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핑크 프린세스 (1)
“와······ 진짜 성세가 엄청나네요. 과연 서방의 보석. 이만큼이나 많은 관료와 기사들을 모은다는 건, 베르딜란트의 공작께도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여기는 이런 인원이 성내에 상주하며 매일 모여서 서로를 만난다는 거죠. 정말 대단해요. 상업이란 게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새삼 느끼게 되네요.”
뜰에 모인 300여 명의 준귀족들을 바라보며 홀란츠는 그렇게 논평했다.
동방의 작은 남작령을 다스리던 소년에게는 꽤 장관이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서울에서 매일 수만 명의 유동인구를 봐왔던 내게는 별 감흥 없는 일이라, 18인의 소년 남작들이 뿌리고 있는 소책자의 반응 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것이 그 300세드마짜리 사업이라는 거군요.”
“그렇지. 소개용 소책자라곤 하나, 가슴이 뛰는군.”
“그나저나 그림소설이라는 신조어는 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하시죠? 저도 그런데······ 슬쩍 보면 안 될까요?”
“어허. 길에서 함부로 책을 폈다가 무슨 뒷말을 들으려고? 업무가 끝난 뒤에 집에 가서 읽어보게.”
관리들의 경우엔 소책자를 펼쳐 읽어보며 감탄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게 양피지 시대의 관습 때문이라더라.
500년 전까지만 해도 양 한 마리를 잡으면 고작 한두 페이지만이 나오는 양피지가 종이의 주류였던지라 책 하나하나가 진귀한 보물이었다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은 집 안에서만 읽는 것이다’라는 일종의 매너가 만들어졌고, 면섬유지 공장들이 들어서 종이가 흔해진 지금도 밖에서 책을 보면 고상하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는다는 듯했다.
귀족가의 서자 등 일종의 젠트리 계급인 궁정 관리들이 소책자를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는 게 그런 까닭.
그들에 비하면 농노나 자유민 출신이 대다수인 스콰이어들은 훨씬 개방적이었다.
“야, 너 저거 봤어? 어땠어? 어떤 느낌이었어?”
“선배들한테 금방 뺏겨서 잠깐밖에 못 봤는데······ 장난 아니던데? 어이, 롬. 너도 봤지?”
“봤지! 그림들이 엄청 멋지던데?”
“그렇지? 하늘을 나는 새의 시야로 내려다본 장면이 진짜!”
“그것도 좋았지만, 난 위에서 내려다본 군대가 최고였어.”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대체 어떤 그림인 거야?”
“넌 이따 막사 가서 봐. 롬, 또 다른 것도 봤어?”
“또, 어깨 뒤에서 몬스터들을 보는 장면에서는 눈이 안 떨어지더라. 정말 내가 전장에 서 있는 것 같았어.”
쟤네는 글보다는 그림에 집중한 모양이지.
스콰이어는 인원이 많아 두 명당 한 권꼴로 나눠줬는데, 그래서 신참들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뺏긴 듯했다.
아직 글자 읽는 데 익숙지 않아 제대로 이해도 못 할 그룹이라 큰 상관은 없을 듯.
어쨌거나 그림만으로도 호평이 대단하더라.
아직 만화적 구도는커녕 소실점을 활용한 선 원근법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세계인 까닭.
그래서 내게 최신 기법들을 전수받은 페어의 그림이 거의 아이맥스 3D영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런 감상평 외에 사소한 수다들이 나오기도 했다.
“어흠. 하지만 몬스터들의 묘사는 좀 어색하더라.”
“오, 데인! 그랬어? 내가 볼 땐 괜찮던데?”
“어허. 롬, 감히 데인 어르신께 반기를 드는 거야? 데인 어르신, 고견을 가르쳐주시지요. 어떤 게 어색했습니까?”
“어흠 어흠. 콜레옵테라를 말한 것이니라. 지난 토벌전에서 활약한 이 어르신께서는, 직접 그놈들을 상대해봤지. 그래서 아는도다. 그놈들은 돌진할 때 배딱지를 드러내지 않아.”
“하핫! 야, 한 마리 상대해보고 뭘 안다고 그래? 다른 놈들은 배딱지 까고 달려들 수도 있는 거지.”
“어흠! 롬, 네놈이 감히 반항을 하느냐? 나는 저기 저 조던 공과 함께 말을 달렸던 사이니라.”
“뻐기기는. 정말 친하다면 가서 인사라도 해보시지?”
“그······ 그것은 공께 실례가 될 수 있으니, 다음 기회에.”
“하핫! 이런 허풍선이!”
일전에 날 저택까지 안내해줬던 데인 그라스는, 그들 사이에서는 리더십 있는 개그캐인 모양.
콜레옵테라 관련 지적은 귀담아들을 건 못 된다.
나이 많은 남작들이 몬스터에 빠삭한 건 아니라지만, 초반부 전투씬은 전부 배너렛(상급기사)인 덤펜에게 자문을 구해서 그렸으니까.
그냥 자기들끼리 떠들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거지 저건.
그런 화제성도 만화의 특징 중 하나다.
깊이 있게 정독한 이들이 아니면 긴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소설과 달리, 겉핥기식으로만 읽더라도 여러 감흥이 생겨 마구 수다 떨기 좋다는 거.
그거야말로 내가 이 세계에서 그림소설이 유행하리라고 확신한 근거였다.
정말이지 뭘 떠들 게 없는 시대상이란 말이지.
인터넷도 매스미디어도 없고, 그나마 있는 게 책인데 그건 대체로 고리타분해서 청년층에는 잘 안 맞는 거다.
그래서 젊은 귀족들에겐 가끔 찾아오는 음유시인이나 극단 정도가 최고의 유희라더라.
지구의 중세에 매일 파티 열고 정원에서 정사 나누는 향락 문화가 발달했던 게 그런 환경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처음 보는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현대적인 스토리 전개가 어우러진 만화를 보면 눈이 돌 수밖에 없다.
그냥 보는 순간 빠져드는 마법의 책이랄까.
일단 한 지역에서 한 명이라도 그림소설을 읽는다면, 적어도 한 달 안에 그곳의 모든 이들이 정복왕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할 법했다.
그 기분 좋은 예상 속에서, 마침내 궁정 내의 조회가 끝나 진짜 귀족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평기사인 배철러 40여 명과 상급기사인 배너렛 세 명이.
그리고 튀링겐의 뉴페이스 등기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열한 명의 남작들이.
그 뒤에서 루디어가 비칠거리며 걸어 나왔다.
“나는 루디어 공에게 가보겠네. 홀란츠 공, 그대는 저쪽 가서 마저 소책자를 전달하게.”
“예, 조던 공.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열한 명의 남작들과 목인사를 나누며 느낀 분위기는, 약간은 어색하고 찜찜하더라.
저들 역시 전쟁 시기에 흘러든 몰락귀족들인 탓.
개중에서 가장 입성이 늦었던 내가 갑자기 큰 사업을 맡아 무려 백여 명의 다른 몰락귀족을 지휘하게 됐으니, 그게 경계가 되고 질투가 나고 그러는 거지.
현재 공주를 모시고 있을 랄 자작과 함께 앞으로 사회생활을 잘해야 할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상사인 루디어 쪽.
오랜만에 조회에 들어갔다 온 그의 표정이 영 안 좋더라.
그래서 혹시 일이 잘 풀린 된 건지 걱정됐던 건데, 덤펜의 말을 들어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다 잘됐습니다, 조던 공. 의심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중하게 환영 행사의 성공을 장담하셨지요.”
“그렇군. 루디어 공,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 응. 고맙네, 조던 공.”
“낙심하신 게 아니라 진이 빠지신 모양이군요.”
“그런 느낌이지. 음······ 죽을 것 같네. 수십 명이 나만 쳐다보면서 꼬투리 잡을 거 없나 하고 있는데······ 진짜 죽겠더군.”
“그렇군요. 그 분위기 그대로 이어가시죠.”
“응? 뭘 이어가나? 난 좀 쉬고 싶은데.”
“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작업장으로 갈 겁니다. 홀란츠 공을 비롯해 과거 상위 귀족의 영지에서 왕족의 환영 행사를 본 적이 있는 남작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학습하시지요.”
“그······ 그건 내일 좀 하면 안 되겠나?”
“안 됩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성밖으로 나가 행사의 세부적인 식순을 숙지하셔야 하니까요. 그 일정도 밤이 깊어서야 끝날 겁니다. 쉬실 시간은 없다는 얘기지요.”
그 말에 죽상을 지은 루디어였지만, 이후의 절차에서는 나름대로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게 다 믿음의 힘인 거지.
천재로 유명한 동생보다도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주는 부하직원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내게도 꽤 도움이 됐다.
아직은 역사서 위주로만 공부 중인 상황이라, 요 근래 대귀족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 같은 정보는 꽤 유용했던 거.
특히 왕권신수설에도 불구하고 권신들 사이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뤼드게리아 왕족에 대한 얘기가 흥미진진했다.
그쪽 설명을 맡은 메리언 하베르츠가 언변이 꽤 좋더라고.
“정복왕 폐하의 재위 이후로 왕국은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가 없죠. 그런 탓에 왕가의 직할령은 계속해서 줄어들었어요. 무역을 성공시키거나 상급 몬스터를 토벌하는 등 공을 세운 이들에게 계속해서 영토를 나눠줘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왕가의 금력이 계속 줄어들었고, 점차 왕도 인근의 대귀족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셨던 거예요. 루디어 공, 이런 얘기는 처음 들으시죠?”
“어흠! 그럴 리 있겠나? 다 잘 알고 있지.”
“네, 다행이네요.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내용이라 걱정했던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제가 좀 민망한걸요? 조던 공께서는 너무도 잘 알고 계실 이야기라, 황소 앞에서 덩치 자랑하는 기분도 좀 들어서······”
“메리언 공,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네. 나라고 해서 학습한 모든 것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을 리 있겠나?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서로의 정보를 나누기 시작한 건, 개인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까닭이지. 루디어 공께서도 튀링겐으로 돌아오신 지 오래되어 왕가의 정세를 명확히는 떠올리지 못하실 걸세. 상세하게 찬찬히 설명 올리게나.”
“아······ 네, 조던 공. 배려의 말씀에 깊이 감사드려요.”
청년 남작들이 포진한 2조의 조장인 메리언은, 왕도와 인접한 비트호펜 공작령의 가신 출신.
102명의 남작 중 유일하게 적국이 아니라 공작에게 토지를 몰수당해 쫓겨난 신세라고 했다.
그래서 재색을 겸비한 인물임에도 임관이 어려웠던 거라고.
어쨌거나 왕도 인근의 영지를 다스렸던 인물인 만큼 그쪽으로는 정보가 빠삭하더라.
“그래서 1왕비 전하부터 3왕비 전하까지가 모두 왕도 인근 공작들의 친척이시죠. 각자가 자기 쪽 왕비의 소생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있어요. 한편 4왕비 전하께서는 입지가 그만큼 단단하지 않아요. 왕령 행정관인 마테르트 백작의 소생이셔서, 다른 왕비들에 비해 입지가 한참 부족한 거죠. 공주만 둘이신 게 차라리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왕자를 낳으셨다면 경계가 더 컸을 테니까요.”
“하지만- 음.”
“루디어 공,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음······ 그러나, 아카데미엔 공주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네.”
“물론 그랬겠죠. 주로 변방 백작가의 자제들이 다수 몰려 보필하더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맞나요?”
“음, 그렇더군.”
“그들이야 어차피 왕도와는 연이 없는 변두리 귀족이에요. 공작가의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할 수 없는 외부자 입장이기도 해서, 한쪽 줄을 잡는 것보다는 거리를 두는 편이 유리하죠. 그런 의미에서 4왕비 전하 쪽 줄을 잡고 싶어하는 거예요. 대귀족들에게 있어서 4왕비의 공주들이란, 실용성은 없어도 제법 예쁘게 빛나는······ 트로피니까요.”
메리언이 왕비에 대한 능멸일 수도 있는 얘기를 쉽게 꺼내는 건, 그 대귀족에게 영지를 빼앗긴 억울함 때문이려나.
뭐 나름대로 생각할 거 다 하고 하는 말이겠다만.
어차피 설명을 듣는 나나 루디어나 왕가에 감사할 게 많은 입장은 아니고, 메리언이 불경죄로 잡혀간다면 그녀와 함께 일하던 우리에게도 괜한 불똥이 튄다.
그러니 없는 자리에선 왕족도 깔 수 있는 거지.
다만 그 내용 쪽이 영 신경 쓰이더라.
실권 없는 왕가에서도 4왕비가 특히 영향력이 없다는 게.
그런 4왕비의 둘째 딸이 이 튀링겐에 온다는 게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려나?
“메리언 공. 그런 상황에서 린드벨라 공주가 이곳으로 오는 이유를, 그대라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겠지?”
“네, 조던 공. 그걸 제가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편히 말해보게. 루디어 공 역시 알 건 알아야지.”
“네······ 그러면 감히 말씀 올려보겠습니다. 이번 방문은 왕가 전체의 뜻은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세 공작이 동의한 일은 아닐 거라는 얘기죠. 아마 현 국왕 폐하와 왕령 행정관 마테르트 백작께서 왕가의 힘을 키우고자 은밀히 보내신 게 아닐까 싶어요. 왕도에서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공작들마저 위협할 만한 금력을 가진 유일한 백작가니까요.”
루디어는 눈만 끔뻑거리고 있지만, 내겐 바로 이해가 됐다.
말하자면 인근 권신들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변방의 라이징스타인 뢰프 백작가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얘기.
그 추측이 맞다고 하면, 이번 린드벨라 공주의 방문이야말로 튀링겐령의 미래를 좌우할 일대 사건일지도 몰랐다.
외척에 대항하고자 다른 외척을 끌어들이는 건 지구의 역사에서도 참 흔했던 일이다.
크게 보면 아관파천 같은 외세 문제도 비슷하고.
호랑이를 내쫓으니 여우가 설친다는 격언도 있긴 하지만, 힘없는 왕가로서는 호랑이에게 모든 걸 빼앗기기 전에 여우와 딜이라도 해보는 게 당연하다는 거지.
뢰프 백작가가 바로 그 차세대 여우로 선택받은 거라고 보면 될 듯했다.
다만 메리언의 말투를 보면 그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상황은 아닌 모양.
이쪽이 전적으로 협력한다면 나름대로 승산은 있는 눈치다.
다만 그게 옳은 선택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메리언 공, 관건은 엘리시아 전하가 아니겠나?”
“네, 조던 공.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국왕 폐하께서 정말로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리고 그 계획이 성사된다고 하면, 다음에 제위에 오르게 될 인물은 엘리시아 공주 전하가 되겠죠.”
“그렇지만 튀링겐으로 오고 있는 건 린드벨라 공주지.”
“네. 결국 힘은 빌리되 모든 걸 내주지는 않겠다는 얘기 같아요. 아마 엘리시아 전하는 왕가의 먼 친척과 혼인하게 되시겠죠.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튀링겐의 힘으로 권신들을 억제하고, 순혈의 아이를 낳을 여왕을 앞세워 정복왕 시절의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그런 방향의 발상이 아닐까 해요.”
“마, 맙소사. 그게 대체 무슨······ 왕가의 권력 다툼에 우리를 이용하려 한다는 거야? 그건 너무, 치사하잖나?”
“네, 루디어 공. 치사한 일이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백작가는 많은 걸 얻을 거예요. 아마 지금은 몰락한 트레겐 후작처럼 변경의 지배자로 승작하게 되실지도 모르죠.”
“후작······ 변경의 지배자······는 모르겠고,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그런 일로 오는 거라면, 환영하고 싶지도 않네.”
메리언은 이 망나니가 웬 평화주의자 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루디어의 여린 속내를 아는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발언.
슬슬 자리를 정리할 때가 된 셈이겠지.
“루디어 공. 이것은 그저 공을 모시는 수하들이 여러 조건을 따져 가능성이 큰 경우의 수를 이야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미리 확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께서는 공주 전하를 환영하는 일에만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메리언 공의 말대로 된다고 해도 꼭 많은 피가 흐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 회의를 끝으로 그날의 일정이 마무리되고.
이튿날이 되어 루디어와 함께 환영 행사 준비를 시찰할 때까지도 나는 고민을 이어갔다.
이 튀링겐이 위기를 넘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건 린드벨라가 온 뒤에야 확인할 수 있을 관건들과 이래저래 엮인 문제라, 당장 답을 내기가 힘들더라.
그런 생각들 속에서 또 하루가 흐른 뒤.
마침내 린드벨라 공주의 행렬이 흙먼지와 함께 도착했다.
핑크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애를 선두에 둔 채로.
“쟨 진짜······ 저게 무슨 공주냐고. 안 그런가, 조던 공?”
“······무슨 의미십니까, 루디어 공?”
“그냥, 말 그대로의 의민데? 공주가 선두에서 말 달리면서 이랴 이랴 하는 게, 희한하잖나. 쟨 치마도 잘 안 입는다네. 자기 꿈은 왕국 배너렛이라면서 나한테 결투를 신청하곤 했지. 나야······ 남자로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예, 루디어 공. 물론 그러셨겠죠.”
“······물론, 쟤가 칼을 좀 잘 쓰긴 하지. 마테르트 백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이라나? 하지만 나도 뢰프의 검을 익힌 몸. 진심으로 싸웠다면 결코 지지는······ 지지는 않았을 걸세.”
열여섯 꼬마의 자존심은 지켜줘야 할 일이겠다만······
이거 진짜 골치 아파지네.
세상에 천연 핑크 헤어가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나한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그 공주가 심지어 왕의 상급기사를 꿈꾸는 선머슴이라니.
그간 생각해온 전제들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더라.
어쨌거나 그렇게 충격 속에서 우리 행렬 앞에 도착한 린드벨라 공주는, 예법 따위는 엿 바꿔먹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와. 진짜로 여기 있었네, 조던 공?”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응, 안녕. 초면에 미안한데, 언니한테는 왜 그랬던 거야?”
“그게······ 송구합니다.”
“송구는 무슨. 두고 봐. 내가 언니를 위해서라도 조만간 단단히 따져 물을 거니까. 앞으로 처신 잘하라고.”
“······조던 공? 엘리시아 공주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디어가 속삭인 질문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조던 조던 남작, 너 대체 공주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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