상처받진 말게. 수백 번 죽어서도 저런 연기를 내보이는 놈의 정신력이 대단한 거지.”

“제 기억으로 백 번은 넘긴 자는 스물도 되지 않습니다. 이백 번을 넘긴 사람은 둘뿐이었고요. 그런데 삼백 번 가까이 죽고 있으면서도 우릴 속이려 드는 저자를 어찌해야 한답니까.”


성기사 간수장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거기에 대해 브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뭐, 달리 할 말이 있겠나. 어쩌면 운이 좋아서 이번에만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온 걸 수도 있겠지.”


“농담이 지나칩니다, 브니엘 님. 아시잖습니까. 한 번 놓기 시작한 정신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말입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미쳐버린 우리 동료들도 살려낼 수 있겠지요.”

“뭐가 됐든지 간에.” 브니엘이 탄식 가득한 숨을 내뱉었다. “이번 작업이 끝난 뒤엔 긴급회의가 열리게 생겼군. 꽤 길겠지. 난 먼저 일어나야겠네. 회의 준비라도 먼저 하고 있어야겠군. 뒤처리는 자네와 관중석에 있는 연구조에게 맡기지.” “아, 알겠습니다.”


성기사 간수장은 당황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에서라도 그는 더욱 평범했어야 할 284번 작업이 쉬이 끝나지 않으리란 예상이 들었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에선 여전히 5호와 그 문제의 실험체가 합을 나누고 있었다. 분명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광경처럼 느껴졌다. 꼭 무슨 거대한 일이 벌어질 듯이.


그는 옛날 어떤 미쳐가던 이방인이 얘기했던 SF호러영화가 떠올렸다. 약해빠졌지만 대신 약아빠진 실험체가 강력해져서 그곳 사람을 전부 죽이고(몇은 몸보신으로 삼고) 탈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브니엘의 말대로 놈의 처분에 대한 회의가 열리면 종유석 함정에 처박아버리는 의견에 힘을 모아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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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6 -최악의 듀토리얼(6) 20.09.24 62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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