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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벗 - Be, But...

사회생활 잘하는 조던 남작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비벗
작품등록일 :
2022.09.15 03:52
최근연재일 :
2022.10.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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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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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3.)

DUMMY

생겔라 성을 나선 뒤에 체감한 가장 큰 변화는, 왕실 기사들의 태도 쪽이었다.

그들이 좀 신기할 정도로 공손해졌더라고.

원래도 함부로 대하거나 했던 건 아니었긴 한데, 헬무트와의 협상이 끝난 뒤로는 겉으로만 격식을 갖추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중을 표현하는 느낌.

그 이유야 푀일의 시험 말고 다른 게 있을 리 없었다.


왕도 인근의 권신들을 속인 채 공주를 모시고 서방 변경까지 다녀온 이들이란 말이지.

필시 4왕비나 마테르트 백작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충성스런 기사들일 거다.

그렇기에 엘리시아 공주를 추종하는 배너렛 푀일에 대한 신뢰가 작지 않을 거고, 그가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자 비로소 공주의 가장 중요한 동업자로 대우해주기 시작한 눈치였다.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으로 드러났다.

때는 막 메리언의 옛 영지인 벤펠트에 가까워질 무렵.

그곳에서 종자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메리언과 경치를 살피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중이었는데, 무리 가운데서 작은 소란이 일더니, 왕실 기사 중 2인자 격에 해당하는 트라우스가 종자 두 명을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둘을 내 앞에 무릎 꿀렸던 거다.


“트라우스 경? 대체 무슨 일이오?”

“이것들이 조던 공의 일행에게 실례되는 발언을 한 바, 일벌백계함이 옳을 듯해 끌고 왔습니다. 처우를 결정해주시지요.”

“음······ 정확히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던 것이오?”

“이놈들, 너희가 말씀드리거라.”

“그······ 그러니까······”

“저희는, 홀란츠 공과 가벼운 장난을 쳤을 뿐입니다.”

“이놈이 그래도! 신분의 법도를 능멸한 일을 가벼운 장난이라 호도하는 것이냐? 바른 대로 고해라!”


사실 이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준귀족인 기사들이 남작에 비해 격이 낮은 신분인 것은 사실이나, 왕실의 배철러라고 하면 시골 백작가의 가신에 비해 실권이 부족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직군.

실질적으로는 자기 종자가 남작에게 사고를 쳤다 해도 가볍게 훈계하는 선에서 무마할 수 있는 입지다.

설혹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 무거운 잘못이라 해도, 내게 보고하기보다는 일행의 최상급자인 공주에게 알려 처우를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직접 종자들을 끌고 내게 온 거지.

그것은 아마도, 내게 형식상의 대접만 해주던 이전과는 달라질 것임을 천명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곧바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트라우스 경, 나는 괜찮다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지요. 약스, 너희는 정확히 어떤 장난을 쳤던 것이냐?”

“저희는, 지난번 숲속 사건 이후로 홀란츠 공과 조금 친밀해지게 됐습니다. 그분이 워낙 활달하고 장난기 많은 분이셔서, 종종 저희와 목검으로 대결도 펼치게 됐지요.”

“그래, 몇 차례 그러는 것을 봤다. 그랬는데?”

“오늘도 그와 같이 어울려 놀던 와중이었습니다. 홀란츠 공께서 한번 실전처럼 붙어봄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고, 저희도 식사 준비 전에 잠시 시간이 남을 듯해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칼을 휘두르며 놀다가, 여기 조피가······ 말씀드려.”

“······트라우스 경의 종자인 조피라고 합니다. 제가, 실전처럼 대결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 홀란츠 공께 패하고 나서 ‘작달막한 녀석답게 다람쥐처럼 날쌔구나’라고 외쳤습니다······.”

“흐음. 그랬구나. 그리고, 약스 너는?”

“거기에 홀란츠 공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어디 또 이 날쌘 다람쥐에게 도전할 자가 있냐’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즐기고 계신 거라고 판단해, 제가 나서서 ‘너 같은 겁쟁이는 단칼에 쓰러뜨려 왕실 기사의 위엄을 보이겠다’ 외쳤습니다. 그 와중에 트라우스 경께서 저희를 목격하시게 됐습니다.”

“그렇구나. 허면 트라우스 경, 이것은 신분의 법도를 능멸했다기보다는 소년들의 자연스러운 장난이 아니겠소?”


역시나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건넨 내 말에, 트라우스는 무겁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지만 조던 공, 아이들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홀란츠 공께선 분명 그 일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셨으니까요. 무엇보다 푀일 경께서 사소한 일에서조차 튀링겐령의 조력자들에게 불편함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지시를 제가 직접 종자들에게 전했지요. 그 사실을 잊고 홀란츠 공께 실례를 범한 것은 명백한 잘못. 그에 대해 공의 처분을 바라는 바입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소. 허면 나는 그것이 정말 홀란츠 샤이데만 남작에게 실례가 되었는지를 확인해봐야겠구려.”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답이 나와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오, 트라우스 경. 어쩌면 홀란츠 공은 자신의 장난으로 인해 종자들에게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러니 우선은 두 종자를 보내주시구려. 내 따로 홀란츠 공과 이야기한 뒤 처우를 말씀드릴 테니.”

“······알겠습니다. 허면 두 녀석은 돌려보내고,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트라우스와 함께 찾아가게 된 홀란츠는, 마차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내가 찾아온 것을 보자 반색하며 뛰어내렸고.

그렇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경쾌함에 안심하던 차.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꾸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솔직히 기분 나빴어요. 다람쥐 정도는 괜찮았는데, 감히 절 겁쟁이라고 불렀으니까요. 그것만큼은 용서가 안 돼요.”

“······하지만 홀란츠 공, 그것은 그대가 실전처럼 대결을 하자고 요청했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래도 정도란 게 있잖아요? 저는 그 아이들에게 정말 잘해주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갖지 못한 재능으로 나중에 훌륭한 기사가 될 아이들이라 생각해서, 선심을 써서 배려를 해줬던 거죠. 그랬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겁쟁이라뇨? 그건 종자 따위가 남작에게 해선 안 될 말이에요.”


그게 내게는 꽤 의외의 발언이었던 거다.

한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해지는.


신분제 사회가 만드는 폐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퓨전사극에서 반상의 법도로 인한 온갖 부조리들을 목도했고, 성인이 되어 넷플릭스 등에서 시청한 해외 드라마에서 유럽의 중세가 인간적이지 못한 사회였음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겉핥기 지식이었던 거지.

오랫동안 방랑한 끝에 튀링겐령에 임관한 몰락귀족들이라면 그와는 다를 거라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믿어버리고 있었다.


메리언 하베르츠는 내 생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과거의 조던 남작에게 크게 경도된 까닭이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배철러와 비슷한 신분인 메이지 에르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궁중의 예절에 대해 상세히 일러줬으니.

그렇기에 나는 성격 좋은 꼬맹이인 홀란츠 역시 신분을 내세워 남들을 핍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홀란츠 샤이데만은 꽤 괜찮은 소년이다.

또래 종자들과 자유로이 어울리는 동안 그들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았으니, 그 관계는 분명 순수한 우정이었으리라.

하지만 신분제 사회란 뿌리 깊은 선민의식의 세계관.

그 아래에서는 동심을 간직한 소년 남작조차 자기 행동을 ‘선심을 쓴 배려’로 해석해버리고 마는 듯했다.


그것을 깨닫고, 나는 트라우스를 돌려보냈다.

왕실 기사를 세워놓고 나누기에는 긴 대화가 될 것 같아서.

그 뒤에 홀란츠와 마부석에 나란히 앉아 물었다.


“홀란츠 공. 내 그대를 친동생처럼 여기고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나?”

“아, 정말요? 저는 너무 좋아요. 조던 공께서 편하게 불러주신다면, 메리언 아줌마에게 자랑할 게 생기는 셈이에요.”

“별난 자랑이로군. 허면 편하게 부르마, 홀란츠. 우선은······ 네가 종자들을 일벌백계하고자 함은 알겠다만, 다른 지점도 물어보고 싶다. 너는 약스와 조피가 앞으로 너를 어떻게 대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네게······ 마치 나를 대할 때처럼, 온갖 격식에 따라 허리를 숙여 보이길 바라느냐?”

“······그건······ 재미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야 제대로 대결도 못 해볼 거예요.”

“그렇지. 그럴 것이다. 헌데 어찌하여 그것을 요구하느냐?”

“그렇지만, 그게 법도에 맞는 일이니까요.”

“홀란츠. 법도에 맞는 일이란 무엇이냐?”

“법도에 맞는 일이란, 귀족이 귀족답고 기사가 기사답고 농노가 농노다운 것을 말하죠? 그렇듯 각자가 각자의 역할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사회가 안정되는 법이랬어요.”


그건 분명 타당한 이야기.

무리 짓는 동물은 무릇 그 책무와 권한에 합당한 자세를 견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체제가 혼란 없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부모가 아이처럼 무책임한 가정이나 상사가 신입사원처럼 어리바리한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는 진리였다.


그런 식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그 위치에 어울리는 성격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사실 의식적인 것조차 아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자기 계급에 맞는 행동을 하려 애쓰는 게 사회적 동물의 본능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시쳇말의 진정한 함의일 터였다.


인간은 지위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

신분제를 모조리 무너뜨릴 심산이 아니고서야, 그 체제가 강요하는 상하 고저의 법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부분을 생각하고 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고.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떠나, 홀란츠가 그들을 신분으로만 대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홀란츠. 너는 각자가 각자의 대우를 받는 일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맞느냐?”

“예, 조던 공.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허면 그렇듯 사회를 안정시키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모두가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예요. 귀족은 귀족답게, 기사는 기사답게, 농노는 농노답게, 그렇게 행동을 해야지만 장기적으로 행복한 사회가 된다고 했어요.”

“행복을 위해 네 귀족의 특권을 발휘하겠다는 말이냐?”

“예, 조던 공.”

“허면 모순된 일이로구나. 너는 분명 말했다. 약스와 조피가 너를 대함에 격식을 따지기 시작하면, 네 재미가 줄어들 것이라고. 그것은 근 며칠간 네가 누렸던 행복이 사라지리라는 뜻이지. 행복을 위해 행복을 지운다······ 그것이 과연 옳겠느냐?”

“······저 개인의 행복만 따지자면 모순이겠지만, 거시적으로 사회를 생각하면, 그와는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사회라는 것이 개인과 완전히 유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와 약스와 조피의 우정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가, 정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믿는다면······ 나는 네게 실망할 것 같구나. 어찌하여 제3의 길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들이 정해놓은 법도에만 구애되는 것이냐?”


홀란츠는 혼란츠가 돼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에 혼란을 가득 띄우고 날 바라보는 중.

영리한 녀석답게 내 말이 궤변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거지.

그리고 ‘올던의 천재’가 그런 궤변으로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 듯했다.


그렇지만 모든 궤변에는 궤변의 진리가 있는 법.

아직 세상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소년 남작에게, 나는 신분의 법도가 아니라 사회생활의 법도를 알려주고 싶었다.


“진실을 말해볼까? 너는 법도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존심이 상한 것뿐이지. 그간 좋은 친구라고 여겨왔던 약스가 너를 겁쟁이라고 부르자, 메이지 에르나가 나타났을 때 마차 안에 숨어만 있던 너 자신이 떠올랐고, 거기서 역린을 찔린 드래곤처럼 불쾌해지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그간 별 관심도 없던 신분의 법도를 들어 그들에게 너의 우위를 과시하고 싶어진 것이지. 그렇지 않으냐?”

“아니거든요? 저는······ 전, 그런 꼬마가 아니에요.”


뭐 이 세계에서라면 그 말도 맞겠지.

현대에선 고작 중학생 나이인 이 홀란츠조차, 튀링겐령에 모인 102명의 몰락귀족 중에서 가장 어린 축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건 그저 주어진 자리가 나이에 비해 높은 예외적 상황일 따름.

겉으로 드러난 태도라면 몰라도, 마음이란 것은 자리에 맞춰 만들어질 수 없는 법이었다.


“꼬마가 아니라니, 그 무슨 궤변이냐? 너는 아직 어리다. 신체의 나이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 영지를 제대로 다스려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서방으로 떠밀려온 처지가 아니더냐? 여러 어른들과 함께 어른스러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은, 이번 그림소설 사업이 처음일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홀란츠. 나는 그 경험의 부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음이야. 경륜이란 누구라도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은 나이가 들며 점차 지워지는 소중한 가치지. 내게는 내가 잃어버린 너의 순수가 좋아 보였단다. 약스나 조피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나 역시 그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 일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위와 아래를 아우르며 살아가고 싶다고. 내게는 굳은 뜻을 품어야 실천 가능한 일을 자연스레 이뤄가고 있는 네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단다.”


반발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란츠는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저는······ 저는 공처럼 되고 싶어요. 메이지 앞에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공주 전하나 왕자 전하 앞에서도 서슴없이 의견을 개진하는, 그런 존경받는 남작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종자들에게 몸을 지킬 무술을 배워두려 했던 거기도 해요. 하지만 그들에게 겁쟁이 소리를 듣는 채로는, 저는 존경받는 남작일 수 없을 거예요.”

“참으로 어리석구나. 홀란츠, 내 영리한 동생아. 잘 들어라. 겁쟁이를 겁쟁이로 만드는 것은, 징벌하지 않음이 아니다. 그보다는 용서하지 않음이지. 굳은 의지로 결심한 용서가 신분제에 기댄 징벌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생각해보렴. 네가 신분이 높은 누군가에게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가 그것에 쌍심지를 켜고 벌을 논한다면. 그가 과연 무섭게 느껴지겠느냐? 그보다는 불쾌한 심경도 극복하고 차근차근 법도를 일러주는 이가 훨씬 더 두렵지 않겠느냐?”

“아······ 그건······ 조던 공의 말씀이 맞아요. 얼굴을 붉힌 채 징벌만을 외치는 분은, 두렵지 않아요. 그저 억울하고 불쾌할 뿐일 거예요. 그와 같이······ 법도에 기대 얻는 권위란, 허술한 나뭇가지 울타리나 다름이 없을 것 같아요.”


하나를 가르치니 둘을 아네.

이런 수재조차 휘둘리고 마는 게 신분제의 무서움인 거지.

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세계를 바꿔가고자 하는 내게는, 홀란츠의 영리한 답변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이다. 법도가 생기고 사람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있기에 법도가 만들어지는 것이야. 그러니 법도를 배우기에 앞서 너 자신의 마음을 배우거라. 그리해야만 법도를 만드는 이들을 위해 네 행복을 희생하는 불상사가 없을 테니. 그리고 나중에는, 너 스스로 법도를 만드는 자가 되렴. 어떤 법도인들 완벽할 수는 없단다. 너와 같은 영리한 아이들이 의구심을 품고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사람이 아닌 법도의 폐해가 이 왕국에 비극을 불러올 것이야.”

“······네. 조던 공의 말씀을, 뼈에 새길게요. 그리고······ 약스와 조피에게 가서 말하겠어요. 내가 정말로 나 스스로를 겁쟁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고요. 그래서 그 말에 발끈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화가 풀렸다고요.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친근하게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요. 그러면······ 되겠죠?”

“모를 일이지. 네가 이미 화를 내버렸으니, 그 선심 쓴 배려는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아······ 네. 그 말씀이 옳네요. 선심 쓴 배려는 하지 않을게요. 그냥 솔직하게······ 아직 화가 안 풀렸다고 말하겠어요. 그렇게 하면, 어쩌면, 징벌 없이도 사과를 해줄지 모르니까요.”


이후 소년 남작은 곧장 두 종자를 찾아갔다.

나야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관심 두지 않았는데, 그 선심 없는 배려의 결과를 에르나의 전성 마법이 전해주더라.


[홀란츠 공!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공께서 영지를 탈출하며 크멜비츠군에게 겁쟁이라는 말을 듣고 분루를 삼키셨던 일이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감히 그런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이 주둥이를, 그냥 콱 쥐어박아 주세요!]

[너, 약스! 멍청한 소리 마라. 모르고 한 일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어? 나는 그냥,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해준 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조피, 네게는 이유도 없이 화를 낸 셈이 되겠구나. 나는 다람쥐 얘기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다만 네가 약스를 말려주지 않았기에, 거기에 속이 상했던 거야.]

[예, 홀란츠 공! 그렇듯 넓은 마음으로 진심을 말씀해주시니, 저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는······ 속으로 공께서 마음이 좁은 분이라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뭐? 감히 그런······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정말이지 멍청한 생각이었죠. 그때의 조피는 이제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홀란츠 공!]


“······음. 잘 해소된 것 같군.”

[응. 소년 남작은, 좋은 친구들을 얻게 됐어.]

“에르나, 그대도 메리언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걸세.”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응. 그랬으면 좋겠어.]


그랬으면 좋겠다.

내 곁의 동료들만은, 과거 헬무트가 자기 위신을 깎기 위해 연기했던 그 권위의식의 가면을 쓰지 않기를.

자리에 맞는 권리보다 자리에 맞는 의무를 먼저 갖추기를.

그것을 바라며, 나는 이후 식사 중인 홀란츠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려줬다.


이후 우리 일행은 벤펠트 성에는 들르지 않았다.

메리언이 자신의 옛 성에 들어서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의 사적인 의향이 공주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린드벨라와 푀일이 나를 진심으로 신용하기 시작한 까닭이겠지.


나는 그 높아진 위상에 걸맞기 위해 노력할 셈이다.

권한보다는 책무로.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성과로써.

그런 생각 속에서, 우리 일행은 마침내 뤼드게리아 왕국의 국왕령에 접어들었다.


작가의말

오늘은 조금 일찍 올립니다.

내일은 오전 중에 한 편, 밤에 한 편을 올려보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아껴주시는 독자님들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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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Chapter 15 – 암살자의 신조 (1) +2 22.10.30 907 44 16쪽
44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3.) +2 22.10.30 1,067 46 18쪽
43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2) +2 22.10.28 1,206 56 16쪽
42 Chapter 14 – 권리를 수복하는 법 (1) +1 22.10.27 1,322 70 17쪽
41 Chapter 13 – 사농공상 (3.) +14 22.10.26 1,401 91 16쪽
40 Chapter 13 – 사농공상 (2) +2 22.10.25 1,531 70 19쪽
39 Chapter 13 – 사농공상 (1) +4 22.10.25 1,713 83 16쪽
38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3.) +9 22.10.23 1,834 94 16쪽
37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2) +21 22.10.22 1,926 83 17쪽
36 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1) +8 22.10.22 2,097 88 15쪽
35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3.) +21 22.10.20 2,360 111 18쪽
34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2) +16 22.10.19 2,465 122 17쪽
33 Chapter 11 – 왕국의 몽상가 (1) +15 22.10.19 2,598 123 17쪽
»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3.) +12 22.10.18 2,767 144 19쪽
31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 +9 22.10.17 2,837 126 16쪽
30 Chapter 10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1) +10 22.10.16 3,027 146 16쪽
29 Chapter 9 – 갈등 조정 (3.) +15 22.10.15 3,169 159 18쪽
28 Chapter 9 – 갈등 조정 (2) +4 22.10.14 3,173 159 16쪽
27 Chapter 9 – 갈등 조정 (1) +14 22.10.13 3,441 164 16쪽
26 Intermission – 반상을 뒤엎는 법 +21 22.10.12 3,438 192 16쪽
25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3.) +13 22.10.11 3,326 174 16쪽
24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2) +10 22.10.10 3,336 142 17쪽
23 Chapter 8 – 마술사와 마법사 (1) +3 22.10.09 3,354 144 16쪽
22 Chapter 7 – 이벤트 알림 (3.) +4 22.10.08 3,358 135 16쪽
21 Chapter 7 – 이벤트 알림 (2) +2 22.10.06 3,475 133 14쪽
20 Chapter 7 – 이벤트 알림 (1) +4 22.10.05 3,745 137 15쪽
19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3.) +3 22.10.03 3,812 147 16쪽
18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2) +1 22.10.02 3,982 144 15쪽
17 Chapter 6 – 마음을 확인하는 법 (1) +2 22.10.01 4,211 162 15쪽
16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3.) +5 22.09.30 4,463 146 16쪽
15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2) +6 22.09.29 4,550 170 17쪽
14 Chapter 5 – 조던 남작을 찾아서 (1) +10 22.09.28 4,670 187 15쪽
13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3.) +11 22.09.28 4,702 222 17쪽
12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2) +15 22.09.26 4,772 200 16쪽
11 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1) +10 22.09.25 5,003 207 18쪽
10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3.) +5 22.09.24 4,995 206 18쪽
9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2) +7 22.09.23 5,074 194 16쪽
8 Chapter 3 – 중간관리자의 역할 (1) +17 22.09.22 5,073 202 16쪽
7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3.) +12 22.09.21 5,649 206 17쪽
6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2) +14 22.09.20 5,638 211 18쪽
5 Chapter 2 – 몰락귀족이 살아가는 법 (1) +8 22.09.18 6,046 215 15쪽
4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3.) +13 22.09.18 6,262 256 17쪽
3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2) +10 22.09.16 7,197 232 16쪽
2 Chapter 1 – 튀링겐의 군주 (1) +11 22.09.15 8,938 255 15쪽
1 Prologue – 상사를 설득하는 법 +21 22.09.15 11,721 27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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