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르
아스타르
과연 녀석의 훔치기 권능은 대단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반월륜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은 물론 다른 레이버러를 방패로 이용해가며 접근했다.
민첩성으로만 보면 우주 최강이라고 해도 될법한 놈이다.
손. 녀석의 손은 거의 광속에 가까울 정도의 움직임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치고 빠지면서 내 몸속을 더듬는데 이건 신의 경지를 넘어선 광기 그 자체다.
이코노미스의 손기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빠른지 언노운이 움직임을 표시하긴 했지만 눈 뜨고 당한다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느낄 정도로 녀석의 움직임은 기이했다.
힘으로만 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멜페르는 이미 이것까지 계산하고 이코노미스를 데리고 온 것일 테지. 비록 악마의 소굴인 게헤나에 있을지라도 한때는 도둑들의 신으로 추앙받던 토착신의 계열에 있던 신이다.
반월륜을 멈췄다.
그러자 수많은 데이 레이버러들이 내 주변으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겠지만 워낙 추잡스러운 놈들이라 몸에 닿는 것이 싫어 펄스 쉴드를 켰다. 공간이 없을 정도로 달라붙더니 그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제아무리 도둑의 신이라고 자처하나 이렇게 움직임이 멈춘 상태에서 공간마저 없으니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계속 달라붙으니까 서로 치이고 끼여서 압축되기까지 하니 가장 먼저 달려들던 놈은 뒤에 놈에 밀려서 몸이 일그러져가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 이래도 움직일 수 있을까?"
"날 알아봐?"
"남의 물건에 손대는 실력을 보면 너 외에는 달리 없을 테니까.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이름 꽤 있는 악마에 관해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도둑은 훔침을 들키면 그것으로 끝이지. 난 이쯤에서 빠지는 것이 좋겠어."
"후후, 그냥 가려고? 그럼 섭섭하지. 물건을 훔치다 들키면 손모가지 하나쯤은 남겨 두고 가셔야지."
"잡혔을 때지. 난 아직 잡힌 건 아니니까."
"흐, 네필림 주머니 털다가 꼬리 잡혀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면 참 볼만 하겠네. 도둑은 자고로 명성으로 먹고산다던데 흠집이 생기면 볼만하겠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넌 도둑으로서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지. 도둑질 실패 말이야. 훔친걸 들킨 것도 짜증 나는데 정체까지 털렸으니 이번 일은 득보다 실이 더 크지? 네가 실패한 것을 여기저기 자랑질하고 다니면 볼만 하겠네."
"주절거리는 것을 보니 입막음 대가로 뭘 챙겨 달라는 뜻이군."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군. 가서 멜페르가 가진 소환식 두루마리 훔쳐 와. 그럼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해줄게. 넌 손해 볼 일이 전혀 없으니 좋잖아? 네 명성도 지킬 수 있고."
"두말하진 않겠지?"
"난 여기 악마 새끼들이랑은 기본급이 달라. 내 입은 하나뿐이야."
"좋아. 그 거래 받아들이지."
권능을 모았다가 일순간 방출시켰다. 권능의 소용돌이가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며 데가 레이버러들을 흩뿌렸다. 수확장에 손실이 가면 골치 아프니 적당히 힘을 조절해야 했다.
"품에 넣어놨다. 거래는 끝이야."
"물론. 난 오늘 너를 만난적이 없는 거지."
나는 유유히 수확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멜페르는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ITB에서 바알의 인증서를 꺼내 불태워 버리고 다크 로드를 타고 집회소로 넘어갔다.
"그래도 미국이 좋겠지?"
아메리카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다크 로드가 인간계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도 만능은 아니다.
두 가지 제약이 걸리는 데 한 번이라도 밟았던 흔적이 있던 곳으로만 올 수 있으며 대신 소환자가 소환한 곳이라면 조건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이곳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간단하게 점검한 후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곳이 편할 것 같다.
섹서스는 대륙을 횡단한 모양이다. 지젤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잘 생활하는 것 같다. 사람을 헤치지 말라고 한 것은 잘 지키는 것 같다. 이곳 인구수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자드키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던 전속에 있거나 다른 대륙으로 이동한 것일 테지.
네크로폴리탄이, 이모탈 시티가 너무 그립다. 이젠 그곳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단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위해 너무나 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제 인간으로 사는 삶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텍사스주 끝 언저리쯤 오니 마침 침식된 곳이 보여 내려왔다.
두루마리를 펼치고 소환진을 기억했다. 두루마리는 곧바로 태워 버렸다.
멜페르는 내게 두 번씩이나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가 갈릴 거다. 난리를 치고 있을 멜페르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언노운은 이 복잡한 소환식을 한 번에 깔끔하게 그려냈다. 나였다면 머리를 싸잡고 비명을 질렀을 거다.
소환식을 그린다고 부름에 다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와야 오는 것이기에.
물론 별의 주기나 월, 요일, 악마 문자 등 모든 것이 일치하는 순간에 대상을 부른다면 강제 소환도 가능하지만 그건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대부분 악마는 소환에 응하긴 한다. 루시퍼나 이런 애들은 제외하고 하긴 칠죄종을 소환하려는 어리석은 생명체는 없을 테니까.
"너냐?" "아스타르 반갑습니다."
평범하다. 80살 정도 노인의 외모인데 흰색 가운에 푸른 면바지 그리고 맨발에 슬리퍼.
그나마 허리는 꼿꼿하게 바르게 서 있는 편이다.
외모만 보면 저절로 존댓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악마에게 존댓말 하지 않는 주의지만 이 친구는 워낙 외모가 거시기해서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유교적 관념은 거의 없는대도 말이다.
그만큼 이 노인네가 풍기는 풍채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악마지만 이 친구도 한 때 성역을 날아다니던 천사였다. 지식의 탐구욕이 지나쳐 그것이 죄라면 죄가 되어버린.
결국 루시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검은 날개를 달아 버렸다.
"뭐지?"
"탱그리에 대해서···."
"배고파."
"잠깐만 기다려 보시죠. 그러고 보니 저도 음식 입에 댄 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ITB에서 후딱 재료를 꺼냈다.
그럴싸한 테이블 세팅을 완성했다.
"커피로 할까요? 아니면 원하는 것이라도?"
"식전에 무슨 커피냐? 속 달래게 따뜻한 우유 한잔."
"주문받도록 하죠."
우유를 데워 그 앞에 놓았다.
"고기류로 할까요? 아니면 드시고 싶은 거라도?"
"스테이크로 가지. 화이트 와인도 추가하고."
"최고로 모시죠."
곧 주변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왓처는 이미 우리를 발견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왓처다.
아스타르의 잔에 화이트 와인을 따랐다.
한우 투뿔로 구운 스테이크는 냄새만으로 속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난 엄연히 폭식의 권능을 가진 악마니까.
마이바르 반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아스타르가 외쳤다.
"거기야. 지금이 가장 좋아질 때다. 풍미가 최고조에 올랐어."
즉시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고 플레이팅을 했다.
"좋아, 완벽해. 음식은 먹는 즐거움도 크지만 보는 즐거움도 무시할 순 없지. 눈과 입과 귀가 합일 되어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거라고."
그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고 포크와 나이프도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할까?"
매우 품위 있는 식사가 시작됐다. 아스타르는 결코 서두름이 없는 동작으로 느리지만 또 느리지 않은 티 없는 움직임으로 고기를 썰었다. 그리고 포크로 찍어 올려서는 코로 가져가 두어 번 냄새를 음미하고서야 입속에 넣었다.
"기막히군. 기가 막혀. 이런 호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마찬가지다. 뭐가 그리 바쁜 나날이었는지 이런 풍미를 잊고 지냈다는 것에 억울한 감이 들 정도였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미로운 풍미 녹진한 기름이 혀 위에서 고소함을 극대화시켜 준다.
그 이후 우리는 대화 한마디 없이 한 접시를 후딱 해치웠다.
"더 갈까요?"
"아니, 식사는 한 접시면 충분해. 처음의 풍미가 최고지 다음 접시는 그만큼 풍미가 깎여서 서글퍼져."
"후식은?"
아스타르는 빈 와인잔을 보면 말했다.
"역시 커피이려나?"
"대령합죠."
커피 한 잔을 마시니 몸이 딱 풀어지는 느낌. 물론 포른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의 편린이지만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언노운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준 것이다.
ITB에서 담배를 꺼냈다. 금연한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담배 한 대의 여유도 없이 달려왔다는 것에 나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기름진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커피를 마시니 담배가 저절로 생각났다.
그 이전에는 담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포른의 몸을 얻고 나서 담배 핀 적이 없는 것 같다.
"한 대 하시겠습니까?"
"사양하면 손해지. 이거 말고 시거는 없나? 쿠바산이면 더 좋은데?"
"시거는 있긴 한데 쿠바산은 없습니다."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커피 한 잔의 여유란 이런 것인가?
"탱그리는 뭐 하려고? 아, 네가 훔쳤었지. 루시퍼가 다시 회수 했다더니만."
"그가 직접 나설 만큼 대단한 것인지 궁금해서요."
아스타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호기심?"
여기서 입을 잘못 놀리면 일이 틀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난 누굴 속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탱그리 마법서라고 하잖습니까? 그 마법 한 번 사용해 보려고요."
그때 아스타르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래, 그거지. 책을 읽었다면 정보를 취합해서 활용해야지. 루시퍼 그놈은 겁이 많아서 쯧쯧."
"원본하고 번역본을 대조해 봤는데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고."
"뭐라? 그럼 내 번역이 잘못됐다고 하는 거냐?"
"대충 내용은 다 파악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더군요. 스킬 설명은 장황한데 그 스킬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특히 마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설명이 미약해요. 그건 원본도 마찬가지더군요."
"탱그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태고신의 뇌에서 태어난 고대신이 초월체가 만든 한 종족에 관심을 가졌죠. 전 우주 통틀어 그의 사념과 연결된 유일한 생명체였으니까요."
"그래서?"
"고대신은 그들 앞에 헌신해 기적을 보였고 그들은 그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탱그리라 불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야 번역본에 내가 써놓은 거잖아. 너 책 내용은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 루시퍼에 빼앗길 때까지 시간도 얼마 없었을 텐데. 그거 칠죄종이 읽어도 눈꺼풀이 저절로 감길 정도야. 그만큼 읽기 괴로운 책이라고."
"글자 한 자 틀리지 않을 정도로 내용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풋, 내 앞에서 거짓을 늘어놓는 것은 좋지 않아. 보라고 루시퍼 그놈도 그 책을 다 읽는데 백 년 넘게 걸렸어. 너희 시간으로는 천년이야. 탱그리의 마법서는 스스로 읽은 주인을 가리는 책이라고 멍청한 놈에게는 백지로 보이지."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루시퍼가 제게 책을 받아 갈 때 이 책 읽었냐? 어디까지 내용을 기억하고 있냐는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지는 완독 하는 데 백 년이나 걸렸는데 너보고 읽었냐고 묻겠냐? 첫 줄도 못 읽었을 거라고 아니지 아예 책장을 넘기지 못했을 거로 생각했을 거다."
"아, 루시퍼에게는 미안한데 저 진짜 완독했고 내용도 글자 한 자 안 틀리게 다 기억한다니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반응하지."
"그럼 간단하게 정리해 보죠. 주 원소를 프라미어 메테리얼이라고 하죠? 그걸 또 우회적으로 번역하셨던데 정확히는 프라미어 메테리얼이라고 하는 거 맞죠? 코드 이론에 기초하는 거고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최소 단위 원소 제1일 질량을 프라미어 메테리얼로 재구축하는 거잖아요. 즉 프라미어 메테리얼로 원소를 인코딩하여 원하는 코드로 변형하고 재구축하는 거. 거기에 아스타르 당신이 주석까지 달아 놨더군요. 불합리한 가지를 디코딩으로 제거해 새로운 코드를 정돈하면 된다고요. 재처리 과정을 하고 나서 새로운 정보를 부가하거나 삭제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구현화 시키는 것이 탱그리의 힘이죠."
"너, 너, 너, 지금 네 입으로 한 그 소리!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
놀라 자빠진 노인의 표정이 딱 지금의 이스타르 표정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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