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에는 신뢰로
그녀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이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 맞아.”
“혹시나 묻는 건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고 있던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2주 동안 긴 기간을 두고 초청해 본 거잖아. 보통 일이 잘 되고 있어서 바쁘면 갑자기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시간을 낼 수 없거든.”
“···”
“그것과는 별개로···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진짜 하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고 있던 것 대신 나에게 고용 돼줬으면 좋겠어. 같이 지내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됐잖아? 내가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어떤 대우를 받는지 말이야.”
미셸 키티와의 경기 전에도 이미 그녀는 미국 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지만.
이번에 화끈한 경기를 풀어내고, 또 그 와중에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그녀가 플라이급 12위에 올라서게 됐지만.
관심받는 거만 따져본다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체급의 챔피언에게 쏠리는 관심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역량으로 봤을 때, 지금보다 앞으로 성장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선수이기도 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응. 말해.”
“만약 내가 고용된다면, 나는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는 거야?”
“여러, 가지 일 것 같은데? 보드가드 겸, 운전사 겸, 보조 코치 겸··· 겸.”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보조 코치 다음에 뭐라고?”
“못 들었으면 됐어. 두 번은 말 안 할 거야!”
나는 강혜린이 괜히 심술부린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대답에 궁금한 것을 이어서 질문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날 활용하기 위해서 고용한다는 거네?”
“응.”
“하지만 기존에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이 이미 존재하잖아?”
“응.”
“그런데도 내가 필요해?”
말이 좋아서 보디가드, 운전사, 보조 코치였지 무언가 딱 정해진 것 없이 옆에서 도와주는 인원이 굳이 필요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응, 이왕이면.”
답변이 들리는 데까지 약간의 텀이 존재했지만, 오히려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째서? 내가 개개인이 맡고 있는 사람들만큼 운전을 잘하는 것도, 무언가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코치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에 강혜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게, 뭔데?”
“신뢰.”
“··· 지금 있는 인원들을 믿지 못하는 거야?”
“그들도 믿고 있어. 하지만··· 나와 그들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 뿐이야.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아. 그 의도를 알기 어려우니까.”
그러면서 이전의 안전 요원이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서 교체되었다는 말을 해주는 그녀.
“불미스러운 일?”
“응.”
“무슨 일이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그건···”
전체적인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안전요원은 강혜린에게 사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요원직을 지원한 것이었고.
그녀가 운동을 하는 등 자리를 비웠을 때 빨래바구니에 있는 속옷을 훔쳤다든지의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으나 샤워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려는 모습을 코치가 목격했고, 곧장 해고 및 고발조치에 들어갔다고.
“아.”
그 말을 듣자 일주일 동안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코치나 안전요원과의 보이지 않는 벽이 어째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건가?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딱딱하게 보일 정도로 사무적인 대화만 오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친해질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섭섭하네.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에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그건··· 네가 군대에 있었을 때이기도 하고, 굳이 말해서 좋을 것도 아니었는걸.”
“그럼 이쪽도 말해서 좋을 게 없는 건 전부 비밀로 하면 되려나?”
“···”
“미안.”
괜히 진지한 상황에서 장난쳐봤다가 혼나고 말았다.
그것 외에도 ‘미안’함에는, 이미 밝히지 못하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신뢰할 수 있다, 라.’
경기가 주로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이뤄지는 만큼, 타지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만큼 신뢰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신뢰라는 단어에서의 울림만큼 기분 좋은 일도 몇 없을 터.
만약 내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오랜 기간을 봐왔던 만큼 느껴지는 편안함과, 이전과는 달라진 여러 가지 모습들로 인해 새로움이 공존할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내가 학창 시절 때 원했던 그녀와의 사귐이라는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 대답은, 질문을 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혜린아.”
“응?”
단 한 마디의 단어로 대답했음에도, 상대가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은 온전히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우선 그런 제안을 해줘서 고마워. 나를 신뢰해 줘서 고맙고.”
“흥. 오래 봐왔으니 믿을 수 있을 뿐이야. 그래서··· 받아들인다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안될 것 같아.”
“···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서?”
해당 물음에 ‘내가 정말 작품 쓰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며, 당시 작품을 썼을 때를 회상해 봤다.
계기라고 한다면, 시도해서 실패하더라도 큰 리스크가 없었고.
나비의 역량을 따져봤을 때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좋아해서 한 일은 맞아. 그런데 ‘이게 아니면 도저히 안될 것 같아’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네.”
“그러면 왜 거절한 거야? 혹시 내 곁에서 일을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런 건···”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노노노.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만약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정확히는 ‘나비를 만나지 않았다면’이었겠지만 말이다.
강혜린은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는지, 다른 것을 물어봤다.
“민감한 주제라서 굳이 얘기 안 하고 있었는데, 물어봐야 될 것 같아. 혹시 돈은 잘 벌고 있어?”
“응. 적당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는.”
그 ‘적당히’라는 기준의 라운더리를 무척 넓혀서 말했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얼마를 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액수 차이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내가 부족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챙겨줄게.”
그러면서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 있잖아··· 우리 동기 모임에서 말이야.”
돈, 그 이후에 동기 모임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그녀가 코인으로 돈을 벌어들인 것을 얘기할 거라는 것을 눈치챘다.
“혜린아, 괜찮아. 얘기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운전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잘게 떨리는 듯했다.
“알고, 있었어?”
“응. 처음엔 짐작하는 수준이었고, 으리으리한 저택을 빌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됐지. 그래서 내가 미국 온 첫날에 네 방에서 이것저것 물어봤었잖아? 기억나지?”
“아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부끄럽다는 듯 고개가 반쯤 숙여진 강혜린.
하지만 이내 고개를 다시 후딱 들더니.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내가 싫어진 거야?”
늘 강인한 모습만 보여줬던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고.
넓은 사막 아래 내리쬐듯 한 햇빛이 회색빛으로 코팅된 전면 유리를 통과해 살포시 닿은 모습까지 더해져서.
내 마음은 또다시 고등학교 1학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절대··· 그렇진 않아.”
“그렇다면, 어째선지 날 납득시켜 줄래?”
“···”
‘적당히 넘어가긴 글렀네.’
내가 그녀만큼 다양한 국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라는 것을 밝힌다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녀가 격투 쪽에서 핫한 신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반면, 내 작품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웹툰 및 소설계의 초신성으로 불리고 있었으니까.
이미 일본만 하더라도 나와 계약한 슈에이샤 편집사에서 주간 소년 점프를 발매했는데, 기존 판매부스 대비 100 퍼가 넘게 팔리는 등 여러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고.
미국 여행을 오기 전에 이용모 캐릭터 ip관련해서 한국과 일본 측의 합의를 했기 때문에 각종 피규어의 제작 예약을 받거나, 대형 프랜차이즈 등과 콜라보가 줄줄이 나올 예정이었다.
9월 중순에 유료화를 시작한 이후로 10월까지 발생한 수익보다, 11월의 절반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때의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나비의 보고서만 보더라도 그 상승치를 이제는 감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어느 정도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을 정도의 작품이었다면 강혜린에게 ‘내가 그 작가야’라고 진작에 말해줬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까 차마 꺼내기가 쉽지 않아 진 것.
적당히 거짓말을 하면서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그녀가 코인 관련된 얘기를 꺼내면서까지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만큼, 이쪽을 신뢰한다고 말해줬던 것만큼.
나 또한 그녀에게 신뢰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 내가 하는 일 있잖아.”
“응.”
“혹시 이용모라고 알아?”
“이용모?”
되묻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는 해당 작품을 잘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긴. 경기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그걸 볼 시간은 없었겠지. 그리고 그간 한 번도 그런 주제로 얘기를 꺼냈던 적도 없었고···’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볍게 숨을 내쉰 뒤 설명에 들어갔다.
“응. 게임 속 이세계 용사 모험기라는 작품인데, 이게 웹툰이랑 소설을 같이 쓰고 있거든?”
이쪽에서 설명하는 듯한 물음에 ‘응. 계속 말해줘.’라는 식의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의 대답은 내 기대를 완전히 벗어났다.
“잘 알지. 웹툰이랑 소설이랑 동시 연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매주 연재하는 내용의 진행속도가 같고, 공통된 이야기 외에도 소설과 웹툰에서 보여주는 각각의 정보 혹은 이스터에그가 존재해서 일단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접하게 됐으면 결국 웹툰이랑 소설 둘 다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성을 지닌 대박 작품이잖아?”
“어? 어···”
속사포같이 내뱉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용모는 왜? 설마 너···”
“응, 맞아. 사실···”
“그 작품 만드는 회사에 취직한 거구나? 하긴, 그런 퀄리티랑 매번 뽑아내는 분량을 생각하면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는 게 맞았다니까. 거기서 뭘 하는데? 회계? SNS관리?”
“···”
그녀는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너 고등학교 때 만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그림 그렸었지? 그러면 설마 작품 제작 쪽에 종사하는 거야? 배경을 그린다든지? 아니면 소설 작품 구상을 하는데 자료를 수집하는 식?”
“··· 총괄인데.”
진실을 얘기했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또다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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