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스승을 설득하는 법 (2)
귀어넬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건, 연회를 마치고 학장의 부름을 받아 내실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그게 졸음이 잔뜩 쏟아져서만은 아니었던 모양.
그는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며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저, 조던 공? 제가 정말 따라가도 괜찮은 것이겠습니까?”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 체제의 단면조차 알지 못하는 말학이라······”
“제가 백작 전하와 더불어 심오한 이치를 논하는 데 맞지 않으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측면도 있고······ 저는, 아직 공께 신용을 얻지 못한 처지이니······ 좀 더 스스로를 증명한 뒤여야만······”
그게 참 재밌는 스탠스인 거지.
나와 귀어넬을 함께 부른 건 학장의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년은 아직 내게 자기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음을 염려하며 쭈뼛거리는 중.
거기서 뤼드게리아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조던 남작이 갖는 위상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돌.
덩치에 안 맞게 염소 수염 삐죽하니 난 외모긴 하지만, 이미 농노 투표제를 비롯한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고 그중 일부를 실제로 올던령의 성세로 증명해낸 인물이다.
체제에 갇히지 않은 소년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겠지 뭐.
그렇기에 학장의 허락보다도 내 승인 쪽에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인데······
순간적으로 나중에 보자고 얘기할까 싶기도 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나면, 귀어넬은 내가 뤼드게리아 좌파의 아이돌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될 테니까.
열네 살 소년에게 그렇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게 어른으로서 해도 될 일인가 고민이 되더라고.
다만 나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슬슬 알릴 건 알려야지.
언제까지고 조던 남작의 그림자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루디어의 동생에게는 내 변화를 보여줘도 될 듯했다.
“가시지요, 귀어넬 공. 흥미로운 대화가 될 것입니다.”
“아······ 그런가요?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조던 공. 저는, 사실은 이런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장께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던 조던 공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날을······.”
“학장께서 그러셨습니까?”
“예. 말이 통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면, 늘······.”
그렇다고 한다면 메리언이 날 본받다가 영지에서 쫓겨난 일에도 그의 영향이 컸을 것 같다.
지금의 권력이 어떻건 학장은 인류 전체의 존경을 받는 노학자니까.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놈 촘스키 포지션.
그런 이가 격찬한 인물이니, 뤼드게리아의 신진 귀족 중에 조던 남작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을 법도 했다.
그 점은 이색-정도전과는 좀 다르다고 봐야겠지.
이색은 제자들을 칭찬하기보다는 교만을 경계하고자 엄하게만 대하는 스승이었다고 전해진다.
정도전 역시 스승이 고려파의 수장으로서 혁명파에 반대하고 나선 이후로는 완전히 선을 그었다고 하니, 밤새 토론하며 이견을 좁히곤 했다는 아데나워-조던과는 다른 점이 더 많을 터였다.
각자의 의견 역시 그쪽 사제지간과는 정반대.
학장과 남작은 오히려 스승 쪽이 파괴적이고 제자 쪽이 온건적이었다.
애초에 체제를 뒤엎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부터가 온건파와는 거리가 있긴 한데, 어쨌건 사람의 목숨을 두고 저울질하지 않았다는 건 조던 남작도 꽤 순수한 소년이었다는 얘기.
내게는 이제 그 올곧은 스승을 설득해서 이색의 온건으로 끌어가야만 할 사명이 생긴 셈이리라.
그 스승 쪽은, 내실에 들어서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화를 내거나 칼을 뽑아 든 건 아니고.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슬픈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조던······ 내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너의 그 착해 빠진 방식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가 없음을.”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테이블 위의 소음 발생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설마 왕국의 스승을 상대로 염탐을 할 간 큰 위저드야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세상일 혹시 모르는 법이니까.
“나의 스승, 카를이시여.”
“그래, 조던.”
“혁명이란 무엇입니까?”
“혁명이란, 네 말에 따르자면,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이 시대의 인류가 추구해야만 할 현실의 진보적 변혁이다.”
“인류의 미래란 무엇입니까?”
“그 역시 네 말에 따르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하가 존재하지 않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알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왕이나 대주교나 선지자나 현자가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거 참 사회주의 같은 얘기긴 한데.
그건 그렇다 치고 하나같이 내 말에 따르시네.
뭐 예상했던 대로긴 하다.
설마 백수도 넘은 할아버지가 자기 머리로 체제의 구습을 인지하고 그것을 타파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리 없는 일이니까.
인간은 젖어드는 동물이다.
주어진 권리에 만족하고,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고, 그러면서 하루하루 행복을 만끽하며 살라고 설계된 존재.
그 안에서 스스로 혁명론을 떠올릴 만한 인물이라면 100세가 되도록 아무것도 안 했을 리 없다는 거지.
그러니 왕립 아카데미의 장을 변화시킨 건 조던 남작이다.
그의 황당무계하지만 논리정연한 말 하나하나가 그 노학자의 굳어 있던 머릿속을 깨뜨려, 마침내 자신의 커다란 지혜로 소년 혁명가를 지원하게 만들었으리라.
그 변화가 자연스레 엘리시아나 귀어넬로도 이어진 셈.
결국 단 한 명의 소년이 이 왕국에 반체제 반동분자의 싹을 심는 데 성공한 셈이겠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한 일이긴 해.
그저 남들의 한두 마디 평가가 아니라 조던 남작 본인의 수기를 좀 읽어보고 싶은 부분.
하지만 그것들은 전란 속에서 버려지거나 불쏘시개로 이용됐다고 하니, 나는 그저 조도원 대리로서 그의 순수를 부숴나가야 할 따름이었다.
알고 있으니까.
인류가 몇 세기를 더 진보하고 진보한다 해도, 그 끝에는 영원불멸한 차별주의가 실존할 수밖에 없음을.
“카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알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도, 왕이나 대주교나 선지자나 현자가 지배하지 않는 세상도 도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냐? 인류가 반복해 서로 반목하고 더 위로 올라가려 애쓰는 것은, 세속의 권력과 신앙의 권력과 마법의 권력이 세 발을 가진 솥처럼 서로를 지탱하는 형상을 이뤘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렇기에 그 한 축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악의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대륙의 체제 역시 붕괴하리라고, 우리가 이미 합의를 이루지 않았더냐?”
오······ 삼국진데?
국가의 논리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유사점이 있다.
원래 1:1의 대립은 손쉽게 무너지는 법.
하지만-위, 촉, 오가 그랬듯-왕과 교단과 마법학회라는 세 종류의 힘이 서로 합종연횡처럼 돕고 견제하길 반복하면, 결과적으로 세 권력이 모두 장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지.
하지만 조던 남작은 핵심을 잘못 본 거다.
너무 순수했어.
악의의 씨앗이 어딘가에 따로 있으리라는 그 생각이야말로 나이브한 태도의 극치였다.
“카를. 악의의 씨앗은 인간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선하고 무척 자주 악한 존재. 그렇기에 왕이 사라져도 독재의 가짜 왕이 생겨납니다. 신들이 사라지면 가짜 신들이 득세합니다. 마법사들이 사라지면, 그 빈자리를 온갖 협잡꾼들이 메우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는 인류를 유지하기 위해 악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너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학장의 혼란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순수가 꼭 조던만의 전유물은 아닐 테니까.
이곳은 무려 열세 명의 신이 실존하는 세계란 말이지.
지구에선 있는지 없는지 모를 한 유일신만으로도 인류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치켜세우는 인간이 넘쳐났는데, 다신교가 자리 잡은 이 세계에서라면 인간이야말로 신들의 품성을 갖춘 존재라고 믿지 않을 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곳은 성선설의 세상.
사람이 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남아 있는 시대다.
식민지배와 세계대전과 독재정권들을 주입식으로 배우며 성장한 나와는, 관점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듣던 귀어넬의 떡 벌린 입만 봐도 그래.
쓸데없이 잘난 탓에 친형을 죽게 만들 뻔했던 꼬마는, 인간이 인간 자체로는 선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볼을 떨고 있다.
그러니 알려줘야지.
그들이 가려고 했던 길의 끝을.
모든 순간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거로 기억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꿈과 같은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을.
나는 그렇기에 처음으로 지구를 입에 담았다.
“꿈을 꿨습니다. 드높은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하늘을 가린 세상이 눈앞에 있었고, 인류는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배를 타고 대륙과 대륙을 넘었습니다. 그 세상에는 신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혁명 덕분이었지요. 처음에는 귀족들이 왕권을 무너뜨렸고, 이후에는 부유한 자들이 귀족권을 무너뜨렸고, 이후에는 선량한 자들이 노예제를 무너뜨렸습니다. 나중에는 만민이 평등하게 학문을 배우며 신관과 마법사의 권위마저 보잘것없어진 세상이었지요.”
“신탁······! 조던, 너는 신탁을 받은 게로구나!”
이 세계의 신탁이란 신에게 선택받은 신관들의 경험이다.
주로 신이 나타나서 몇 마디 말을 해주는 식의 백일몽을 꾸고 나서, 그에 합당한 기적의 힘이 몸에 깃들게 된다고.
나야 기적은 쓸 줄 모르니 그쪽과는 무관하지.
그렇지만 빙의 전의 지식을 이야기하기에는 오해를 조장하는 편이 나을 법했다.
“모를 일입니다. 그저 본 것을 말씀드릴 뿐. 카를이나 귀어넬 같은 현인들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그 평등사회에는······ 그러나 차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학력을 계급화하고 사는 지역을 계급화하고 가진 바 재산을 계급화했습니다. 피부색을 혐오하고 태어난 지역을 혐오하고 나중에는 성별마저 혐오했습니다. 만민의 투표를 통해 등극한 입헌군주국의 재상들조차, 남을 차별하는 본능적인 재미를 잊지 못해 비열하고 무식한 방식으로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을 뽑은 이들이 그들의 행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종국에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낄낄대는 이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던 혁명의 종착지입니다.”
“어찌 그럴 수가······ 어찌 그런, 신들께서 노하실 일이······”
“저는 그렇기에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정말 그뿐인 존재인 걸까. 우리가 무수한 피를 흘려 얻어낼 가치가 고작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게 아니면······ 애초에 무수한 피를 흘려가며 일궈낸 혁명이기에, 그 정도 끝밖에는 주어질 수 없었던 건 아닐까.”
“······피의 대가는, 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백작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해서, 급히 몸을 붙잡아 의자에 앉혀줬다.
노인은 노인이란 말이지.
정기적으로 성녀 루드뢰브나가 찾아와 질병의 씨앗-아마도 혈전 등의 위험요소까지 포함할-을 없애주고 있다곤 하지만, 허탈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닐 터.
그렇기에 앉힌 자세 그대로 이번엔 긍정적인 이야기를 건네줬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반가운 일입니다. 그것이 정말 이 역사의 종착지라고 한다면, 방법을 바꾸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그 미래 속에서 배운 것을 응용해보려 합니다. 아성보다 높다란 건물의 건축법이나 하늘을 나는 배의 건조법이 아니라, 실패한 혁명들을 재해석함으로써요.”
“실패한 혁명······ 네가 본 미래에는, 목표에 닿지 못한 시도가 많았더냐?”
“예. 최초의 혁명 이후로 무수한 시행착오가 이어졌지요. 거기서도 또한 어마어마한 피가 흘렀고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런 무장봉기가 아닙니다. 정치. 이른바 사회생활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생활이라······. 관료들이 그런 단어를 쓰는 것을 들어보긴 했다만, 그것을 어찌 혁명과 결부시킬 수 있단 말이냐?”
그건 한국인들이 말하던 ‘사회생활’과 별다를 것 없는 단어.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가 출신 관료들이-지구로 따지자면 젠트리라고 할 수 있겠는데-자기들끼리 하는 얘기다.
그들 사이에서 위에 올라서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처세술 이론.
나는 그 정점에 정도전의 뜻을 세워볼 셈이었다.
“인간은 욕심쟁이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선하고 주로 악하지요. 보편적으로 욕심의 대상은 수량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만인의 욕심을 채워줄 수 있는 처세술을 갖춘다면? 그를 통해서 만인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면? 그 방법론이 바로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인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듣기는 좋은 말이다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예. 몇 가지 조건이 달성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봅니다. 일부는 이미 궤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데려온 한스와 에르나라는 아이들이 그 한 축이지요. 여기 계신 카를, 그대 역시 또 하나의 축이 되실 것이고요.”
삼봉이 자신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제멋대로였던 지방 호족들의 전횡을 완벽히 통제할 왕권이었고, 둘째는 그 왕권의 남용을 잘 제어할 만큼 현명한 정승이었고, 셋째는 만민평등 바로 전 단계의 민본주의를 왕국 전체에 퍼뜨릴 만한 성리학적 사상 인프라였고.
그걸 뤼드게리아식으로 번역하자면 중앙집권과 재상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중 첫째 조건이 이미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헬무트 왕자가 시타델을 장악하고 그 힘이 왕실의 지지세력이 돼준다면, 중앙집권은 자연스레 이뤄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둘째인 먼치킨 재상은 명성 자자한 학장의 조력을 통해 이뤄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제자 중 누군가에게 내 미래 지식을 가르쳐 혁신적인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게 이끈다면, 세 공작조차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철인의 시대를 이뤄갈 수 있으리라.
물론 거기까지는 그저 잠깐의 태평성대일 뿐.
제도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한 미완의 혁명에 그친다.
그리고 그 제도 측면의 변화를 일궈내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신성이었다.
이 대륙 전체를 움직이는 명분정치의 대전제가 바로 신들의 율법이란 말이지.
그걸 해석하고 성서로 출간하는 교단들이야말로 중세 유럽의 신성로마제국과 같은 최종 권력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실질적인 영향력이 명백히 드러난 게 10년전쟁이라는 비극.
그들을 움직이는 자가 대륙을 쥐게 되리라.
내가 서야 할 위치는 바로 그런 지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신성이야말로 학장을 설득할 관건.
학장이 내 혁명론을 첨삭하며 모든 귀족을 죽이거나 유폐하는 일이 필수라고 조언했다면, 그건 그 귀족들이 구세대의 법도를 잊을 수 없는 수구 세력인 까닭이다.
그는 이를테면 김씨 일가를 처단하지 않고 북한을 자유화할 수 없다는 논리로 유혈의 혁명을 권장했을 터였다.
그런 측면에서 신성을 장악해 욕심쟁이 귀족들조차도 그 폐해를 함부로 타인에게 뿌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
만약 모든 신들의 교단을 설득해 신들의 율법을 재해석한 그림소설을 널리 퍼뜨린다면, 공작들조차 거부하지 못할 명분이 확립될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내가 과연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기적의 소유자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나는 그 지점을 스승을 통해 확인할 셈이었다.
“카를. 늘 그랬다시피, 그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어떤 이가 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녀의 입을 통해 신들의 지혜를 가진 자라 인정받는다면, 교단의 대주교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겠습니까?”
“루드뢰브나······! 너는 그녀를 통해서 신성을 얻으려는 것이로구나!”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그 아이가 나를 은인으로 믿고 따르고 있으니, 네가 정말로 신탁으로 먼 미래의 지식을 얻게 되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게야. 아주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수기는 하겠다만······”
“그조차 해낼 수 없다면 혁명은 꿈꾸지 말아야 하겠지요.”
거기까지 듣고 나서, 학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엿새 후에, 그 아이가 왕도에 올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예, 카를. 늘 그랬듯,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나와 카를 아데나워의 첫 만남.
그리고 창칼 없는 혁명의 새 약속이 이뤄진 날이었다.
- 작가의말
* 파드드님, 부족한 소설에 추천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 이번 챕터는 제가 생각하는 사회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담은 한 편이 되겠습니다.
그저 내 한 몸 잘살자고 남 짓밟으며 상사에게 아첨 떠는 이기심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뻔한 소녀를 구하고자 필사적인 연기로 칼을 쥔 자의 마음을 돌릴 줄 아는 의기.
그렇듯 사랑의 마음으로 내 주변의 날선 마음들을 중재하려 노력하는 따뜻함.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처세술의 시작이며 언제고 다다르게 될 처세술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게는 세상 제일 재밌는 챕터라서, 당연히 독자님들께도 제일 재밌는 클라이막스로 보이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어떤 분들께는 역으로 세상 제일 재미없는 전개로 보였던 듯해 가슴이 아프네요.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작가와 부족한 필력이 결합되어 낳은 비극이라고 봐야겠지요.
어찌됐건 계속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연재시각을 회복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