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10) -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들
탈출(10) -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들
뒤엉킴이 오히려 낫다.
지금까지가 팀전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적을 분쇄해 나가야 한다.
불구덩이를 제외한 대지는 온통 악마가 달라붙어 있다.
지독한 난전.
밀리지 않는다.
분신이 톡톡히 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이어링의 킬 수에 따라 교대로 미니건을 사용했다.
미니건이 돌아가며 질러내는 소리는 그 어떤 악기 소리보다 감미롭게 들린다.
레이는 분신의 그림자에 들어 있다. 무기에 축복을 걸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인커전도 성역에 들어갈 자격을 자진 존재이고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니 축복은 능천사의 것과 맞먹는다.
부유하는 악령도 물리적 데미지를 가진 탄환에 불타오른다. 이놈들도 생명을 가진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신성력의 축복이 서린 탄두는 악마들의 구성 인자를 태워 정화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엄청나다.
'이건 고위 악마가 아닌데?'
이어링에 찍힌 포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뇌
거대한 뇌가 움직인다. 말 그대로 악마의 외형이 인간의 뇌와 같다. 단지 네 발이 달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크기는 송아지만 하다. 징그러운 네 발 달린 뇌가 걸어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오우무라는 악마입니다. 정신계 특수 능력을 발휘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이어링에 떠오른 정보를 읽고 동료에게 전송했다.
"녀석들은 정신계 공격을 합니다. 거리를 주지 마세요. 원거리에서 화력으로 밀어붙여요."
느낌이 좋지 않다. 이렇듯 악마는 단순하지 않다. 오우무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악마는 까다롭다. 상성이 좋지 않은 악마를 만나면 림보라고 할지라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웬 일행에게 확실히 인지시켜 준다.
그나마 물리적 데미지에 약해서 축복된 탄환에 여지없이 박살이 나지만 대지를 보니 지평선까지 끝도 없이 깔렸다.
"으윽."
"큭."
선두에 선 오웬과 퍼시벌이 머리를 쥐어짜고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뇌에서 쏘아 내는 특수한 주파수는 인간의 정신에 공명해 기억 속으로 파고든다.
'아냐. 내가 직접 하겠어.'
언노운이 공간을 잘라 버리겠냐고 묻는다. 나는 나 스스로 능력으로 저들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집중한다.
검을 든 두 사람이 대치할 때 먼저 빠르게 검을 뽑는 자가 먼저 공격할 기회를 얻는다.
스킬을 쓰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그에 맞는 스킬 또한 빠르게 질러내야 한다.
잠깐 움찔하는 순간에도 희비가 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반월륜을 끄집어냈다. 크기 모양을 판단하는 것을 모두 포함해서 빠르고 매끄럽게 이어가야 한다.
언노운의 도움 없이 기술을 효율적으로 다뤄야 한다.
반월륜 자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스킬이란 것도 최근에 알았다.
-촥, 쉬이이이이잉
1m 크기의 반월륜 천 개를 만들어 날렸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주변의 악마를 토막 냈다.
천 개, 이천 개, 삼천 개 정신력이 버틸 수 있는 만큼 계속 소환해 냈다. 밀려오는 거대한 뇌를 가르며 날아가는 반월륜이 지상 위를 가득 덮었다.
적이 숫자가 많다면 이쪽도 비슷하게 맞추면 되는 간단한 원리.
반월륜을 계속 분열시켰다. 계속 고위 악마만 상대하다 보니 반월륜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할 때 반월륜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물론 공간을 접거나 잘라 버리기도 가능하지만, 언노운의 도움 없이 스스로 판단에 의한 기술이다 보니 아무래도 몸에 잘 익은 오랜 기술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권능이나 신성력을 사용하면 교단의 악마들에게 포착될 수 있으니 순수 차원 에너지를 이용하는 스킬로 반월륜이 이상적이기도 했고 약간의 축복만 가미하면 물리적 데미지가 통하지는 않는 적들도 상대할 수 있다. 여기는 어디까지 림보니까.
반월륜의 개수가 억 단위를 넘겼다. 하나하나 제어하는 것은 무리라 토네이도처럼 뭉쳐 대지를 휘저어 버렸다.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동료들이 오웬과 퍼시벌을 뒤로 끌어냈다.
블레싱 글로리와 상관없는 이런 계열의 사이킥 데미지는 확실히 상극이다. 물론 그에 반한 대응을 할 수 있지만 아직 이들은 미흡하다.
'저들에게 사이킥 공격 방어하는 방법을 보내.'
【알겠습니다】
내겐 킬 수는 의미가 없다. 이렇게 악마를 쓸어 담아 봐도 득 되는 것도 없다.
스킬 연습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오웬 일행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에 돌입했다.
블레싱 글로리를 이용하여 방어막을 치는 기술을 습득하곤 자신감이 붙었던 모양이다.
언노운이 블레싱 글로리의 여러 가지 사용 방법을 전해 준 것도 한몫했다.
물론 나도 블레싱 글로리의 사용법은 알고 있었고 미리 알려 주지 않은 이유는 좀 더 원초적으로 사용해 자기 몸처럼 능숙해지면 그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전진할수록 악마의 분포는 더더욱 다양해지고 그만큼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순식간에 물고기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아직은 아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 도움은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면 여기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림보는 넓다. 죽지 않는다고 해도 도대체 얼마나 이곳에서 헤매야 하는가?
정신계를 공격하는 악마는 결국 내가 모두 퇴치했다.
다행인 것은 지치지 않고 계속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탄약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한계선도 없이 나아가야 했다.
막연히 미카엘이 축복을 내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레이를 통해 그와 직접 접촉이라도 하면 좋을 것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 레이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순수한 인간의 영혼을 가진 자가 신념을 가지고 지옥에서 악과 싸워 이긴다면 정말 축복이 내려올 것이냐고 말이다.
순수한 인간이 지옥 한가운데서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도대체 몇 프로나 될까?
과거의 역사에 그런 인물이 있긴 있었다고 하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성인이었고 스스로 어떤 인물을 구하고자 지옥에 뛰어든 자들로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하나 믿음뿐이었다.
속내를 까보면 그들은 평범한 인물이 아닌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받을 조건을 갖춘 자였기에 가능했고 다른 예를 보더라도 절대 평범한 인간이 제삼자의 도움 없이 게헤나를 벗어난 예는 없다.
지금 내가 그 제삼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이어링에 점등이 떠 올랐다.
'이번에 뭐지?'
점등은 떴는데 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악마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거짓말같이 싹 증발한 것 같이 사라졌다.
"잠시 대기"
선두에 선 오웬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일행의 전진을 중지시켰다.
나는 지면 아래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오웬 발아래. 지면에 들어 있어요. 놈에 대한 정보를 보낼게요."
금주.
이름이 동양스러운 녀석이다.
이런 정보는 환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악마 목록에서 복제해 온 것인데 각 악마의 외형과 장단점을 기록한 책이었다. 그걸 카피하여 자료화 한 것이다. 물론 후일 원래 있던 자료철이 해제됨에 따라 덮어 씌기가 되었지만.
땅속에 묻혀 있다가 진동을 감지하면 솟아올라 공격한다. 금주라는 말 그대로 지름 2m에 높이 10m짜리 시커먼 쇠기둥이다.
쇠는 헬오어 광석이며 이 쇠기둥에는 동서남북 아래위로 수십 개의 눈알이 달려 있는데 그 눈알이 작을 포착하면 붉은 광선을 쏘아 대는데 굉장한 열기를 품고 있는 열선이다.
플라즈마에 가까운 열선이라 닿는 것은 죄다 녹여버린다.
"저희가 가진 블레싱 글로리와는 상성이 좋네요."
오웬의 말대로 블레싱 글로리는 열에 무척 강하다. 천사는 빛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생체 유기 갑옷 또한 열과 빛에 거의 면역이다시피 할 정도로 막강하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열과 빛에 한해서고 금주가 뿜어내는 붉은 열선은 악의 권능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블레싱 글로리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파비앙이 유탄 발사기를 요구하여 M79 유탄 발사기와 RPG를 각자 한 대씩 넘겨주었다.
유탄 발사기의 탄이 전방으로 쏟아지자 자극받은 금주가 솟아올랐다.
시커먼 헬오어 금속에 눈알이 가득 박힌 금주는 붉은 레이저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오웬 일행은 RPG로 대응했지만 붉은 광선의 위력과 속도에 아예 상대되질 않았다. 아직 방어막 치는 것도 서툴러서 허둥대는 사람이 태반이다.
몇 시간 안에 제 몸처럼 다루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데 이런 가혹한 환경까지 접하면 한계가 분명히 정해진다.
"정식적으로 물러서면 안 돼요.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마음먹어야 신체가 강화됩니다. 맞으면 안 된다. 맞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면 신체도 나약해집니다. 이 갑옷의 힘은 자기 정신력을 증폭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이런 확실한 믿음을 주는 말은 팀의 사기 진작과 전투에 상당한 플러스 요인을 준다.
일행은 내 말에 완벽한 신뢰를 보냈고 또 위험에 처하게 되면 내가 반드시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가장 컸다.
"물러서는 자에게는 힘을 나눠 주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임무는 백 퍼센트가 아니라 이백 퍼센트가 되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열심히 카피너를 실행하고 있는 복제물의 인지로 말했다. 묘한 느낌이지만 이것 또한 나 자신이니까.
'레이 미카엘이 이 상황을 보고 있겠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 보는 것은 미카엘님이십니다. 그분이 보지 않으면 이곳의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뭔가 방법이 없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뭔데?'
'직접 그분을 부르면 됩니다.'
'뭐? 여기로?'
'아뇨. 제 말은 믿음으로 그분을 부르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믿음은 바로 진심 어린 기도에서 나오는 거죠.'
'기도문 같은 거?'
'네. 여기 크리스천이 네 명이나 있네요.'
대지는 온통 금주 밭이 됐다. 붉은 열선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RPG와 유탄 발사기의 발사 속도가 이들의 열선을 따라갈 수도 없고 고개를 내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열선이 동시에 날아왔다.
이들이 내 도움 없이 림보를 헤쳐 나간다는 것은 솔직히 자살 행위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도전이다.
반월륜이 다시 허공을 누볐다.
금주를 토막을 냈고 잠깐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는데 얼굴이 밝지 못했다. 적이 너무 강했고 또 상성이 맞지 않으면 힘을 쓸 수조차 없었다.
자신의 나약함은 자신이 가장 잘 느낄 수밖에 없다.
"킬 수를 찍더라도 제 도움이 가미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블레싱 글로리에는 무한한 힘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두려움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신은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이들은 내가 둘이 되든 셋이 되든 놀라지도 않는다. 분신과 레이는 한 팀이 되어 탄약 공급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니 그것으로 싸울 준비는 충분한 것이다.
이곳이 지옥이라는 것도 실감하지 못했고 그들은 아직 팬더모니엄의 어느 층일 뿐이었다.
금주의 밭은 다행히 다른 악마도 접근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금주는 접근하는 것이 무엇이든 공격하는 성향이 본능이다.
덕분에 아주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과거에 크리스천이었던 분이 파비앙, 리안, 다니엘, 바트죠?"
파비앙이 헛웃음을 짓는다.
"이 세상은 신이 버린 세상이라고 아무리 신을 찾아봤자 응답해줄 리도 없고 더욱이 이곳은 지옥이라며? 세상에 누가 지옥이 실존하는 곳이라고 믿겠어?"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네 말이고 실제 이 차원은 악마가 모여 사는 차원으로 게헤나라고 불립니다."
"지옥이든 게헤나든 기도가 신에게 닿겠냐고!"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좋은 중계기가 있으니까요."
"아라곤 말이라면야 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신의 창조물 중에 천사 미카엘은 신의 전사이며 악을 처단하는 데 자비심이라고는 일절 없는 천사입니다. 저희는 신의 자손으로 미카엘을 부를 것이며 그를 대리하여 악마와 싸워 승리를 쟁취 할 겁니다. 여러분이 미카엘의 축복을 받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악마만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렇긴 한데. 다만 신의 전사로서 진정으로 악마와 싸운다는 일종의 맹세를 하는 것이고 미카엘의 대리자로서 맹세하여 그의 관심을 끌어내야 합니다."
"말만 하시게."
"여러분 저를 따라 진심으로 기도합시다. 앞으로는 기도할 시간도 없을 겁니다."
"시작하지. 우리 모두 작은 기도의 시간을 갖자고."
파비앙이 한쪽 무릎을 꿇자 전원이 같은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성 미카엘 대천사여 싸움 중인 우리를 보호하시고, 마귀의 간악한 올가미를 막는 보루가 되소서. 하느님께서 명하시기를, 우리는 간절히 청하오니, 당신은, 천상 군대의 지휘자는 사탄과 다른 악령들,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이들을, 하느님의 힘으로 지옥으로 쫓으소서."
우리는 다 같이 미카엘의 주기도문을 외웠다.
"멈추지 말아요. 미카엘을 청하여 그가 우리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세요."
솔직히 확률을 정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곳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다.
지혜 교단의 악마에게 들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악마를 처단해야 한다.
악마의 시체로 산을 쌓고 악마의 피로 강을 만들어 천상의 전사로서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사탄의 악과 간계에서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탄을 쫓아 버리소서. 천상 군대의 영도자 미카엘 대천사님. 영혼들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을 하느님의 힘으로 지옥으로 쫓아 버리소서. 아멘."
파비앙이 선두에 서서 미카엘의 기도문을 외치며 전진했다.
미카엘은 레이를 통해 자신을 부르는 간절한 기도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가 응답해줄지, 않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 작가의말
어제 어버이날 잘 보내셨습니까.
다시 전진해 봅니다.
그 끝이 이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갈 때까지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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