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팬심
[34화]
어차피 비행기 소리로 인해서 주변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그대로 전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 많이 화났어?”
[별로 화 안 났습니다만, 제가 화난 걸로 보이십니까?]
“아, 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 영화를 보느라···”
말을 다 이어가지도 전에 나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영화를 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하니 다 본 이후에 비행기모드를 풀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
어째서 나비는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이마에서 땀이 날 것 같은 것을 참아가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멀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네. 이번이 처음으로 나비랑 처음으로 완벽하게 떨어졌던 거잖아?’
밖으로 외출을 하더라도 스마트폰은 항상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나비가 정보를 수집하지 않을지언정 연결은 상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며칠 전에 그녀가 나와 사귀자고 말을 한 것도, 늘 붙어있다가 떨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불안이 늘어난 탓이다.
앞으론 아예 비행기모드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거듭 사과한 뒤에야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휴우
비행기 모드를 풀고 난 뒤, 그 기간 동안 와야 했던 팝업창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몇 시간 전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대기하는 동안 보내놨던 이메일의 답장이 와있었던 것.
보통은 이메일을 언제 보냈는지 기억을 못 할 즈음, 기간으로 따지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답장이 왔었는데.
이례적으로 빠른 답장이 온 것이었다.
상대방이 보낸 내용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봤다.
정리하자면 우선 미국으로 여행 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했으며.
강혜린 선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게 사실이냐면서, 평소 ufc를 챙겨보진 않지만 해당 선수만큼은 챙겨서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확히 몇 시 비행기를 탔고, 몇 시쯤에 도착하는지 알려달라고 했고.
가능하다면 회신을 빨리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엥?’
뭔가 싶었긴 했지만, 답장을 해줬다.
어차피 해당 친구가 살고 있는 지역과 내가 가는 지역은 미국의 끝과 끝이었던 터라 크게 상관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답장까지 해주고 난 뒤에, 남아있는 여운이 가시기 전에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콘텐츠가 없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반대편 대륙에 있는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14시간이 넘도록 하늘에 떠 있었다.
**
‘분명 낮에 출발했고, 반나절 넘게 비행기를 탔는데 여기도 낮이네.’
8시간 정도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몸에서 잘 시간이라고 외치는 부류와, 쏟아지는 햇빛으로 인해 잘 시간이 아니라고 외치는 부류가 싸우는 걸로 봐선 하루 이틀정도는 골골거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 피곤함을 견뎌가며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도착한 인원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딱 봐도 안전요원같이 생긴 인원이 스마트폰 간판으로 ‘Joon’이라고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강혜린을 통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그쪽으로 다가갔고.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세준!”
누군가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언급하며 뒤에서 나를 안았다.
강혜린이 서프라이즈로 안았다고 하기에는, 풋풋한 냄새와 미국인 특유의 억양이 절대 아니라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던 요원만 하더라도 ‘너 말고 또 누가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이 동그레 지지 않았는가.
결국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나를 옥죄고 있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니.
예상하지도 못한 미국 여성이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강혜린을 제외하고 내가 이곳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건 내가 이메일을 보냈던 옛 친구였다.
‘설마, 미국 유학 때 알고 지냈던 친구인 건가!’
해당 친구가 그녀에게 내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걸지도 몰랐다.
단기 유학을 다니는 동안에 나와 어떤 식으로든 추억을 쌓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보더라도, 눈앞에 있는 여성과 그 당시의 기억이 매치되는 인원이 없었다.
“Um... Are you the friend I met during my short-term study abroad when I was younger?” (그, 나 어렸을 때 단기유학에서 만난 친구 맞지?)
“Right!”(맞아!)
‘역시.’
하지만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실례되는 질문을 해야 했는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
“뭐?”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내 이름을 모른다고?”
“어. 미안하지만 단기 유학 시절 중에 네가 떠오르질 않아. 솔직히 그레이와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걔밖에···”
“푸하하하핫-!”
그녀는 내 말에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었는데, 눈가에 눈물이 조금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상대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쓱 닦고선,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 그레이가 바로 나야, 세준.”
“··· 뭐?”
“Welcome back! Welcome to being back in the United States.” (어서 와! 미국에 다시 온 것을 환영해.)
**
안전 요원 씨가 끌고 온 차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안전 요원,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레이.
애초에 안전요원과 그레이는 알 수가 없는 사이였고, 나와 안전요원의 경우 서로 인지만 하고 있을 뿐 처음 본 사이였다.
그리고 나와 그레이의 경우는···
‘내가 알고 있던 성별이랑 달라져서 어색하단 말이지.’
게다가 하필이면, 같이 가도 되는지 여부를 물어보기 위해서 강혜린에게 연락을 걸었는데.
훈련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을 받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안전 요원은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모르는 인원까지 같이 태워줄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위해서 직접 애리조나까지 와주기도 했고.
단기 유학시절에 나를 도와 주웠던 그, 아니 그녀를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이라, 내쪽에서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설득해서 간신히 차에 탈 수 있었다.
그래서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도 없었고, 해결하고 싶은 의문도 있었던 터라 어떻게든 말문을 트기로 했다.
“미국은 참 자유로운 것 같네.”
“자유롭지! 내가 이렇게 애리조나에 온 것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뉴욕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왔긴? 네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곧장 비행기 타고 이쪽으로 날아왔지.”
그러면서 내게 비행기표를 보여줬는데, 비행기 시간이 5시 48분이 걸린다고 나와있었다.
“대학은 어쩌고? 방학이야?”
그 말에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그레이.
“아하하, 아니. 아직 조금 멀었긴 한데, 대학은 어차피 출석하는 정도로만 다니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어. 뭣하면 한 학기 더 다니면 되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자유로운 그, 아니 그녀였다.
“네가 강혜린 선수랑 친한걸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
“왜긴! 최소한 너를 통해서 직접 사인정도는 받았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저번 대회부터 경기장을 직접 찾아갔었다고. 그리고··· 짜잔! 이번에도 티켓을 구했다는 말씀! 무려 Vvip티켓이란 말이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ufc 티켓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그레이였다.
그리곤 나한테도 티켓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 난 티켓 없는데?”
“우와, 직접 초청받아서 그런 건 챙길 필요도 없다는 거야? 내가 이걸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잠깐만. 너 설마 관계자 좌석에 앉는 거야?”
“관계자 좌석?”
“어! Vvip보다도 더 가깝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는 곳이잖아!”
강혜린이 티켓 관련해서 얘기를 하지 않은 걸로 봐선,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거기 앉을지도 모르겠네.”
“으으···! 부러워-!”
그레이는 내 가슴팍 부근의 옷을 붙잡고선 앞뒤로 흔들며 제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했다.
그러자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던 안전요원은 차량 룸미러를 통해 우리를 스윽 하고 쳐다보다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혹시 나도 같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응?”
“그 티켓은 어쩌고?”
티켓에 당당히 이름까지 박혀있는 걸로 봐선, 다른 사람에게 팔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게 중요한 거지!”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그리 중요한 거야?”
“아아. 강혜린 선수는 UFC도 잘 모르는 너를 초대한 걸까···”
고개 젓는 그레이를 게슴츠레 쳐다보며 말했다.
“왜긴, 친하니까지.”
“나도 이번에 그분이랑 친해질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관계자 좌석부터 물어봐줄래?”
“그래.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런 대답만이라도 좋아.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있는 건 아니니까. 흐흐.”
좋아죽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처음에 묻고 싶었던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기로 했다.
“그레이.”
“응?”
“너 말이야···”
“어. 나 왜?”
꺼낼지 말지 잠시 고민했지만.
침을 삼키고선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성전환은 언제 한 거야?”
“···?”
“···”
아무런 대답이 없이 서로 쳐다봤는데.
그녀는 그동안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전환? 내가?”
“어. 원래는 남자였잖아.”
어렸을 때의 그녀, 아니 그는 어떤 사람들보다 당찬 모습을 보여줬었다.
스포츠머리에 지금보다 훨씬 피부가 탄 상태로 그 반의 분위기를 이끌던 리더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결정적으로 그녀가 남자라고 생각한 이유는.
이메일로 종종 여성들과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줬더니.
‘그래서 네가 나를 못 알아봤던 거구나!’라며 또 한 번 대폭소를 했다.
“··· 왜?”
“있잖아, 세준.”
“응.”
“미안한데, 나는 단 한 번도 남자였던 적이 없었어.”
“뭐? 그러면 여자친구는···”
“내가 ‘여성’으로서 ‘여성’과 사귀었을 뿐이야.”
“아.”
즉, 그녀는 레즈비언이라는 소리였다.
“네가 처음에 미국은 자유롭다고 한건, 다른 의미로 말한 거였구나?”
그녀가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보자, 뜨끔한 나는 시선을 피하며 창가 쪽으로 향했다.
“으음···”
“그럼 지금까지 나를 남자로 대했다는 거구나?”
“그랬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기 유학을 다녔을 때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다가.
‘··· 어?’
“그러면 우리가 같이 목욕을 했을 때에도···”
“아,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였어? 음흉하긴.”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레이가 트렁크 팬티를 입고 있는 상태로 목욕을 들어온 이유에 대해서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목욕을 한다고 했을 때, 어째서 그레이의 아버지가 눈을 좁히고 나를 쳐다봤는지도.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러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원래부터 레즈비언이었던 거야?”
“글쎄? 어느 순간 알게 된 거지. 여성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렇구··· 잠깐만. 너, 그러면 혹시 강혜린 선수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뒷말을 이어서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곧장 내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앉아있는 상태로 펄쩍 뛰며 강하게 부인했다.
“노노! 그런 거 아님! 순수한 팬심일 뿐이라고!”
아니라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의심이 치미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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