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demonium. Mammon's Tower(275)
제목 없는 책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안 될 것 없지."
책을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크고 두꺼웠다. 표지는 시커먼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정면에는 눈을 감은 악마의 얼굴이 양각되어 있었다. 뒤쪽은 거친 느낌의 재질로 되어 있고 만졌을 때 약간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네르갈이 말하기를 바알이 건네주라고 했던 책이니만큼 악마의 물건이 분명했지만, 권능은 전혀 없었다.
"강력한 주술이 걸려 있군요."
"그래, 네르갈이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그 책을 볼 수 있다고 했어. 놀라는 걸 보니 책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데?"
"아뇨, 착각했나 보네요. 제가 알고 있는 책과는 묘하게 달라요."
"이리 줘봐. 열어 보게."
다시 책을 건네받고 두꺼운 표지를 열었다.
"아래? 꼼짝도 안 하네. 네르갈이 거짓말했나?"
"그렇진 않을 것에요. 오직 주인님만 열 수 있다고 했죠? 그런 책은 보통 주인의 피로 작동하죠."
"피? 악마다운 책이군."
책 표지를 보니 눈을 감은 악마의 입이 조금 벌어져 있다. 마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그었지만, 피도 나오기 전에 상처가 아물었다.
"이런 피를 내기도 힘드네."
"저번에 바알에게 받았던 제물의 단검을 사용하세요. 그가 제물의 단검을 준 이유를 알겠군요."
"제물의 단검을 써야 하나? 찝찝한데···."
"말 그대로죠. 이 행성에 단 한 자루 존재하는 검. 목동 아벨이 처음으로 양을 잡아 신에게 제물을 받쳤던 그 검이에요."
"그런 중요한 검을 왜 악마가 가지고 있지."
"저도 모르죠. 바알이 그 단검을 넘겨준 것은 이 책을 열기 위한 안배일 거예요. 악마는 필요 가치가 없는 걸 무턱대고 주지 않거든요."
"단검과 책이라.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주인님은 이용 가치가 충분하니 해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악마다운 표현이구먼."
제물의 단검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젓고는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살이 벌어지고 붉은 피가 솟아 나왔다.
확실히 제물의 단검은 네필림의 신체에 쉽게 상처를 냈다.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짜듯이 악마의 입속으로 떨어뜨렸다.
-번쩍
피가 들어가자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시커먼 안광이다. 갑자기 책의 무게가 확 늘어났다. 부릅떠진 두 눈은 시커멓다. 눈동자는 없고 어둠의 동굴처럼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 같았다.
악마의 동공에서 줄기줄기 어둠의 권능이 뿜어져 나왔다.
"폭식. 바알의 권능이군."
쳐다보고 있자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꺼운 표지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주자 열리지 않았던 표지가 떨어졌다. 상당히 두터운 책인 것에 비해 한 페이지도 매우 두꺼웠다. 그러니 전체 페이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글이 없었다. 사람의 인체가 그려진 그림이 전부였는데 조금 거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알몸이고 남성의 상징물까지 그려져 있었다. 다른 건 인간과 같았는데 얼굴만 달랐다.
얼굴은 인간이 아닌 악마의 얼굴이었다. 조금 흠칫한 것은 녀석의 머리 뿔의 형상이 나와 같았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로는 인간이 지문이 서로가 다 다르듯 악마도 가진 뿔의 모양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림의 뿔은 정확히 내가 가진 뿔과 똑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악마의 얼굴을 한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빈 여백을 왜 그렇게 들여다보세요?"
"어? 여기 인간 모양의 그림이 보이지 않아?"
"글쎄요. 제겐 백지로 보입니다."
네르갈이 나만 볼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책을 덮었다. 한가하게 책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 이번 층의 미션을 찾는 것이 급선무야. 이제 한 층 남았군.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찌 됐건 이렇게 성공의 문턱까지 올라왔어."
"락케를 보내 놨지만, 이 층을 디자인한 악마를 찾기 전까지는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락시누와 우피르를 가둬 놨으니 소환도 안 돼. 이럴 거면 사역마로 만들어 놓은 의미가 없지."
"파리교단에서는 주인님의 체면보다는 자신들의 품위가 훼손 될까 봐 그러는 겁니다. 바알의 낙인을 받은 악마가 소멸하면 곤란한 것은 바알 쪽이거든요. 받으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악마 세계의 관례인 만큼 두 악마로 인해 큰 시비가 일어날 것이 뻔하죠."
"앞으로 사역마를 만들 때는 좀 더 신중해야겠군."
지젤을 파니와 함께 성당 밖에 두려 했으나 가시권 내에 내가 보이지 않으면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켰다. 어쩔수 없이 생쥐로 만들어 포켓에 넣어 두었다.
파니는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고자 하는 감정은 당연하다고 했다. 지젤은 온전히 지젤 하나가 아니다. 수 없이 억울하게 죽은 모든 아이의 영혼이 뭉쳐 만들어진 존재다. 악마도 악령도 아닌 원망이 만들어낸 존재 레지던트 이블이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악마 등급으로 돌아섰다. 내가 바알의 낙인을 받음으로써 지젤도 내 사역마가 되었고 등급은 3품의 악마로까지 올라갔다. 지금부터 권능을 모으면 품계는 더 올라갈 것이다.
속삭임을 권능으로 삼고 있는 제이노도 게헤나에서 활동 범위가 제한적이다. 바알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지만 반대로 바알과 맞서는 악마들에게는 최고의 표적물이다.
제이노는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 인간들의 틈 속에 파고들어 권능을 모으고 있다. 속삭임으로 질투를 유발하고 의심을 퍼뜨리며 오해를 일으킨다.
제이노는 악마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것이 악마니까. 나는 그런 악마를 방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었다. 제이노는 수많은 인간을 이간질하여 나락으로 빠트린다. 놈은 오셀로의 비극을 맛보고 흐뭇해하며 권능을 축적한다.
제이노는 언노운 즉 이름 없는 최하급 악마였다. 그런 놈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사역마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그 때문에 수많은 영혼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내가 가진 힘이 크면 클수록 엄청난 책임감을 뒤따른다는 사실을 그때그때는 힘에 취해 망각하곤 한다.
죽 늘어선 긴 탁자 중 하나에 앉았다.
지금 내 위치를 되새겨 보았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악마를 퇴치하고 이 세상을 원래대로 만든다는 어설픈 각오는 언노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정아와 함께 네크로폴리탄과 이모탈 시티를 돌보며 평화스럽게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언노운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에 강박관념을 가졌다. 언노운이 떠나 버리면 지금까지 손에 잡았던 모든 행운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언노운이 하자면 나 스스로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만들고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했다. 일본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모두 내 생각이 아닌 언노운이 잡아끄는 대로 움직였다.
정확히 아스모데의 등장은 언노운에게 치명타였다. 666,666,667번의 회차 중 처음으로 일어난 일. 그건 내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기에 충분했다.
늘 차원 분기를 운운하며 행동에 제약을 걸었던 언노운은 처음 경험하는 아스모데의 사건으로 모습을 감춘 이후 1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해 온 것 보면 차원 분기가 일어나도 수천 번은 더 일어났을 터였다.
언노운이 돌아온다는 기대감의 수치는 1% 미만이다. 언노운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계산해 내가 설계한 목표는 롱기누스 창을 찾고 미련 없이 아시아로 돌아오는 거였다.
그 계획은 이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부닥쳤다. 이렇게 악마와 자꾸 가까워지고 악마의 계획인 무엇이든 깊숙이 개입한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상태에서 네크로폴리탄으로 돌아가면 이모탈 시티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악마들은 우리 쪽 지역은 거의 건들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마인도 거의 없었고 인간도 스스로 마인이 되기 위해 방법을 찾은 거니. 거긴 버려진 땅이자 잊힌 땅이었다.
중국 천산 모굴동에서 나무와 열매를 찾아낸 것은 곤륜선인이다. 그들은 인간을 구제하고자 천산 모굴동의 과실 무스토를 중국에 퍼뜨렸다. 그 무스토를 가져와 네크로폴리탄에 아담의 던전을 만든 것은 손혁기였고.
그러한 사실을 악마는 왜 모르는 걸까? 악마도 만능이 아니다. 놈들도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듣는다. 그리고 인간에게 빙의 될 수도 있고 만약 중국을 의심하는 악마가 있다면 인간에게 빙의할 수도 있겠지. 곤륜선인에 빙의한 악마가 불신을 권능으로 하는 3품 악마 시무르그였다.
놈은 감히 평범한 사람도 아닌 하프 네필림에 빙의했다. 은총이 가득한 신체에 빙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것이 찝찝했다. 만약 또 다른 악마가 중국인 중 한 명에 빙의한다면 중국과 네크로폴리탄 나아가 이모탈 시티의 존재가 까발려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롱기누스 창에 매달리고 있다. 언노운이 한 말. 롱기누스 창은 악마를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을 믿고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악마들은 롱기누스 창을 별 볼 일 없다고 둘러대지만, 언노운이 말했던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그가 그랬다면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지금은 오직 롱기누스 창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혁련광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태을진군을 좀 더 조사해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 악마는 두렵고 공포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악마가 동네 이웃사촌처럼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연옥이라는 존재. 그리고 내 어머니와의 만남. 나는 이들 틈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악마들의 계획에 생각 없이 매달려 가는 것은 아닐까?
롱기누스 창을 핑계 삼아 악마와 너무 가까워져 버린 것은 아닐까? 언노운이 무엇을 말했든 간에 악마의 존재는 너무나 거대하고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과연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수억 번의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루시퍼를 이긴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 차원이라고 해도 별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ITB에서 다시 책을 꺼냈다. 탁자에 올려놓으니 악마의 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완전한 악마의 얼굴. 그러나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표지를 넘기니 예의 인간 그림이 있다. 다시 한 장을 넘겼다.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종이 따위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살짝 구부려 보았는데 내 힘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음 장에는 평범한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쿵'하고 박동이 뛰었다. 문자는 한글이었다. 한글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렇기도 하고 책이 한글로 적혀 있다는 것에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주술이 걸려 있고 나만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만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모든 것이 나에 맞춰져 있다는 이야기고 내가 가장 잘 알고 익숙한 문자로 보여질 것으로 예측했다.
악마는 보통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하거나 대부분이 라틴어를 사용했다. 악마가 왜 라틴어에 집착하는지 모르지만, 주문을 외거나 펜타그램을 그리거나 할 때는 대부분 라틴어였다.
'악마의 본신에 대적하려면 네필림의 본신을 찾아야 한다.'
본신? 네필림도 본신이 있었나?
'네필림의 본신은 거대하고 거대하도다. 머리가 구름을 뚫으며 한 발자국에 천지가 진동한다···.'
'천사들이 네필림을 죽였으나 일부 네필림은 육신을 버리고 도망쳤고 천사들은 그들의 육신은 태워 소멸시켜 다시는 그 힘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부모들이 합심하여 몇몇 남아 있던 네필림의 육체를 차원 밖으로 날려 보냈다. 네필림의 육체는 영원히 컴컴한 우주를 떠돌게 되었으나 천사들에게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네필림의 육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전 차원의 우주를 모두 뒤져야 한다. 아무리 천사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책에는 네필림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결국 거대한 악마의 본신과 맞서려면 네필림도 본신을 찾아야 한다는 소린가 보네. 그걸 어떻게 찾냐고. 전 우주를 떠도는···."
그러나 실마리가 없으면 그 책이 나한테 온 것은 아닐 테지.
'본신을 찾아내는 방법은 피의 유대를 이용해야 한다. 차원을 지배하는 네필림만이 그 육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의 유대라? 이것이 있으면 가능한가?'
'피의 유대로 피의 길을 열어라. 루치페르가 그 길로 안내해 줄 것이다.'
'루치페르라면 루시퍼인가?'
이어링에서 라틴어 사전을 열람해보니 루치페르가 루시퍼의 라틴어 발음과 같았다.
"본신을 찾기 위한 첫걸음은 루시퍼를 만나는 거네."
다음 장을 넘겼다.
책은 두꺼워 수많은 페이지로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한 장 한 장도 상당히 두꺼워 솔직히 페이지 수는 겨우 20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네필림의 육체에서 달아난 죄악과 공포와 믿음을 찾아라. 세 개의 영혼을 모두 모으면 루치페르가 응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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