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왕자님
전장의 북소리는 전장에서 가장 최고조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병사는 제각기 무기를 감아쥐고 앞으로 등장하게 될 적을 노려보고 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점점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한다. 북소리에 호흡을 맞추고 평원 끝을 노려 보고 있다.
"모두 준비하라. 방패병은 앞으로 백 보 전진하고 기마대는 좌우 측면을 칠 준비를 해라."
노르딕 장군의 고함에 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이미는 블러베드 백작 뒤에 바짝 붙었다. 어제 알게 된 사실로 블러베드 백작은 이 왕자의 충복이면서 시몰레이크 후작의 충복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크의 첨병이 보인다."
앞서 정찰 나간 정찰병이 거칠게 말을 몰고 달려왔다.
"오크의 예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분히 끌어 들일 때까지 모두 자기 자리를 지켜라."
한데 모두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 왔다. 오크는 매우 커다란 나무 기둥 두 개를 들고 나왔는데 그 나무 기둥 꼭대기에 알몸의 인간이 매달려 있었다.
오크군은 알몸의 인간 남성이 매달린 나무 기둥을 전면에 앞세우며 천천히 밀려 왔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그 나무 기둥에 매달린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이 가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저들이 매단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고 오도록 해라."
정찰병 하나가 말을 타고 내달렸다. 그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지만, 오크는 활을 날리지 않았다. 마치 매달린 사람을 실컷 보고 가도록 그냥 놔두는 눈치였다.
정찰병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고 더욱 앞으로 내달렸다. 이 거리는 적의 집중포화를 맞을 수 있는 거리 안이었다. 오크 놈들이 활을 날리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게 된다.
하지만 호기심, 궁금증, 그리고 자신의 임무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더욱 가깝게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헉!"
그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무 기둥에 완전한 알몸으로 매달린 두 사람의 정체는 바로 소식이 끊겼던 로렌 왕자와 리차드 왕자이다.
온몸에 채찍 자국으로 살가죽이 벌겋게 찢어진 참담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양손이 묶여 매달려 있지만, 정확히 숨을 쉬고 있는 듯 조금씩 꿈틀거리기도 했다.
정찰병은 코에서 김이 빠지도록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엉덩이에 수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노르딕 단장은 멀리서 달려오는 정찰병을 보고 내심 불안한 기색을 지을 수 없었다.
뭔가 저 정찰병의 뒤로 검은 구름이 한가득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장군님. 장군님."
정찰병은 얼마나 놀랐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상태였고 방패병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길을 터주어라."
보다 못한 방패병의 기사 단장이 명령하자 방패병들은 일자로 갈라지며 정찰병이 들어 갈 수 있을 만큼의 길을 터주었다.
정찰병은 멈추지 않고 노르딕 장군의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힘차게 말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금 나무 기둥에 묶인 두 분은 로렌 왕자님과 리차드 왕자님이십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노르딕 장군은 잠시 휘청했다.
***
시몰레이크 후작은 평소보다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끙,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얼마나 좋으냐? 꼭 이상한 것들이 끼어들어 방해를 놓는단 말이다."
"오히려 좋은 일이 되었잖습니까? 오크가 두 왕자를 손에 넣어 활용하고 있으니 어쩌면 아칸을 훨씬 손에 넣기 쉽게 되었습니다."
"성군이 모두 물러갔다는 것도 마음에 거슬려. 왜 성황은 갑자기 성군을 뒤로 빼버렸지?"
"성황이 불가침 조약을 상기한 것인지 모르지요.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닌 오크와 싸우는 것이라고 불가침 조약에 상관없을 거라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 아닐까요?"
"넌 성황을 몰라.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야. 그는 진정한 마왕이다. 불가침 조약 따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 그가 그러는 것은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증거다. 조약에 따라 후견인을 빨리 지명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천금 같은 기회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기에 이 아칸을 하루라도 빨리 점령해 버리는 것이 훨씬 이득이 아닙니까? 두 왕자가 오크에 잡혔으니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라도 목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두 왕자만 처리하면 끝입니다."
"그래서 아직 두 왕자를 살려 두는 것이 아닌가? 이 아칸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성황이 직접 움직일 거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철군을 하다니 그게 더 위험한 사태가 아닐는지 몰라. 성황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으니."
"윌리엄 대공에게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던 칠무신 중 태성왕도 성황의 명령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네가 건 암시는 왜 실패한 것인가? 그 여우 가면은 어떻게 된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두 왕자는 오크로 넘어가게 된 것이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지? 설마 여우 가면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대상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꾸 실패하는 소문만 듣다 보니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쉽게 믿어지지 않아. 파비앙 이놈만 살아 있어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으련만. 그놈까지 죽어 버렸으니···."
"대체할 인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로이시어 자네 말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네. 빨리 이 계획이 끝나기를 바라야겠어. 고양이 뒤에 숨은 쥐처럼 고양이를 속이려고 하니 죽을 맛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 계획이 틀어지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
"이 말은 멋지기는 하다만은 사람 눈에 너무 띄는 게 문제야 쩝."
테츠 혼자 무이 위에 올라있고 좌우에서 야생왕과 마테니가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다. 무이의 덩치가 보통 말 두 배에 이르다 보니 놀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윽고 무이는 좋은 느낌이 나는 한 집 앞에 멈춰섰다.
"여기서 냄새가 폴폴 나지 무이야?"
무이는 대답 대신 투레질하며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그래, 그래 이 냄새를 추적하는 거다. 자 가보자 네 후각을 한번 믿어 보마."
테츠는 며칠 전 무이 앞에서 네크로맨서 기술 중 하나인 다이어울프 소환술을 시행했다. 무이는 단번에 그 냄새를 기억했다.
테츠가 마차 위에서 꼼작도 못 하고 있을 때 다이어울프 소환술을 펼칠 때 오렌시아는 자신의 몸을 잡고 있었다. 그때 오렌시아의 몸에 다이어울프 소환술의 냄새가 충분히 올라붙었을 거였다. 무이는 지금 그 냄새를 추적하는 것이다.
무이는 아칸 시티의 북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낡고 오래되어 잡풀이 무성한 반쯤 무너진 옛 성의 잔해 근처로 왔다. 마테니는 주변을 둘러보다 최근에 사람이 움직인 흔적을 금방 찾아냈다.
마테니는 그 흔적을 따라가다 바닥에 있는 낡은 문을 하나 찾아냈다. 아마도 지하로 이어지는 문인듯했다. 문에는 쇠고랑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마테니는 손쉽게 자물쇠를 부숴버리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 보자."
테츠는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갔다. 아마도 이 성이 건재했을 당시 식량창고 정도로 쓰이던 지하 창고 같았다. 몇 개의 창고 같은 방이 있었고 가장 안쪽 방에는 쇠창살이 쳐진 문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오렌시아와 나브가 서로를 끌어 앉고 돌침대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미 먹을 것이 다 떨어진 모양으로 나브의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사 직전의 상태였다.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구나."
테츠는 나브를 끌어 앉고 등심에 내공을 불어 넣어 기를 순환 시켰다.
마테니는 오렌시아를 안아 들었다.
"기력이 상당히 빠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다면 둘 다 죽었을 겁니다."
"제이미 이놈 다른 것은 용서해도 이 짓을 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테츠는 나브를 안고 밖을 나왔다. 야생왕이 무이를 데려오자 테츠의 발밑으로 둥그런 디멘션 포탈이 열렸다.
그들은 단번에 엘드리치로 넘어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브와 오렌시아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정말 미치 아저씨 맞아?"
나브는 완전히 변한 테츠의 엄지손가락을 양손으로 잡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올려 봤다.
"하하, 여우 가면을 쓴 모습만 기억하는구나. 자 이러면 어떠냐?"
테츠는 아칸에 갔을 때 기념으로 똑같은 여우 가면을 그 가면 가게에서 샀었다.
테츠가 여우 가면을 쓰자 그제야 나브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가면을 쓰니 정말 미치 오라버니 같아요. 다 나아서 다행이에요."
오렌시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는 어떻게 미치의 상처가 사라졌으며 미치가 누구인지 모든 설명을 듣게 되었다. 물론 그가 황태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저기 제이미는 어떻게 됐나요? 불쌍한 제이미. 그는 돈과 권력에 빠져 버렸어요."
"그놈은 좀 더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야. 세상 물이 그리 달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도록 놔둘 생각이다."
오렌시아와 나브는 엘드리치 요새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오렌시아는 나브를 돌보며 주방에서 일을 거들기로 했다.
엘빈이 이끄는 마교 일진이 오크의 숲으로 출발했다. 알프레드와 세실리아, 로한슨, 실버팽이 뒤를 따랐다. 완전한 토벌인 만큼 전투의 달인들이 대거 출정했다.
그리고 남쪽 테일리아드 마법사를 호위하기 위한 이진은 테드버드가 맡았다. 활잡이 루안과 마법사 애시턴이 테드버드를 보좌하였다.
"국사도 정치만 신경 쓰지 말고 무공도 신경 쓰세요."
메흘린은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를 쓰는 것은 잘하는데 몸 쓰는 것은 조금 더딥니다. 지금은 애시턴이 나를 능가할 정도니."
"쯔쯔. 그래서야 위신이 서겠습니까? 모름지기 군사는 지략과 무공 문무가 절충해야 부하들이 믿고 따르는 법입니다."
며칠 전 출정에 앞서 테츠는 마교 전체 인원의 무공을 점검했다. 생각 이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 2성 내공이 한계였지만 이미 대부분 2성은 거뜬히 돌파했고 무공의 정교함으로 따지면 테드버드가 가장 좋았고 파괴력 면에서는 엘빈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실버팽도 놀랍도록 진전을 이루었고 알프레드는 내공 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해 그가 휘두르는 데미얀의 검은 마교 내에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
세실리아와 로한슨 두 사람은 콤비가 되어 공격과 방어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연마해 놓았다. 루안의 활 솜씨는 여전하고 가장 늦게 배운 애시턴의 무공 수위도 놀랄 만큼 발전을 이루었다.
테츠는 자신이 무림에 있을 때보다 이곳 사람들이 훨씬 무공의 진전이 빠른 것은 바로 마나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다. 평소 마나와 함께 수행하면 무공의 진척이 매우 빠르고 내공의 단련수준도 극히 높다는 것을 알았다.
무림인이 일 년 정도 수련하는 것을 반년도 안되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중에 가장 진전이 느린 것은 다름 아닌 메흘린 이었다. 사실 메흘린은 다른 사람이 땀을 흘리며 수련에 열중할 때 마교 전체를 돌보느라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흘린 땀방울의 무게가 다르니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메흘린은 마교 전체의 살림꾼이라도 해도 누구 하나 존경해 마지않는다. 테드버드조차 메흘린의 말에 쩔쩔맬 정도이니.
테츠는 잠시 시간이 남는 김에 메흘린에게 복마기공 대신 단시간에 내력을 올릴 수 있는 천마심공의 일부분을 전수했다. 천마심공은 난해하기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메흘린이 전부 이해하는 것은 무리수고 테츠가 내공을 돋우는 부분만 발췌해서 익히기 무리 없도록 새롭게 만들었다.
복마기공은 내력을 튼튼히 함에 무게를 둔 기공이고 여기에 천마심공을 가미하면 훨씬 빠르게 내력을 모을 수 있다.
테츠는 입으로 명령하는 자는 힘 또한 뒷받침되어야 말이 먹혀들어 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특별히 메흘린을 가르친 것이다. 자신이 마교에 없을시 메흘린이 마교 전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재목이기 때문이다.
메흘린은 본진을 담당하기 위해 엘드리치에 남아 있었다. 지금 엘드리치 성주는 아직 에미르슨 백작이다. 에미르슨 백작은 메흘린의 부관으로 남아 두 사람의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었다. 에미르슨은 테드버드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으나 내공이 전무한 탓에 발전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테츠는 메흘린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에미르슨 백작에게 내공을 전수하고 메흘린과 같은 무공을 익히도록 배려했다.
그 후 며칠 뒤 엘드리치 정문에 사신왕 제럴드가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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